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한사군의 프로토타입, 창해군은 왜 만들어졌나.. 본문
주의 :
한 군현은 식민사학이 지어낸 현상이라거나
고구마 백개 심자가 한반도에 없었다고 믿는 분은 얼른 브라우저를 꺼주세요.
몸과 마음의 건강에 무척 해로운 아주 @같은 포스팅입니다.
짐순이는 병원비 대드릴 돈이 없어요.
또, 글을 쉽게 쓰겠다고 맘먹어놓고
한자가 난무하는 글이 튀어나옵니다.
한자와 초마이너 부분에 멀미가 있으신 분,
그것은 정말 알기 싫은 분들도 알아서 피해가세요.
(아! 이 짐순이는 얼마나 상냥한 아이인가~~!!!)
사실 고조선을 연구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사기 조선열전만을 쳐다보다보면
그냥 한 무제의 지랄 맞은 성격이 빚어낸 일방적 고조선 때리기로 이해됩니다.
네, 물론 앞으로의 요지와 상관없이
한 무제는 딱, 지랄 맞은 비글견이 베르단디로 보일 정도의 인간입니다.
그의 치세에 4명의 승상 중 3명이 처형당했다던가..
고대 중국의 인간성이 하나로 응축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고대사의 중국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냥 조선전만 읽으면
매우 단순하게 읽혀집니다만
특히나 한-고조선의 관계는 특히나 그러합니다.
기원전 200년에 한고조가 흉노와 싸우다 크게 패한 이후
장기간에 걸쳐 한은 대외 원정보다는 내치에 신경을 쓰게 되지요.
문제와 경제의 치세에 하도 아껴 쓰다 보니
창고에 보관중인 돈을 꿰는 끈이 썩어 들어갈 정도로 축적된 힘으로
무제 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대외팽창책을 추구합니다.
그때 가장 우선시 되는 적성국가야 당연히 흉노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을 잇는 악의 축으로는 남월(베트남)과 조선이랄까요.
그래서 BCE.108년에 위만이 세웠던 조선이 멸망하기 훨씬 전부터
한의 내부에서는 조선을 쳐야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열전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무제본기와 서의 일부를 읽다보면
악의 축으로 지정해놓고 계속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서
뭔가 익히 아는 현대사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위만조선에 대해 더 이야기하면 길어질 것 같으니
위만衛滿, 한 이방인 군주를 위한 변명을 읽어주시고요.
오늘의 주제인 창해군으로 건너갑니다.
한서 무제 본기, 원삭 원년조 기사에 따르면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BCE.128년에 동이의 예군 남려라는 군장 ‘등’이 28만 명의 집단을 이끌고 귀부하여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는 매우 간단한 내용입니다.
보통 예군 남려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원문 그대로 읽다보면(이래서 역사공부엔 원사료가 중요합니다)
예군 남려 ‘등’이라고 표현하지요.
어떻게 읽으면 예군 남려가 이끄는 28만의 단일집단입니다.
사실 그렇게 읽기가 쉬워요.
그런데 삼한의 소국의 인구를 다룬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마한의 경우 큰 나라가 1만 여가, 작은 나라가 수천가,
변한은 큰 나라가 4~5천가, 작은 나라가 6~7백가 정돕니다.
1가구당 3~5명으로 잡아도 수만이 안됩니다.
아무래도 예군 남려가 있던 곳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군 남려의 집단이 28만 명의 단일집단이라고 보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북쪽으로 가면 인구밀도가 낮아지지요.
그리고 그렇게 인구가 많아진다고 다 좋은 건 아닌 게
그걸 관리할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거구,
그만큼 소모되는 비용도 늘어나지요.
역시 ‘등’이라는 말은 남려를 대표로 하는
일단의 세력가들을 포함한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담기양, 중국역사지도 3권, 후한시대 유주지역. 나중에 또 써먹을 겁니다. 누르면 커져요.
그러니까 남려를 대표자로 하는 일단의 집단이
한에게 귀부하여 그 보호를 받으려 한 것인데
이들이 과연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어제 글처럼 정말 강릉지역이라고 하면 좀 머리가 아파지고요.
(그나마 19년 병약인생에 그나마 위안이 소꿉친구 두통군과 결별했다는 건데!!!)
요동이냐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상류지역이냐,
또는 함경남도 해안가냐 등등의 여러 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군이라는 호칭을 예족의 군장이라고 해석하니
그 예족이 어디에 존재했냐는 문제로 번져
어떤 확실한 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해답이 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단 고구려 연구자들 중에는 이 예군 남려를 고구려의 원초집단과 연결시켜
위만의 조선과 계통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것으로 봅니다.
위만 조선이 압록강 중상류를 장악하려고 하자
이곳의 원주 집단이 한의 힘을 빌리려한 것은 아니냐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도 이 설이 그럭저럭 깔끔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이 예군 남려 등이 이끈 28만 명과
현도군이 이 지역을 지배할 때의 인구수가 묘하게 맞아 들어갑니다.
단, 예라는 단어에 얽매이면 또 고구려랑 연결하기가.. 웅..
다른 시각에서는 동예와 연결시켜 적어도 동예랑 연결하려고 합니다.
하여간 현재로서는 딱히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원래 개인적으로는 발해만 연안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발해만 연안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중국의 판도에 들어가 있었고
요동으로부터 길이 뻗어나갔다는 사실은
그 생각을 내놓을 기회조차 부정하는 것이지요.
