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구려 도성의 구역정리가 기자의 이상향으로 둔갑한 이야기.. 본문
사실 오늘 같이 이렇게 지나가는 글로 사용할 글감은 아닙니다. 책으로 치면 장 하나를 사용해서 이야기할 주제지요. 그러나 이 주제로 글을 써야지 맘 먹은지 1년이 지나고, 갈 수록 관심이 멀어지는 와중에 언제 쓰나 싶어 개략만 끄적거려볼까합니다.(지금 머리 맡에는 화랑에 대한 책이.. 다시 삼국사기의 화랑이야기 준비중임돠)
고대로 올라갈 수록 인구도 적고, 반면에 권력이 신적 권위에 더 많이 기대던 때라 후대 도시보다는 인위적이고 도식적인 면이 많습니다. 화약병기 도래 이후 전쟁사의 흐름은 병사들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는 것처럼, 후대로 내려올수록 인간의 거주 분포는 입체적입니다. 그런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인구도 적고, 인간의 자연개척 기술이 자연의 자체 수복력을 넘지 못할 때는 소수의 인간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살지요.
가끔 삼국시대의 도성인구수를 이야기할 때, 기록의 수치가 비정상적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그니까 기록을 1~2차원적으로 분석하니 그렇지!) 고대로 살 수록 현대의 인구분포와는 다른 면이 많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서울이 차지하는 면적은 1%도 못미치는데 기계적으로 따져도 전 인구의 20%가 살고 있고 30~40%가 경제적으로 묶여있어서 서울편중이 심하다고 난리지만 고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여긴 지방의 비중이 왜이리 높아?'라고 볼 겁니다.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사는 비중은 현대 다음으로 고대가 높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튼 각설하고
사람들의 거주분포가 입체적이지 않고 위성궤도에서 보자면 점과 선으로 구성된 모습을 보여주는데다 인구수도 적으니 그들의 공간은 매우 도식적이 됩니다. 어쩌면 세게사 시간이나 나중에 중국사책에서 읽으셨을 질서정연한 바둑판형 도시계획은 그래서 나옵니다. 좀더 종교적이고 인구도 적으니 편제에 인위성이 강해지죠. 쉽게 풀자면 권력자의 희안한 심시티 놀이랄까..
거기 옵하들! 군주명과 에디트한 허창의 방어력에 눈길 주면 지는거얌!
삼국지를 하다보면 이런 도시 그림은 많이 보셨을 겁니다. 성의 모양은 비정상이지만 도시 내의 구획은 질서정연하지요. 아래 사진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경주의 도시모형이죠. 지금 경주의 발굴은 구제발굴이 아니면 대개 이 모양을 찾아내는데 주력합니다.
특별전 통일신라, 소도록에서 인용.
"주례"라는 책에서 볼 수 잇는 것처럼 정연한 도시계획의 역사는 매우 긴데, 처음에는 군주의 왕궁은 도시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십이국기"라는 소설, 그것에 기반을 둔 애니를 보신 분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왕은 우주의 중심이니 수도에서도 중앙에 위치하는 게 맞죠. 위진남북조의 북위 전까지는 왕궁이 중앙에 위치합니다.
일본어가 안되도 혼자 일본갖다오고 일본애니를 보는 애라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헤이죠쿄(평성경)어쩌구하는 책의 제목엔 수년째 관심이 없어서..어쩌구저쩌구... 하여간 그 책에서 인용.
동아시아에서 마지막 올드타입 도시계획 도성인 일본의 후지와라쿄(등원경)입니다. 갑자기 기억나진 않는데 일본학자인가 우리나라 학자인가 한 분이 이 등원경 건설시 신라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당시 신라가 나당전쟁으로 껄끄러운 상태라 구형 도시게획 정보밖에 안가지고 있어서 신라도 줄 수 있는 정보가 이거 밖에 없었다고 한 적이 잇죠. 요 얘기는 종종 햇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말도 안됩니다. 이거 유행 지난 게 중국에선 수백년 전이고 그동안 신라나 일본이나 중국에 안간 게 아닌데 말이죠. 다만 일본의 당시 사유 체계가 최신 것을 소화할 능력이 아니었다고 보는 게 맞죠. 이거 지을 당시로 회풍조라는 시집이 나오는데 , 그게 한시의 모방이었다는 걸 생각하면(만엽집은 그 모방을 거쳐 일본색이 나오는 거고) 아아.. 또 어려워진다. 요 얘긴 패스!
