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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천왕 20년 - 위나라 군대는 병사가 적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동천왕 20년 - 위나라 군대는 병사가 적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5. 7. 00:20

원문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해석

20년 가을 8월, 위에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1만명을 이끌고 현도를 통해 침략케 하였다. 왕은 보기 2만명을 이끌고 비류수 위에서 맞서 싸워 패배시키고 3천 명의 목을 베었다. 또 적병을 끌어들여   양맥 골짜기에서 다시 싸워 또 패배시키니 3천명을 사로잡아 베었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의 대병이 나의 적은 병사들과 같지 않다. 관구검이라는 자는 위의 명장인데 금일 그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다’라며 이에 철기 5천을 이끌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드디어 싸움의 시작입니다. 246년의 가을 유주자사 관구검이 이끄는 1만명의 위나라 병사들이 고구려로 진격해 옵니다. 유주라는 광역 군관구의 자사니만큼 중앙군이 아닌 유주자사부에 배속된 유주병이겠지요.


이 처음부터 참으로 애매한 문제가 시작됩니다. 위군의 사령관인 관구검이란 사람을 무엇으로 읽어야 하느냐지요. 관구검毌丘儉이라고 읽을 것이냐 무구검毋丘儉이라고 읽을 것이냐부터가 문제입니다. 학계에서는 관구검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중국정사 조선전이나 각종 삼국사기 번역본에서도 관구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한자 표기는 毋丘儉에 가깝지요. 옆에 걸린 조선 후기 주자본을 봐도, 마침 옆에 놓아둔 가장 오래된 완본인 정덕본을 보아도 관毌자라기 보다는 무毋자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다들 관구검이라고 읽습니다. 어떤 분들은 간혹 무구검이라고 읽고 그 근거를 대시는데 읽다보면 관으로 읽던, 무로 읽던 대개는 비슷합니다. 자전을 찾아봐도 이 두 글자는 전혀 다른 계열의 글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읽는지 짐순이도 모르겠어요. 삼국사기를 읽을 때 가장 애를 먹이는 게 이런 문제인데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치통감을 찾아보니 중화서국판에는 毌丘儉으로 나오네요. 권중달 선생님의 번역본에도 그의 아버지는 관구흥毌丘興, 그는 관구검으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거 모두 관구검으로 읽나보지.. . I have no idea.(그냥 모른다는 I don't know보다 강한 표현. 데이터가 아예 없을 때라던가, 도저히 모를 때 쓴다죠) I am a milk cow.(내가 졌소..) 더 상세한 것을 요구하는 분은 여아학대범입니다..


관구검인지 무구검인지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인지 그 놈의 이름은 넘겨버리더라도 또 하나의 문제가 나옵니다. 관구검은 1만명을 이끌고 공격을 해요. 그리고 요격을 하는 동천왕은 2만을 끌고 가요. 이건 유치원생이 읽어도 고구려군이 많아요. 게다가 위군은 초전에서 3천, 다음 전투에서 3천을 잃고 4천이 남았어요. 그런데 이긴 동천왕은 위는 대병이고, 우리는 적어요 드립을 치고 있어요. 이거 고구려판 나는 병사가 적다..인가??? 이런 문제로 단재 신채호도 이 기록에 뭔가 수상하다고 했고(역시, 내 청춘 역사 기록은 잘못되었다..냐??) 음.. 고구려와 위의 시절에도 사람들은 ‘하나, 둘, 셋, 많다!’라고 수를 세었다거나 아니면 내 여동생이 한자로 숫자를 표기하는 것이 그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라고 하는 걸까요?


그런데 자치통감과 위서에서 묘한 내용이 눈에 띕니다.

먼저 삼국지 위서 28,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에는

(그러니까 왕릉, 관구검, 제갈탄, 등애, 종회의 열전입니다)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라고 적혀있지요.

督諸軍步騎萬人.

여러 군(부대) 보기 1만을 이끌다는 내용입니다.

자치통감에서는 더 간략하게 ‘여러 군대를 이끌고’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실 위의 군사제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어쩌면 1만이라는 수보다 

여러 부대라는 표현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짐순이가 관구검과 대화할 수 있다면

알다마가 켜진 어느 지하실 책상에 연필 한자루와 갱지 한묶음 올려놓고

‘불어. 이 色姬야!’라고 나찌 일사 코스프레도 해보고 싶지만

문제는 만날 수가 없고, 또 나랏말쌈이 듕궉과 사맛디 아니하잖아요?

오늘의 결론은 역시나 I have no idea. I am a milk cow입니다.


마지막으로 국방군사연구소 편, 한민족전쟁통사 1권 97쪽에 실린 지도나 보고 끝냅니다.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고구려의 역사가 또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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