이 글을 준비하면서 그 생각을 확실히 버리게 됩니다.
28만 명이라는 집단이
산 넘고 물 건너 바다건너서
뗏목을 타고 가다 뒤집어져서
모타뽀트 타고가는데~ 모타뽀트 뒤집어져서
그만 막 헤어치면셔~! 셔~! 셔~!
이러고 이동해서 한에 귀부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위치에 그대로 살면서 한에게 SOS를 친 겁니다.
그리고 한은 그들을 관리/보호하기 위해 군현을 설치하기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창해군입니다.
아무래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결과로
식민지배, 군현설치를 딱 한 가지 유형으로만 이해하는데
사실 지배국가의 역량, 피지배국가/지역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창해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중국의 군현이래해도
실제 운영은 예군 남려 등의 토착 지배층이 하고
한은 그저 지배관계를 확인하고 관리하는 수준에서 멈추고
세금도 그냥 집단 정액제로 내는 정도에 그쳤을 텐데
또 여긴 좀 달랐나 봅니다.
한서 식화지에 다른 기록이 나옵니다.
彭吳穿穢貊ㆍ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팽오가 예백과 조선(의 길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하니,
즉 연과 제의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밑줄 친 부분은 이성규 선생님의 사기 편역에 의존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분명치 않아서 다른 기록이 없나 찾아보니
그보다 앞서 나온 사기 평준서에서는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팽오가 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과 제나라 사이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이성규 선생님의 사기를 인용하여 보니 뜻이 맞춰지는데
정작 평준서의 이 대목은 김원중 선생님 번역이 더 정확하군요.
중화서국판 사기로 확인해보니 이쪽이 더 맞네요. 헐.
아무래도 멸망하다는 멸滅을 예맥의 예穢와 혼동하신 건 아닐까요?
아님 사기의 다른 판본이었을까요?)
사실 제와 연의 백성들이 고생했다는 말이 들어가 생뚱맞을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제와 연지역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또 앞뒤로 한 무제가 사방의 변경을 개척하며
얼마나 국력을 동원하였는지에 대한 일부분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조선과 남월의 패턴이 매우 유사하다는 거죠.
그래서 남월 개척과정을 보면 교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죄수들을 동원하고
또 지역의 안정적 확보, 혹은 국제정세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병력도 파견합니다.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에 해당하는 서남이지역도
길을 개척하고 지배의 인프라를 갖추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지요.
제와 연의 민심이 동요한다는 게 바로 이걸 함축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죠.
하여간 이런 변경에는 이러저러한 투자가 이루어지는데
막상 이런 지역에선 정복 후 일정기간 면세혜택을 준다던가,
(중국인의 입장에서 비문명지역인 경우) 세세한 세제를 적용하기 보다는
그냥 집단 전체에 정액의 세금만 부과하는데
대신 몸으로 때운다던가(병사로) 매우 적은 분량만 걷지요.
애당초 생산력이 떨어지는 지역이라거나
또는 황제의 덕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위해서지요.
그래서 이런 지역이 늘어나면 영토가 늘어나는 효과를 거두지만
교역상의 중심이거나 국가 안보에 필수적인 요충지가 아닌 이상
이런 군현은 돈 먹는 하마가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BCE.126년에 공손홍의 발의로 창해군은 폐지의 수순을 밟습니다.
약간 뒤에 나오는 기록에 따르면 들어간 돈이 수십억에서 수백억전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종 인원이 동원되니 그에 따르는 경제적 소모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창해군을 설치할 때는
장군 위청이 북쪽에서 신나게 흉노랑 츤츤데레데레 놀이를 할 땝니다.
정말 국가 최우선순위의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지요.
흉노와의 접경지역인 거연에서 발견된 목간을 보면
병사들의 기본 보급품은 자비를 들여 마련하는 상황에서도
그 돈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어느 병사는 여러 물품들을 빨리 보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준비태세 미비로
군법에 의해 사형 당한다는 편지를 남길 정도였지요.
특히나 위청이나 곽거병, 이릉과 소무로 많이 알려진
흉노와는 프로야구 정규시즌 경기하듯 전쟁 중에 있었고
위만과 거의 붕어빵인 남월,
그리고 서남이에 대한 정복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창해군이란 또 하나의 팽창에서 일어난 것이죠.
정말 악의 축(한 무제가 보자면) 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진기지 격인 창해군을 설치합니다.
비록 3년 만에 폐지하지만
한은 자신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단정한 조선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BCE.108년의 고조선 멸망이겠지요.
한군현을 이해하기 앞서,
동천왕대의 고구려와 위나라와의 대결을 이해하기 앞서
이들이 어떤 역사적 배경으로 충돌하는 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위만조선의 탄생으로부터 창해군의 명멸을 알아야 합니다.
말꼬리 ---------------------
앞의 원문이 도저히 해석되지 않아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는데
김원중 선생님의 번역본만 있어 절망하던 차
이성규 선생님 편역본에 평준서가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들고 와서 보니
이 부분만은 해석이 더 정확한 것 같아
돈 아깝다는 생각이 일시에 사그러들었다는 호사다마같은 후일담도 있지요.
최준석과 김동주가 더블 스틸하고, 오재원이 홈런치고,
노경은이 완봉하면 지구가 멸망할 것 같았는데 정말 일어난 것을 본 것과 맞먹는
전직 두산팬, 현직 NC팬의 넋두리도 덩달아 붙입니다.
(더블스틸한 경기만 봤었군요. 돌이켜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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