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천왕 10~16년 - 어떤 흐름을 탈 것인가...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동천왕 10~16년 - 어떤 흐름을 탈 것인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4. 17. 16:30

원문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十二年 魏太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해석

10년(236) 봄 2월 오왕 손권이 사자 호위를 보내어 화친하고자 하였으나 왕은 사자를 붙잡아두고는 가을 7월에 이르러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에 보냈다.

11년(237) 사신을 위에 보내어 언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 원년이었다.

12년(238) 위의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매, 왕은 주부와 대가를 보내어 병사 천명으로 하여금 돕게 하였다.

16년(242) 왕은 장수를 보내어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치게 하였다.


모자이크가 없어도, 그대 슬퍼하지 말지어다.

삼국지 게임에서 관도대전의 막이 올라갈 때쯤. 중원지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조조와 원소 외의 군주라면 (여남으로 도망간 유비라던가, 아니면 수춘이나 여강에 자리잡은 신군주가 해당되겠죠) 적어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조조를 택할 것이냐, 원소의 편을 들 것이냐..


이 관도대전 이벤트에서 다른 군주는 멀리서 방관하거나 (물론 당장의 위험성은 적지만, 앞으로 성장의 길은 막혀버립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참전을 강요당하게 되지요. 자칫 잘못하면 전력을 탕진하고 기력이 쇠한 다음 잡혀먹거나 바로 대전 중에 짓밟히게 되지요. 삼국지의 시대는 중국의 고대문명이 마지막으로 불꽃을 피우는 시대임과 동시에 중국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끼던 인근 종족, 국가들에게는 멸망의 파고가 몰려오기도 하고, 성장할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운명이 달라지는지는 역사책에 적힌 내용이 잘 말해줍니다. 고구려는 삼국시대의 폭풍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만, 수춘과 여남의 군주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결정해야하는 순간은 찾아왔습니다. 진의 중국 통일 이후 조금씩 진행된 동쪽으로의 진출은 후한과 삼국시대를 거치며 이 일대의 정치적 지도를 바꾸는 자극제가 됩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BCE.108 이후, 중국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한군현을 설치하였습니다. 맨 처음 나오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그것이죠. 이 중 진번과 임둔은 낙랑군에 흡수되어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부로 나뉜 것 같습니다. (낙랑연구자분들이 들으면 화내실지 모르지만 일종의 출장소의 개념이라고 해두죠. 정말 알고픈 분들은 권오중 선생님의 요동군 도위부에 대한 논문을 찾아보시고요아무래도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다스릴만한 행정력이 미치기 힘들었고, 다들 영토를 먹으면 다 좋은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모든 영토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건 아닙니다. 중국의 대외진출에 따라 세워진 군현들은 그야말로 돈을 먹는 하마가 됩니다. 길도 닦아야 했고, 행정조직을 운영해야 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군사력도 필요한데 문제는 이 시대는 후대의 식민제국시대처럼 피정복민이 돈이 되지 않았습니다. (애시당초 이런 지역은 거둘 수 있는 세금도 매우 적었습니다) 오히려 유지비가 중앙정부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흔합니다. 한군현을 세우기 전 창해군을 세웠다가 3년만에 재정압박으로 폐지한 예도 있지요.


한대에 존재감이 희미했던 낙랑군은 

군태수급 이상을 단 한 명밖에 배출하지 못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후한대 이후 주가 광역지역단위가 되지만

한왕조 전기간 동안 군이 지역의 단위가 됩니다)

원래 반란연루자로 이곳으로 도주한 이의 출신인

왕경이 군 태수가 되는 게 고작이지요.

그러나 나중에 중국이 갈라지면서 어느 정도 방치플레이당하던

낙랑군은 어느새 동이족과 관련된 문제를 담당하는

중요 기관이 됩니다.

그리고 요동에선 공손도가 요동군의 태수로 부임하면서

공손씨가 요동 일대의 세력을 세우게 되지요.

그들은 요동군에 이어 낙랑군을 장악하고

또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들을 제어하기 위해 대방군을 설치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이 일대 국가들을 요동치게 하였고

본의아니게도 중국의 정치적 변화에 편승하게 했습니다.

위의 기록은 

요동에 항구적인 왕국을 세우려는 공손씨와

요동의 여러 민족들, 더 나아가 동쪽 세계를 자기 영향권 아래 두고픈

위와 오의 움직임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입니다.


아무래도 고구려와 부딪치는 일이 많았을 공손씨를 견제하기 위해

동천왕은 위를 선택합니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오나라였지만

약간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무려 반년 가까이 사신 호위를 잡아두고 있다가

목을 베어 위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위 명제 조예의 연호 개정 시에 축하 사절을 보내기도 하고

위의 사마선왕(사마의입니다)이 공손씨를 멸망시킬 때

군대를 보내어 돕게 합니다.

원래 있던 원수가 있을 경우 그 건너편에 있는 세력과 싸울 적에

그쪽에 힘을 보태는 건 좋은 전략입니다.

단, 문제는 입술이 사라지니 잇몸이 시린 경우가 종종 생긴 것이지요.

여기 기사에는 안나오지만

나름 준수한 군주였던 위 명제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제거할 적에

별도의 군세를 파병하여 낙랑과 대방의 통제권을 확보합니다.

(이를 사마의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어쩌면 동천왕은 '어라?'하는 심정이 되진 않았을까요?

일시에 고구려를 둘러싼 외곽이 전부 위나라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의 동방지역을 총괄하는 요동군에,

한반도 남쪽에 영향력을 미치는 낙랑과 대방군,

이 모든 향배가 고구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물론 위는 촉과 오와 싸워야겠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는 숨이 막힐 겁니다.

위와 친분을 맺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서안평현을 공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 3권 (삼국, 서진편) 의 유주지도 중에서. 빨간 줄이 서안평현입니다.



말꼬리 -----------------

드디어 그렇게나 하기 싫었던 전쟁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아, 싫어요. 귀찮아요. 엉엉엉..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