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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모본왕 2년, 이병도가 옳았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모본왕 2년, 이병도가 옳았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23. 6. 5. 23:24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폈습니다.(물론 전혀 안 들쳐본 건 아닙니다. 이 블로그 글을 위해 펴든 것이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말이죠) 이 대목을 꺼내 든 것은 마침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라는 책을 보기 위해 가평의 도서관까지 갔다가(삭주에는 없습니다)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이 첫째요. 마침 "남만 탐미다례 천년사"의 일로 시끄러운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원문
二年春, 遣將襲漢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번역
2년 봄,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케 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덕과 신의로 대하니 이에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조

담기양, 중국역사지도 2권, 27~28쪽

일단, 눈에 들어오는 지역의 위치는 이렇습니다. 지금의 북경의 위쪽. 춘추전국시대의 감각으로는 연과 조가 자리한 지역입니다. 지도에는 태원군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북평, 어양, 상곡은 유주관내지만, 태원은 병주관내입니다. 그래서 화살표로 때웠습니다. 좀 더 알아보기 쉽게 박지도에 지명 표시를 하는 것이 깔끔하지만, 마침 작업 중인 노트북에 이걸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안 깔립니다.

고구마'고구마백가심자'인 것이다! 초기 국가의 성격과 대외관계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약간 앞 시기인 왕망의 신나라가 구려후 추(중국기록)/고구려 장수 연비(삼국사기)를 죽였다는 대목과 함께, 모본왕 2년의 군사행동은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였습니다. 정말 고구려가 저런 공격이 가능했을까?

해당연대인 서력 49년은 (삼국사기 연대를 믿는다면) 고구마 건국으로부터 100년도 안된 시점입니다. 부카니스탄식으로 해석하면 300년이 갓 지난 시점이군요. 그 당시에 이런 공격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최근까지의 연구는 이 기록을 믿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매우 일시적인 강습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또 후한 초기 대외관계의 흐름에서 흉노와의 관계에서 공백이 생긴 틈을 고구마가 파고들었다는 분석까지 다양한 입장에서 이 기록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현재 학계의 이 기록에 대한 주된 입장입니다.

이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이 4군이 너무 멀다는 걸 전제로 하고, 긍정하는 입장에선 그 멀다라는 관점이 매우 모호하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최근 학계에선 유리왕대가 아니라 한참 후에야 국내성으로 천도했다는 것이 주류 의견이지만) 모본왕대에 국내성이 수도라고 가정하고 4군에서 가장 먼 태원군(산서성 태원시)까지 직선거리로 거리를 재면 무려 1200㎞라는 거리가 나옵니다. 그것은 집안 공항에서 비행기를 띄워 모든 조건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날아간 다음 태원공항에 착륙한다고 가정을 해야 나오는 수치고, 실제로 다면적인 환경에 따라 생성된 교통로를 따라 이동한다면 곱절이 걸릴 수도 있는 거리입니다. 특히나 요동군과 요서군을 우회하여 흉노와의 접경지대를 돌파할 경우 2천㎞는 우습게 초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글어스로 그려본 최단 거리.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양, 상곡, 그리고 그 태원 위쪽의 안문군 등의 군현은 그야말로 낙양 북쪽을 지키는 중국의 요충지입니다. 이런 군현이 뚫리면 그다음은 태원이 될 것이고, 거기서 낙양까지는 말을 타면 고속버스로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430㎞입니다.(이건 태행산맥의 대협곡을 따라 교통로가 딱 정해져 있으므로 그 경로로 계산한 거리입니다) 기왕 태원을 찍었으니, 2000㎞가까이 '오빠 달려'를 했으니 좀 더 가서 낙양까지 함 먹어야 대륙의 지배자다운 풍모 아니겠습니까?

