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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장보고 03 - 두 사람의 다툼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장보고 03 - 두 사람의 다툼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0. 3. 23. 18:59

그러면 정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장보고와 때로는 경쟁하듯, 때로는 사선을 같이 넘은 정년은 어디에 서있었던 것일까요? 바다를 주무르던 장보고의 곁에 정년이 서있지 못할까요? 무언가 사연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원문

保臯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臯” 元規曰 “若與保臯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

- 번역문

(장)보고가 귀해진 동안에 (정)년은 관직에서 물러나 춥고 굶주린 상태였다. 사주 연수현에 머물던 어느 날, 수장인 풍원규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동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의탁할 생각입니다’라고 하니 원규가 말하기를 ‘보고와 더불어 같이 하지 못한다면(같이 살 수 없다면) 어찌 거기를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 물었다. 정년이 대답하기를 ‘춥고 굶주려 죽는 것은 칼에 죽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 것에 비하겠습니까?’라 하고는 드디어 (신라로) 떠났다.

장보고가 귀국한 이후에도 정년은 당에 남아있었습니다. 이 시점에 관직에서 물러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아마 절도사에 대한 제어력이 되살아난 시점과 절도사간의 무력항쟁이 진정된 상황에서 군사력의 축소가 병행되는 과정과 관련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즉 수요가 줄어들자, 아니 경기가 위축되자 일자리가 줄어든 탓이지요. 아무리 당이 매우 개방적이었다 하여도, 외국인에게 최소한 군인의 길이 열려 있었다 하더라도 중국인이 아닌 담에야 제약도 많고 견제도 많이 받았습니다. 통일기 직후 당에서 활동했던 고구려의 남생부자나 백제의 흑치상지의 말로, 그리고 한 세대 뒤인 고선지가 중국인 장수들에게 멸시를 받는다던가, 그 역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신라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는 사수군泗水郡 연수현漣水縣에서 겨우겨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이 열전을 작성한 이에게 그건 중요치 않았다는 것은 다음 편에 이야기 하죠) 우리로선 알 수가 없었습니다. 품일을 하던지 장기를 살려 경호원이나 수행비서 역을 맡았는지 모르죠. 아니면 정말 거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동아시아 왕조의 관료시스템이란 지극히 작은 정부입니다. 일의 종류는 방대하지만 관리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재정경제부의 예산관리 국장이 환경부의 유해물질배출시설 인가를 내주고, 오후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독도관련 자료집 출판을 검토하고 퇴근 전 교육인적자원부의 초등학교 과학 교과과정에 대한 회의를 주재한다는 식이지요. 가뜩이나 적은 일자리인데 그것을 한 사람이 여러 개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에 지연, 학연, 혈연과는 거리가 먼 정년이 치고 들어갈 여지가 없죠. 중국인도 아닌 신라인인 그가 결국 선택할 것은 하나입니다. 눈을 낮춰서 계속 낮은 자리에서 입에 풀칠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 여기에 남아있을 수나 있을까나.

그런데 읽으면서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셨는지요. 왜 정년은 장보고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왜 풍원규는 장보고가 해칠 것을 걱정하는가, 그리고 정년은 굶어죽느니 칼맞아 죽겠다는 말을 하는 걸까요?

다시 처음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즉 장보고와 정년이 서로 으르렁 거리는 사이였다는 것을. 그들이 서로 우위를 논하고 있었을 때는 고향이라는 장소였지요. 그런데 고향이란 곳은 지금보다 더 얽힌 것이 많은 곳이죠. 그야말로 퇴니스가 말한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즉 공동사회입니다. 이곳의 대인관계는 전통과 화합이란 이름으로 묶여있지요.

만약 이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우더라도 그를 중화시켜주는 요소가 많았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혀 다시 안볼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는 없지요. 두 사람의 대립이 일어나더라도 ‘동생한테 그러면 되나. 형이 양보해야지’, ‘형에게 대들면 쓰나, 아랫 사람이 예절이 있어야지’, 또는 ‘너희들 자꾸 싸워 소란 피울꺼냐!’ 이런 말이 갈등을 많이 억눌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그들에게 중화요소가 더 이상 작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새로운 환경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사소한 것들도 폭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의견 대립도 있고, 자리도 경쟁해야 하고, 각자 누구에게 줄을 대느냐에 따라 둘 사이의 변수는 많아집니다. 바로 이것이 정년으로 하여금 귀국하는 장보고를 따라가지 않고, 또 귀국하는 마당에 죽음을 결심하게 한 이유가 된다고 하면 소설이 될까요? 그렇지만 이런 면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삼국사기의 열전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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