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이따금 경주의 복원 CG라며 돌아다니는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룡사를 검색하면 빠짐 없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 출처를 얼마전에야 알았습니다. 2016년에 경주시에서 제작해 공개한 영상의 그림이었습니다. 어느 커뮤 게시판에 올라왔던 걸 추적하다 보니(거기도 출처는 없었거든요) 발견한 것인데 거기에 실린 댓글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대개는 이렇게 거대할 리 없다. 조선시대 한양도 이거보다 작고, 거긴 초가집도 많았는데 이 화면에선 전부 기와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과정이 너무 심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그 반응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 한양도 그리 대도시가 아닌데 천년 전의 도시가 더 크고 반짝반짝 할리 없다 생각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겼다는 "고려도경..
한국의 역사학계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실상은 대우주의 저편 만큼이나 먼 것들이 많다. 1. 외부에서는 이 사람들을 매국노의 정신적 기반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역사학계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자/국가주의자에 가깝다. 나름 여기서 진보라고 불려도 전세계 역사학자들 모아놓으면 극우는 아니지만 꽤나 우파 한복판에 우뚝 선다. 관악산 아래 뾰족철문 학교도 사실 민족주의적이라고 하면 다들 '미대통령이 도람프라고 니도 도랐나?'하겠지만.. 2. 한국의 고고학자들의 상당수는, 또는 일부는 고고학 없이는 고대사는 존립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중에 만들어진 문자기록 보다는 고고학 유물이 당시 현실을 더 잘 보여준다고. 가끔 유구 도면도 볼 줄 모르는 문헌학자들이 보고서 결론만 보고 지낀다고 불만을..
한국고대사연구에서 고대 언어를 활용할 수 있을까?어떤 이들에게는 신선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른바 '업계'에서는 오히려 진부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지겨울 정도로, 비유하자면 항생제 사용은 아무것도 아닐 수준으로 남용하고 있었거든요. 과거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후 한국고대사연구의 기반을 다지는 초창기까지 긴 시간에 걸쳐 언어를 활용한 연구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특히 역사학계가 주목한 것은 위치비정과 같은 역사지리였습니다. 일단 이해를 돕기 위해 사설을 풀자면, 소위 사람들이 상상하는 '고차원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선 가장 기초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무슨무슨 전투로 인한 국제관계의 변화같은 거시적 연구를 하기 위해선 일단 무슨무슨 전투가 어디서 일어났는지부터 이야기해야합니..
한때 고고학과 고대사 업계에서는 전파론이 강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진 문물이 저쪽에서 '하사'되어짐을 당하면 넙죽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혹시라도 지난세기 80년대를 풍미한 고대한일관계사 이야기를 접하신 적이 있다면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거의 삼국인들이 일본인들 턱 붙잡고 '아~해, 이 色姬야'하고 신문물 한 숫갈 입에 물렸다는 식의 관점. 그러나 문제는 중국과 우리로 무대를 바꾸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리 주장하다 80년대 한일고대사로 작게나마 복수하였다고 우겨보면 편하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을 중시하는 수용론이 쥬류가 되긴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고 좀 더 냉정하게 사안을 분석한다는 것..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김부식[同接伴 通奉大夫 尙書禮部侍郞 上護軍 賜紫金魚袋 金富軾]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문벌가문[大族]으로 전대의 역사[前史]에 이미 실려 있었다. 박씨朴氏와 더불어 가문의 명망[族望]이 서로 대등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 가운데 글을 잘 하고 학문에 정진[文學] 함으로써 등용된 사람이 많다. 김부식은 얼굴이 크고 장대한 체구에 얼굴은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런데 두루 통달하고 기억력도 탁월하여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망을 얻는 데에는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우 김부철[富轍] 또한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찍이 그들 형제의 이름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