연구의 논의로 한정하자면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매력적인 이야기가 실제 일어났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당시 고구마국 사람이 국내성이라는 산골짜기에서 출발해서 유주를 관통하고 병주의 중심까지 가는 길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통로, 날씨, 경로상에 위치한 사람들, 또는 정치체가 우호적이냐 적대적이냐 등, 지금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조망할 수 있을 정도로 빠삭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바로 인접한 요동군에 대한 지리 정보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 너머 요서군? 여기서부터는 잘 알 것이란 자신이 없습니다. 백보 물러나 일시적인 강습, 군사적 캠페인이라고  할 경우라도, 가서 전원 죽을 것이 아니라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고구마 사람들이 기마민족이냐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대평원을 말달리고 활을 쏘는 기마민족이란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만주라고 해서 모두 평원이 아닙니다. 특히 졸본이나 국내성이 위치한 지역은 산악지대입니다. 삭주와 명주, 지금의 강원도 내륙 산간지대 사람들이라면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을 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어디까지나 산간지대를 이동할 수 있는 작은 말입니다. 과하마, 그러니까 과일나무 아래를 지날 정도로 키가 작은 말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오프로드용 SUV나 픽업트럭으로 F1 경기에 나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물론 F1 사무국도 참가 규정상 불허할 테지만요)

여기까지는 매우 고전적인 문제입니다. 과연 고구마국이 이런 대원정, 혹은 일시적인 강습을 감행하고 최소한 일부라도 귀환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을 먼 거리까지 투사할 수 있느냐를 증명해야 합니다. 한반도를 놓고 볼 때 그렇게 풍족하지도 않은 함경도 해안가의 옥저를 꿀꺽 삼키고서 좀 배고픔이 가시는 수준의 국가가 그런 대원정을 감행할 수 있느냐, 또는 기마민족에 가까운 경제형태를 가진 곳이었나 하는 의문이 답해야 합니다.

셋째로, 흉노가 잠시 물러났다고 하니 후한도 경계태세를 풀어야 합니다. 하북성과 산서성 북방의 군현은 섬서성 북쪽 오르도스지역만큼이나 고대 중국의 국방 요충입니다. 늘 의도한 것만큼 잘 돌아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할 수 있는 데까지 온정신을 집중해서 쥐고 있는 지역입니다. 저쪽이 더 강해서 그 방어선이 송송 뚫리는 건 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중국이 손을 놓은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시점도 사실은 손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된 것일 뿐입니다.

넷째로 후한 초기면 왕망 때려잡는 사이에 우후죽순 솟아난 경쟁자들도 솎아내던 시기였고, 그런 부분에서 안보의 공백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요동군과 티격태격이냐 전국체전 수준으로 일어났던 일이고, 잘하면 요서까지도 단기결전으로 파고들어 갔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언급한 4군은 요동과 요서와는 군사적 경계 수준이 아주 다른 곳입니다. 요기 뚫리면 가뜩이나 방어에 취약한 낙양까지 날아간다는 것인데, 아무리 천하통일을 하려고 해도 여기를 놓쳐서는 정말 죽도밥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다섯째로 과연 흉노와 연계가 있었을 것이냐 하는 건 현재 자료로선 도저히 알 수 없을 그야말로 가정의 단계입니다. 전혀 존재 자체를 모르지는 않았겠지만,(흉노는 그야말로 당시 동아시아의  초특급 아이돌 같았습니다) 그 가정이 현실화할 때 필요했을 매우 정교한 외교적 절차까지 가능할 정도였겠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요. 후대의 광범위한 외교를 염두에 두고 가능하지 않았겠느냐고 한다면, 지금도 책을 비행기로 나르는 시대니까 임진왜란 때도 비차/비거로 전주사고의 실록을 피신시켰겠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이 고구마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

二十五春正月, 遼東徼外貊人<貊人, 穢貊國人也. 貊音陌> 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건무) 25년 봄 정월, 요동 바깥의 맥인들이 우북평・어양・상곡・태원에 쳐들어왔다. 요동태수 제융이 타일러 복속케 하였다.
- "후한서" 권1하, 광무제기 제1하.
 