역시 헤이죠쿄 어쩌구 하는 책에서 인용
왼쪽이 북위 낙양성이고, 오른쪽이 당나라 장안성입니다. 북위때는 왕궁이 좀 위로 올라갔죠. 당의 왕궁은 북쪽에 놓여있습니다. 문제는 궁성자리가 습지라 북쪽으로 돌출한 새 궁전(대명궁)에서 살았죠. 이유는 아마 군주는 남면(남쪽을 보고)하고 신하는 북면(북쪽을 본다)한다는 관념이 구체화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전히 황제는 지상의 절대지존이지만 좀더 신비주의 물이 빠져나가니 이념적으로 해석한 결과지요. 서울의 경복궁이 북쪽에 자리한 이유도 그렇습니다. 고려의 수창궁은 남면이 아니라 서면인가 동면이고 조선의 한양은 좀 뒤죽박죽이지만 그래도 바둑판형은 지키려 노력합니다. 고려와 조선의 수도건설은 이념보다 지세에 따른 결과구요.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이제 본론입니다.(!)
고대의 도성은 사단장의 뜻에 따른다에 가깝지요. 좀 더 억지로 우겨넣는다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우리 땅의 지세는 고려합니다만 그래도 후대에 비해선 원리주의에 좀 더 가깝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평양성이 기자의 이상향으로 둔갑한 것을 다루어보기 전에 지도를 보지요.
아즈마 우시오, 다나카 도시아키가 쓰고 박천수, 이근우가 번역한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동북아역사재단, 2008)의 도판입니다.
일제시대에 조사한 평양성에 대한 조사 결과입니다. 당시에도 장안성(평양) 남부에 해당하는 부분에 바둑판형 도시계획의 흔적이 보입니다. 발굴조사가 아니라 지형도 만들다 나타난 거라 추정에 가깝습니다만 1920년대의 일본인들이 상상으로 그린 것은 아닙니다. 외려 유물이 나와도 감추던 시대인데요. "나의 식민지는 이렇게 발전하지 아나..!!"라고 외쳤으면 외쳤지.
조선 후기 평양전도인 "기성전도"에도 정밀하진 않지만 바둑판형 도시계획의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개나소나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읽는 이가 거의 없는 한백겸의 역사지리서에 재미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니 그림요. 이 지도의 제목과도 연관있는 것이요.(아! 왜 읽는 이가 거의 없냐고요? 번역이 안되고 원문 영인본만 있는지라서죠)
한백겸의 구암유고 중..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라는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공무원시험에도 많이 나오고요.(그런데 그 교재들의 사학사 파트는 전혀 안본 놈이 썼다. 도덕책이 지리책 되고, 역사서가 지리서가 되는.. 그걸 죄다 베끼니 그게 정설로 둔갑하고) 고대사에서는 삼한과 삼국초의 역사지리에 대해 현재 학계 통설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책이죠.(짐순이는 읽을 수 없지만.. 적어도 아는 척 안했다. 엣헴~!) 그 책과 함께 구암유고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실린 그림입니다.
한백겸은 평양에 가서 도시 구획을 보고 이것을 중국의 성인(정확히 말하자면 은나라 멸망기 3명의 정상인 중 하나) 기자가 주 무왕의 책봉을 받아 단군조선을 대체해 새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증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냥 보면 미친 사대주의자 色姬라고 까일만하죠. 그런데 이것은 단순 역사고증이 아니라 실학자들의 토지제도 개혁론의 일환으로 역사적 근거로 사용된 겁니다. 여전론, 한전론, 정전제.. 등등 대토지 소유자가 자영농을 압살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과거의 이상주의적 제도(실제로는 거의 행해지지 않은)를 시행하자고 하는 거죠. 1차원적으로 보자면 몰역사적이고 과거 회귀적인 수구 꼴통논리로 보이겠지만 .. 당시 입장에서는 거의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같은 과격론이죠. 요즘에야 잘봐줘야 낡은 진보로 보이겠지만.
사실 이 글을 준비할 때는 한백겸과 조선 후기의 사상계를 디스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보다보니 맨 아래 그림만 본 우리는 손톱의 때만 보다 달보기를 멈춘 꼴이었지요. 조선 후기에는 지난세기 막판의 지자제 실시 초기처럼 자기 고장 역사 꾸미기/뻥튀기가 유행한 시점이라 어떻게든 중국과 연결시키려는 움직임도 있고요. 기자 동래설의 영향력이 강해진 게 이때고..
그런데 요즘 고구려 어쩌구 떠드는 놈들 보면 한백겸과 조선 후기 사람들 욕할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시절 사람들이 착각은 했지만 그래도 뭔가 바꾸려고 한 건데 요즘 인간들은 자위를 위해 사용하니까요.
여기서 종교라는 단어를 (자위용)역사로 바꾸면 됩니다.
(자위용) 역사는 #과 같습니다.
하나쯤 있어도 좋겠지요.(다만 인류의 반이 그러면 TS물이 됩니다!)
그걸 자랑스러워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발 사람들 앞에 꺼내거나 또 그걸 휘두르진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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