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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진평왕 30년 - 승려에게도 국적이 있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진평왕 30년 - 승려에게도 국적이 있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6. 19. 11:00

원문

三十年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해석

30년(608) 왕은 고구려가 계속 영토를 침입해오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병사를 청함으로써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원광에게 명을 내려 걸사표(군사를 청하는 표문)를 만들라 하였다. (원)광이 말하기를 ‘나의 안전을 구하기 위해 타인을 멸하려는 것은 사문의 길이 아니지만 빈도(승려가 자신을 낮추는 말)가 대왕의 땅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으니 감히 이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이에 (표를) 지어 올렸다.


한국의 불교를 말할 때 흔히들 호국불교라고 합니다. 고려 말에 유학자들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어 결국에는 신국가에서는 강하게 배척받았지만(또 그럴 만도 했습니다만) 국가에 환란이 일어나면 앞장서서 나서는 것도 불교계였습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더 올라가 지배층을 위한 종교였던 삼국시대에도 그런 성격은 변함이 없습니다. 일본의 선종계열처럼 독자적 정치적 세력 형성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불교는 국가의 중요사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한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불교를 받아들이던 통로였던 중국의 불교를 말할 때, 북조가 지배하던 곳의 불교는 강력한 군주와 결합하는 모습을 보이며 군주의 지배를 강화해주는 반면,  남조의 불교는 좀 더 현학적이고 개인적이며 군주와 대등, 또는 부처가 군주보다 높다는 쪽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불교 수용과정을 연구하시는 신종원 선생님의 의견에 따르면 약간 편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남조의 불교나 북조의 불교나 군주의 지배를 정당화해주고 호국적 성격을 가진다고 하는군요. 중국 불교의 수용과정을 보더라도 외래종교인 불교가 살아남는 길은 그것밖에 없지요. 갑자기 중국 불교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과 일본의 경우 편차가 다르지만 결국 그런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진흥왕의 한강유역 확보 이후, 신라의 안보환경은 6세기에서 7세기로 넘어가는 동안 악화되어 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551년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돌궐과 북제의 동향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전략적인 후퇴를 해야 했던 고구려가 드디어 재정비를 끝내고 551년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합니다. 554년의 성왕의 전사 이후 그야말로 눈이 뒤집힌 백제는 자다가도 신라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떡 일어날 상황이었지요. 대다수의 역사책에서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하며 발달된 평야지대를 손에 넣었고, 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뿐만 아니라 대중국 교통로를 확보하여 국가발전의 기틀을 닦았다고 서술하지만 수백 년 동안 남의 땅이었던 곳에 깃발을 꽂는다고 갑자기 내 영양분이 될 것은 아니고 가뜩이나 적은 인구에 방어선이 늘어나고 인접 국가들이 모두 분노치가 한계를 넘어가니 앞에든 이득 이상으로 출혈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세기의 이란과 이라크가 싸우던 시절에 

이란의 국립묘지에는 

피의 분수라 하여 전사자들의 죽음을 고양하려는 상징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신라에도 국립묘지가 있고, 그러한 상징물을 세울 수 있었다면 

마땅히 피의 분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시대의 신라의 일상은 치열합니다. 

마침 이 시대의 인물로 삼국사기에 등재된 인물들을 보자면 

정말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아마 동천왕을 끝맺고 나면 이 시대를 다룰까합니다. 

신라지만 동천왕의 시대보단 짐순이에게 익숙한 시댑니다) 

살아남아 성공한 것만 보자니 그런 것은 눈에 안 들어오나 보지요.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이 당시부터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외교전을 벌입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일본과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둡니다. 

다만 일본(당시는 왜)은 뒤통수를 치지 않는 것으로도 고마운 상황이었고 

그나마도 백제(의 발목을 잡는)대책에 국한된 면이 있습니다. 

또 하나 직면한 고구려로부터의 압력을 피하려면 중국과 연결을 해야지요. 