建武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건무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에 쳐들어왔다. 요동태수 제융이 은덕과 신의로 타이르니 모두 친분을 회복하였다.
-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고구려조.

 

후한서 동이열전뿐만 아니라 해당 연대기인 본기기록을 보아도 고구마와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의 중국 측 담당자인 요동태수 제융의 열전에도 고구마를 이때 쓰다듬었다는 식의 기록이 나옵니다.(아, 그것까지 일기 귀차는거시다) 어느 응가멍청이가 봐도, 당시 제일 중요한 기록에서 고구마가 범인이라고 하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 뇌를 교환반품해야지요. 

그런데 본기의 맥인과 열전의 구려 사이에는 이 사건에만 그치지 않는 간극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맥이 고구마를 말하는 것이냐지요. 다들 맥하면 이건 고구마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맥이란 말 자체가 듕궉인이 아닌 이민족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마치 바바리안, 야만족이란 단어처럼요. 그보다 상위 개념인 이夷라는 단어조차 특정 방향의 이민족이 아니라, 은주시대에 중국 중원에 흩어져있던 비듕궉계 종족을 부르는 말입니다. 북적-남만-동이-서융이란 말 자체가 후대-적어도 한대-에 생겨난 개념입니다. 

범칭이지만 맥을 좁은 지역으로 특정하자면 태원이 자리한 산서성 북쪽의 종족을 가리키는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그 말 많은 시경 한혁의 맥도 산서성 북부의 종족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태행산맥 인근을 꽉 휘어잡고 낙양을 방어하는 춘추시대 진晉이 있었을 적의 이야기지, 후한대에는 이미 듕궉에 흡수된 상태일 것입니다만, 중원 인근에서 돌화살을 사용하던 숙신씨라는 종족이 사라진 후에 생뚱맞게 만주에서 재창조되는 것처럼(여기 놈들 돌화살 쓰네? 얘들 혹시 그 공자도 말한 숙신씨 아녀??????) 맥이란 이름이 고구마로 전용되는 과정에서 여전히 산서성 북부의 이민족-아마 후한 초기엔 흉노계-를 부르는 관습이 남아서 혼동을 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같은 후한서라고 하지만 원 사료에 가까운 본기기록에 '맥'으로 기록된 것이 후한서를 편찬하는 4세기 중반에 고구마로 바뀌는 과정이 아닐까?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범엽의 후한서까지 10여 종(적게는 14종에서 많게는 18종이 먼저 존재했다고 함)의 후한서를 만드는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후한 당대에 만들어낸 연대기-기거주, 실록, 그다음이 동관한기-입니다. 이걸 토대로 기전체든 편년체든 후한 관련 기록이란 뼈대가 만들어지는데, 열전은 그다음에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요. 200년이 지나는 동안 기록의 용어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는데 나중에 맥=고구마라는 정의가 추가되면서 이 사건의 주범이 고구마로 굳어진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사학사의 입장에서 이 기록이 어떻게 생겨나고 정착되느냐, 그리고 선진시대 중국 북방의 이민족에 대한 정의 등, 고구마와는 좀 거리가 먼 부분을 다루는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의견입니다. 후한서를 단순하게 삼국지를 그대로 필사한 것이라 보는 것이 학계의 오랜 인식인데, 동이전만 펴놓고 자구 분석을 한 다음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후한서 전체의 편찬이라는 부분에서 놓고 보자면 그것은 전혀 맞는 말이 아닙니다. 범엽은 (적어도 당 초기-유지기의 사통이 쓰여진 시점-에도 남아있었던) 기존 후한서 10여 종을 검토하고 거기서 정리하는 일로도 바빴을 것인데(결국 쓸려고 했던 지를 못 만들어서, 그가 그렇게 비난했던 사마표의 "속한서"의 지를 남조 양의 유소라는 사람이 합본하여 유통시켰습니다) 삼국지를 베낄 시간이 있었음 기존 후한서류를 더 봤을 것입니다. 그동안 학계가 인식하던 문제는 사실 삼국지와 후한서가 공통자료를 동이전 작성에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죠.

