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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진성왕의 박하사탕..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진성왕의 박하사탕..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11. 19. 12:15
원문
冬十月 立憲康王庶子嶢爲太子 初憲康王觀獵 行道傍見一女子 姿質佳麗 王心愛之 命後車載 到帷宮野合 卽有娠而生子 及長體貌魁傑 名曰嶢 眞聖聞之 喚入內 以手撫其背曰 "孤之兄弟姉妹 骨法異於人 此兒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仍命有司 備禮封崇

 

해석
가을 10월, 헌강왕의 서자 효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처음 헌강왕이 수렵을 나갔다가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발견하였는데 자태가 매우 고와 왕은 마음 깊이 사랑에 빠졌다. (왕은) 명을 내려 (자기가 탄 것의) 다음 수레에 태워 장막으로 세운 행궁에 이르러 야합하였다. 금새 태기가 있더니 아들을 낳았다. 자라매 모습이 매우 뛰어났으므로 이름을 이르러 효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듣고 궐 내로 불러들였다. 손으로 그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과인의 형제자매는 뼈의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뼈 두 개가 우뚝 솟았으니 진실로 헌강왕의 아들이 맞다'고 하였다. 이에 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예로써 받들게 하였다.

 

사실 이 그림엔 모자이크가 둘 있습니다.(빈칸도 모자이크다!!!)

서기 895년의 가을은 너무 서늘했습니다. 양길의 품을 벗어난 궁예는 이 해 가을에 성천군과 저족군, 그러니까 지금의 화천의 일부와 양구군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후 궁예의 행로는 철원, 김화를 거쳐 송악(개성)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미 남서쪽에서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세력기반을 넓히고 있었습니다.(물론 공식적으로 왕을 칭한 것은 5년 후입니다만) 이 때 경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바로 진성왕의 후계자가 이때 정해집니다. 자식이 없던 진성왕은 오빠이자 선왕이었던 정강왕의 사생아를 찾아 다음의 왕위계승자임을 선포한 것이지요.

 

신라 하대의 대혼란은 원성왕 사후 여러 아들들에 의해 촉발되었지요. 특히 장자 인겸과 3자 예영의 자손들은 치고박는 대 혈투를 벌입니다. 때로는 같은 가계 안에서도 치열하게 싸움을 치뤄야 했지요. 그나마 예영의 아들 균정계가 정권을 잡나 싶더니 아들의 대가 끊기고, 또 왕위계승전의 상처를 보듬고 화해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왕이 된 사람이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입니다.(경문왕의 할아버지는 균정계의 원수라고 할만한 희강왕입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로도 유명한 경문왕은 큰 뱀이 밤에 나타나 가슴을 덮는 등의 자신의 신이함을 과장을 섞어 과시했습니다. 당나귀 귀 이야기는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은 자신의 집안 식구들의 골상은 범상치 않음을 강조합니다.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일까요? 분명히 신성성을 강조하며 왕위 위엄을 강조하는 것은 천마총이나 금관총같은 거대고분의 시대와 함께 먼 과거의 유물이 된지 오래입니다.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않았지만 이제 왕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수사는 현실적으로 덕업 충만한 군주로 바귀어 가던 시대입니다. 뒤늦게 왕의 신화적 신성함이라니 이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물론 후대의 왕들도 신성함을 강조하기는 했습니다.

용비어천가에 그려진 태조의 무용은 그야말로 무신에 가까웠지요.

(물론 어느 정도는 인간적이긴 합니다)

고려의 왕실은 자신들이 용의 자손임을 망하는 그 날까지 과시했지요.

(요 얘긴 몇 년 동안 써먹을 타이밍만 재는 겁니다. 언젠가...)

그러나 후대 왕조들에게 괴력난신의 기이한 이야기의 비중은 낮습니다.

하물며 통일신라만해도 그런 이야기의 색채가 점점 얇아져 가고 있습니다.

 

뭐, 왕가의 골상에 관해 유명한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에 의한 주걱턱이 있지요.

당시의 신라도 근친혼이 일상적이었으므로

(당시의 관념으로는 결혼할 수 있을 정도 신분을 가진 자가 극히 적었습니다)

정말 그런 우전적 결함이 나타났을 수도 있습니다만,

정확한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추론은 위험합니다.

 

다시 그 신성함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지요.

왜 저물어가는 신라에 왜 이런 상고기 때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요?

어떤 연구자는(누군지 기억이 안납니다. 책을 찾아봐도;;;)

경문왕계의 특징을 복고성으로 보더군요.

다시 신라의 리즈시절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이런 신화적 수단를 통해 표방한 것이라는 겁니다.

뱀이 가슴을 덮고, 그것에 절대 겁내지 않는 왕,

귀가 매우 커서 남다른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다른 뼈의 모습.

그러나 골품에 따른 의식주의 제한을 둔 흥덕왕의 복고적 개혁이

결국 실패로 끝난 것처럼

이미 약발이 다한 초기화 정책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지요.

시대는 변했는데 시계를 수세기 전으로 돌리려는 행위는

그야말로 시대착오의 최첨단입니다.

머리를 땅에 박고, 달리는 기차 앞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외쳐보지만

현실은 가을을 지나 모든 것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겨울로 달려가고 있었지요.

 

비지오보다 한글이 왕실족보 그리기 좋습니다(웃기지마!)

 

말꼬리 -----------------
1.
진성여왕은 앞선 여왕들에 비해 욕을 바가지로 먹는 편인데
사실 그렇게 막장은 아니었습니다.
하필 왕의 딸로, 명짧고 돈(권력) 많은 오빠들의 여동생으로 태어났다는 게 유일한 죄.
2.
위의 원문에 帷宮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막을 친 행궁
(임금이 머문 곳은 초가집이어도 궁궐이 됩니다)
또 다른 의미로 일종의 종묘같은 것인데
뭘 해도 신분이 낮은 여자와 쎄쎄쎄 했으니 야합이 됩니다.
3.
원래같으면 '등짝을 보자' 드립도 쳐야겠지만
그 걸 이 글에 넣으면 정말 개드립 가득한 가나안 땅,  서방정토가 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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