남북조의 말엽, 북제로부터 중국과의 관계가 꼬일 대로 꼬여버린 

고구려를 막으려면 고구려 서북방의 긴장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절실했습니다. 

김춘추의 외교 전략이라고 불리던 것 중 

상당부분의 기조는 이미 진흥왕 때부터 꾸준히 추진되던 것들입니다.

 이 해의 진평왕의 외교정책도 그런 전략의 일부입니다.


수와의 군사적 동맹을 추구하는 외교서신을 승려 원광이 작성한다는 

이 생뚱맞은 일화는 그간 호국불교의 일환으로만 이해되어 왔습니다.

(혹시 모르죠. 이쪽을 연구하시는 분이 어떤 논문을 내놓았는지 잘 모르지만요. 

사상사 글이 외계어로 보이는 짐순이에겐 찾아볼 엄두가 안 납니다. 

이점은 철저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승려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또 국가와 불교와의 관계가 어떠한지, 

외교라는 것의 무게감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흘러 넘길 이야깁니다.


먼저 당시 불교의 기본 속성부터 이야기해야겠지만 

그건 너무 장대한 이야기고, 뭐 앞에도 이야기했으니 

불교와 국가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는 건 이해하실 겁니다. 

이 당시의 승려는 아무나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교가 들어올 초창기는 그저 대다수 민중의 신앙이 아니라 

국가의 기획된 수용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고구려의 불교가 들어가기 반세기 전에 

중국 승려와 교류하는 고구려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의 경우 대전에서 추풍령을 넘어 도착하는 

선산(현재 구미시)에서 불교가 고구려의 영향으로 뿌리를 내립니다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불교는 높으신 분들의 선진적인 종교였지요. 

초창기에 배출되는 신라승려들은(물론 고려시대까지도) 높으신 분들이라는 겁니다. 

통일기 이전 대표적 승려 원광이 좀 낮았지만 6두품이었고, 

자장은 왕족입니다. 

거기다 불교는 교리 연구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상황이라 

그냥 불당 만들고 나무아미타불 외우는 선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원효가 대중적인 불교의 길을 열지요. 

그러나 그건 한세대 후의 일. 

그러니까 이때 기록에 나타나는 승려들의 수와 당으로의 유학은 

그야말로 국가의 지원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전쟁 후 

많은 이들이 이용한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생처럼 

국가가 앞장서서 그들을 외국으로 보낸 것이죠.


더욱이 통관절차가 더 까다로운 그 당시의 경우 

개인차원에서의 입국은 중국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쉬웠으면 의상과 원효가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지도 않았지요. 

나중에 통일신라 시절 후반부에는 브로커를 이용하여 

중국에 밀입국하려던 승려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때는 그게 가능하지도 않던 시댑니다. 


그냥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승려지만 나선다.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뭐, 오빠지만 사랑만 있으면 관계없다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피가 통하지 않는 아키코는 모에하지. 구헤헤~) 

더욱이 불경을 연구하는 것의 비중이 더 중요했던 시대니만큼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고, 

또 유학을 통해 국제정세의 파악, 상대국가의 지배층과의 인맥 구축, 

때로는 비밀스런 행위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뭐 승려니까 일반 관리들보다는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외교적 접촉에서도 상대방의 호의를 얻기에 유리하고요. 

이 시대에는 특히나 승려가 국가의 자문역으로 많이 활용됩니다. 

거기에 정신적 안정도 구할 수 있으니 딱 맞는군요.


그렇다고 모든 불교 승려들이 무슨 국가기관의 요원처럼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순수하게 종교적 열정으로‘만’ 임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마치 ‘돌아와서 나라의 기둥이 되어라’는 식으로 

유학을 간 것도 생각해야한다는 겁니다.

특히나 원광은 이런 성격이 더 강한 승려로 보이고 

현실 참여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물론 권력지향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국가에 이바지하는 파워엘리트로서의 자부심,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강한 쪽으로 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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