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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726년의 어느 연회에서..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726년의 어느 연회에서..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1. 3. 8. 21:58
천무천황의 손자이자 고시황자의 아들인 장옥왕(나가야왕, 684?~729)은
어느 날 자신의 저택에서 신라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한 수 읊습니다.

높은 가을 하늘에는 멀리 석양이 비치고
먼 봉우리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다.
금란과 같은 굳고 친밀한 교류를 사랑함이니
청풍명월의 자리에서 피로한 줄도 모른다.
계수나무 행기로운 산에 머무는 석양빛이 발하고
국화 향기로운 포구에는 낮게 펼쳐진 저녁놀이 선명하다.
일본과 신라 사이가 푸른 물결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 말게나
언제까지나 연석에서 무르익은 사념은 시로 풀어 버리세.

- 사호의 저택에서 신라손님을 위해 연회를 열다.

이런 집이었을까요? 바로 나가야왕의 저택을 복원한 모형입니다. 단 연회의 무대였는지는 혹실치 않습니다.



다른 시의 주를 보면 이 시는 726년의 가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과의 교류에서 통일 이후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는 779년까지 
45회의 신라사신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726년에도 신라사신이 일본에 갔었다는 것은 "속일본기"의 기록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단, 기록에 따르면 여름에 온 사신은 김조근金造近이고 
가을에 돌아갈 때는 김주훈金奏勳으로 나오는데
먼저 김주훈이 있었다가 김조근이 오자 교대해서 돌아가는 숙위도 아니었으니
아마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신라 사신이 찾아오니 당대의 실력자였던 나가야왕이 
외국사절을 대접하는 연회를 크게 벌인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외국과의 정보교류가 지금과 같지 않았던 시절에
술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정보가 되기도 하였고
또, 언제 변화할지 모르는 국제관계에 대비, 인맥을 구축하는 것은 외교의 기본이었으니까요.

"삼국유사"에서 수로부인의 남편으로 나오는 김순정이 죽은 것은
사신을 떠나 보내는 자라에서 성무천황이 언급할 정도로 큰 화제였는데
이 날의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도 돌았겠지요.
혹시라도 아름다운, 너무나도 아름다워 용왕도 어찌할 줄 몰랐던
그 부인에 대한 이야기 역시 끊이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자국의 문인들이나 기예가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 재주를 맘껏 선보이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과도 관련되었습니다.
당에서 바둑의 능한 자를 사신으로 보 신라인들과 겨루게 한다던가
베트남에서 중국의 사신이 타는 배에 고승을 사공으로 위장시켜
우리는 일개 사공도 한시를 능란하게 짓는다고 뻥카를 치듯이 말이죠.

이런 자리에 모인 인물도 각양각색이라
난파경 후반에서 평성경 시대에 이르는 시들의 모음인
회풍조의 후반부는 이날의 시들로 가득하고
저마다의 개성을 뽐냅니다.

어쩌면 이런 연못도 있었겠지요. 물론 이건 평성궁 내의 연못입니다.


뒤의 헤이안 시대의 연회는 밤을 불태웠다하니 이때도 그러하였을지는 모릅니다.
3년 후 후지와라씨와의 갈등이 빌미가 되어
나가야왕은 모반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했습니다.
바로 정창원으로 대변되는 천평의 번화하지만 너무 치열하던 시기를 살다간 댓가치곤 컸지요.
요즘 이 시대의 국제관계를 뒤적이다보니 재미있는 것들이 종종 나옵니다.
회풍조도 그 와중에 구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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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의 해석은 "회풍조"(고용환 역, 지만지, 2010)의 144쪽을 옮겼다.
2. 사진은 각각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平城京(2010)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3. 갑자기 오랜 방치끝에 난데 없이 먼 일본의 이야기로 다시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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