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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증왕 04 - 슬슬 왕의 지배력이 올라간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지증왕 04 - 슬슬 왕의 지배력이 올라간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9. 17. 11:26

원문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해석

6년 봄 2월 왕은 친히 국내의 주군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로 하여금 군주로 삼았다. 군주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요즘 모자이크에 너무 빠진 19세 청순가련 병약미소녀.

매번 하는 소린데 이 문장 한 줄로도 은하영웅전설의 외전 한 권 분량이 나옵니다.(그만큼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가 아니라 외전 한권 분량의 내용이 나온다는 겁니다. 오해 없으시길) 신라의 국가제도의 한 획기가 되기도 하려니와 한국고대의 제도사연구에서 이 제도가 갖는 것의 의미가 크거든요. 고구려나 백제는 너무도 단촐하여 이게 어느 시점의 것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가에 대해서 그리 나오지 않습니다. 고구려로 가면 아예 관부가 있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돕니다.


신라 지증왕 6년, 그러니까 505년에 신라는 국내의 행정조직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이 제도정비와 오늘날과 같이 질서정연한 제도완비는 아니란 겁니다. 그런 것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아직 신라에게 전국토를 일률적으로 관리할 능력이란 게 없습니다. 그동안은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간접지배로 한 지역을 접수하게 되면 그것을 위장 속에 넣어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배자에게 종주권을 인정받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테면 발루와왕조 시절의 프랑스와 같달까요. 왕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에서만 실권을 누렸고 아퀴텐, 브르고뉴, 브르타뉴, 노르망디 등의 지역은 소왕국이었습니다. 뭐 브르고뉴(영어로는 버건디라고 합니다)의 대담공 샤를 같으면 프랑스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려다 실패하기도 하죠.


신라의 왕은 이들 지배자들을 유지시켜주는 선에서 복속시킵니다. 세력의 크기 정도에 따라 금동관이나 은관을 차등적으로 나눠주기도 하고 철제 농기구들을 제공해주며 호감도를 상승시킵니다. 이것을 가리켜 '위세품威勢品'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에 대해선 이현혜의「4~5세기 신라의 농업 기술과 사회 발전」(『한국고대의 생산과 교역』, 일조각)을 참고하주세요.(아! 그런데 현재는 절판) 지증왕 단계까지의 지방지배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지방의 세력가의 권한을 인정해주는 대신 종주권의 확립, 각 세력가들의 위신을 세워주는 물품 및 경제적 혜택을 분배하는 대신 전쟁이 벌어질 때 병사들을 징발한다던가 하는 일이 그렇지요. 지방에 관리를 보내어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단계가 아닙니다. 앞에서 제도의 시작이라 했는데 이미 그런 제도에 익숙한 우리야 그러려니 하지만 이 때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기둥세울 자리를 고르는 시점입니다.


주군현이라고 했지만 처음엔 전략적으로 중요하거나 적성국가(고구려나 백제, 가야)와의 긴장이 고조된 지역부터 설치합니다. 무리해서 다른 지역까지 하려다간 그나마 유지되던 모든 것들이 붕괴할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 설치된 기구는 민정기관이라기 보다는 군관구에 가깝습니다. 해당지역에 군단을 파견하여 상시 주둔시키며 군단사령부에 민정업무를 이관시켜서 유지하지요. 이거야 고대사회에서는 흔히 보이는 지배 방식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로마제국의 군관구제라던가 당의 절도사죠.


실직주, 그러니까 지금의 삼척에 이사부가 지휘하는 군단을 배치하고

이 일대의 방어와 관리를 전담케 합니다.

이 시점이라면 나제동맹으로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시점이니

이사부 군단이 막아야할 대상은 동해안으로 침투하려는 고구려군입니다.

(6.25때도 강릉으로 오진우 대좌가 상륙부대를 이끌고 내려오지요. 

김일성 후반과 김정일 초반, 북한 군부의 실세였던 그 오진우입니다.

그 전쟁에서 서울진격로, 춘천진격로는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강릉까지 3방향이죠)

물론 이때는 군이나 현은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주군현이라 함은 전통시대의 지방지배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상용구다 보니

지방제도의 실시를 주군현으로 표현한 것이죠.

실제로는 군단사령부인 주와 그 지역안의 성들로 구성되었을 겁니다.

예전에 실직국이 있었던 자리고 대략 이 시점까지 간접적인 지배를 유지하다가

이 시점에 본격적으로 내지화시켜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사부는 군주라는 직책을 맡습니다.

삼국사기는 이것이 신라 중고기에 나타나는 군주제의 시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연하게 위진남북조의 지방제도에 대한 논문을 읽다가 재미난 것을 발견했는데

군주라는 이름의 관직이 이때 존재하였는데

위진 초반부터 수 초기까지 널리 쓰였다는 겁니다.

각각의 시대마다, 특히 뒤로 갈 수록 그 의미는 약해지지만

초반의 군주는 분명히 일정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지방을 진수하는 관직인 건 분명합니다.

어쩌면 신라의 군주제를 만들던 당시 이런 제도를 약간이나마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통째로 가져왔다고 하기엔 각 시대마다 군주의 위상이 너무 달라서

중국식의 제도를 받아들이며 신라의 필요에 맞는 것을 취사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죠.

중국 것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본(완전히 복제는 아닙니다)과 달리

중국의 제도를 정신 없이 받아들였을 것처럼 보이는 신라가

내부 구조는 여전히 신라 고유의 제도를 고수하는 것을 보면

이 군주제의 설치가 조금 명확해보인달까요.

그 일례로 신라는 세부 관청은 당의 것을 따르면서도 권력 중추의 제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삼성육부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집사부를 중심으로 14개 중앙관청의 구조를 정밀하게 보려고 하시지만

과연 신라인들이 그랬는가는 의문입니다.


지증왕은 한 편 정도는 더 쓴 후에야 끝날 것 같군요.

다들 고구려사 하면 땅따먹기 대왕과 그 오래산 아들만 이야기하지만

눈 밝은 사람들이 소수림왕에 주목하듯

중고기의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온 지증왕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이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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