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창해군 기사에서 아주 간단한 AS도 아닌 글.. 본문
며칠 전에 창해군을 가지고 아주 길고도 재미 없는 글을 연달아 뽑아냈었지요.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彭吳穿穢貊ㆍ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팽오가 예백과 조선(의 길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하니,
즉 연과 제의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밑줄 친 부분은 이성규 선생님의 사기 편역에 의존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분명치 않아서 다른 기록이 없나 찾아보니
그보다 앞서 나온 사기 평준서에서는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팽오가 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과 제나라 사이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는 이성규 선생님의 사기를 인용하여 보니 뜻이 맞춰지는데
정작 평준서의 이 대목은 김원중 선생님 번역이 더 정확하군요.
중화서국판 사기로 확인해보니 이쪽이 더 맞네요. 헐.
아무래도 멸망하다는 멸滅을 예맥의 예穢와 혼동하신 건 아닐까요?
아님 사기의 다른 판본이었을까요?)
팽오가 창해군으로 가는 길을 뚫었다는 기사인데
위의 한서 식화지와 사기 평준서의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밑줄친 부분 해석이 잘 안되어 번역서를 참고 했었는데
이성규 선생님의 사기 '편'역서와
김원중 선생님의 사기 '번'역서의 해석이 좀 달랐습니다.
대만의 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원문사이트에서는
彭吳賈滅朝鮮라고 적혀 있었어요. 해당 주소 링크
뭔가 삼국지에서 나타나는 판본 문제인가 싶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중화서국판 사기를 대조해보았었죠.
(생각해보니 중앙연구원의 대본이 중화서국판이라 큰 의미는 없는 일이었군요;;)
원문에 따라서 김원중 선생님 번역이 더 맞는다고 판단하여 저런 글을 적었어요.
원래대로라면 이런 문제가 생길 때, 이성규선생님 번역을 더 신뢰하는 편이지만
이것만은 김원중 선생님이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을 쓸 때는 옆에 마침 정범진 선생님의 사기 완역본은 없었어요.
주말에 확인해보니 여기는 이성규 선생님과 같은 의견이시군요.
여기까지면야 따로 글을 쓸 필요도 없고
(전혀 그럴리 없는 듣보 블로그지만) 만약 태클이 들어와도 문제는 없었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왜 그렇게 했는가에 대한 주가 달려 있습니다.
(정범진 외, 『사기』 2 표서, 서, 까치, 253쪽, 각주 42)
우선 사기를 해석할 때 한서의 식화지 서술이 더 정확하다고 봤고요,
또 청나라 왕렴손의 지적에 따라 賈는 穿의 오기이며 이것은 通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滅은 穢의 오자라고 보았구요.
이런 입장에서라면 한서 식화지의 표현이 더 맞고
사기의 해석도 그에 맞추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서는 사기 이후에 만들어진 책이고
또 평준서의 해당 서술이 잘못된 서술, 혹은 전해지는 과정에서
왕렴손이 지적한 것과 같은 문제가 나와야 하는 건데
현재로서는 이것으로도 뜻은 통하거든요.
또한 다른 기록에서 조선을 멸망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뉘앙스를 볼 때
그리고 평준서 저 대목의 앞 뒤 대목이 다 인근 국가를 쳐서 영토 개척을 하는 내용이라
한서 식화지의 기록으로 가자고 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사기 자체가 후대의 정사류와는 달리 행간을 조심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라서요.
(이건 이성규 선생님 편역서의 해제에 매우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사기의 서술도 한서에서 매우 간략하게 고치는 것을 볼 때
한서를 기준으로 두는 점은 요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싶네요.
사기의 서술은 조선과 치열하게 맞장을 뜨던 시대의 것이고
한서의 서술은 이미 이 지역이 자기네 것인 시점의 글이니
그 문장의 관점이랄까하는 것들이 미묘하게 다르기도 하지요.
분명 처음 이 글을 쓸 때의 제목은 AS..로 끝납니다만
앞의 대목을 쓰며 AS도 아닌 글..로 고칩니다.
여기까지 힘들게 읽으신 분들은 뭐 이딴 걸로
주말에 글 한 편 땜빵을 하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짐순이는 주말엔 글을 거의 안쓰죠!!)
이런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집착이 역사연구의 한 단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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