지금까지의 생각에도 허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고구마던 맥이던 어떤 놈이 하북과 산서성을 공격하는데 수습은 요동태수가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이 가선의 주체가 고구마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논거는 요동태수 제융(삼국사기에는 체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부식옵하는 더 후대의 표기를 따랐습니다..만 짐순이는 옵하가 틀렸다고 생각해염)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서성 북부의 동란을 해결하는데 안문태수나 대군태수가 나서는 것이 맞죠. 

다만, 사료의 정착과 보존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원 소스의 훼손이 후대의 착오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대 초반의 유서인 "한원"을 일본에서 필사하는 과정에서 앞문장의 뒤와 뒷문장의 앞이 잘려버린 대목이 나타나는데(아마 종이나 나무의 결손), 때론 이게 합쳐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렌 자비가 콜로니를 떨어뜨려 지구연방에 타격을 주었다. 이에 레빌장군은 V작전을 통해 연방군을 재건하고 지온을 무찔렀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칩시다. 이게 보존매체의 결손과 함께 후대의 정리하는 작업자가 이걸 '기렌 자비가 연방군을 재건하고 지온을 무찔렀다'라고 편집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재미난 건, 요즘 세간을 들썩거리게 한 "남만 탐미다례 천년사"를 식민사학자의 졸개놈들이 썼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대마왕 두계 이병도가 주장한 것을 그 후학들은 교시처럼 맹종한다가 기본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이 우습게도 두계는 고구마라고 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지금까지 많지도 않은 고구마 초기 대외관계의 논고들이 하나같이 위 기록을 긍정하는 일은 존재할 수가 없지요.(심지어는 그동안의 떡밥인 ~학파, ~학교 ~학과라는 입장과는 상관없이 다 긍정입니다!!!!)

역주 삼국사기 237쪽

이런저런 가능성은 있지만 그동안 늘 들어왔던 "역사의 대세"라는 관점에서 봐도 고구마가 아니라는 편에 서겠습니다.

말꼬리 ----------------------------------------

1. 이 블로그를 방치하는 동안 관심사가 사학사로 완벽하게 바뀌었습니다. 지금 만지는 여러 가지 세부 주제는 여전히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료"라는 단어 아래 묶여 있습니다.

2. 원래 쉽게 쓰려고 했고, 훨씬 짧게 썼는데, 아까 가평군 도서관에서 페북에 올리던 중 통신장애로 날아가버렸습니다. 평소 글과는 다르게 이건 이 부분을 공부한 분들이나 볼 수 있는 글이 되었지만, 아직 위에서 언급한 문제-사료 편찬, 선진시대 중국 북방의 이민족문제-가 아직 토대를 다지는 중이라 더 명확하게 쓸 수가 없어서 매우 읽기 고약한 글이 되었습니다. 뭐 논문 몇 편 나올 이야기를 여기에 욱여넣자니 애초에 틀려먹은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망글입니다. 다만, 현재 생각을 정리한다는 면에서 억/지/로 씁니다.

3. 사료의 탈락, 보존에 관해 고민 중인데, 현재로선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펴낸 "국학보감"의 2장을 보시길 권합니다. 여기 홈페이지에서 국학문고-도록으로 들어가셔서 책이름을 입력하면 다운로드하여 보실 수 있습니다. 

4. 종전까지 후한서 동이열전의 서문에 대해 동이의 개념을 혼동하게 만든 글이라고 보는 쪽에 서있었는데, 그동안 후한서를 보는 입장이 달라졌습니다. 언젠가는 이 소수만의 논란에 참전해야 할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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