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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신분의 벽을 누가 뛰어넘을 수 있을까?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신분의 벽을 누가 뛰어넘을 수 있을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8. 5. 01:00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먼저 저 위의 신문기사를 보아주세요.


그리고 나서 이 질문을 던져봅니다.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을 만난 춘향이는 백년해로 하고 잘 살았을까요?

100분이라면 100분, 모두 한결같은 대답을 하실 껍니다.

해피엔딩.

가끔 사극에서도 신분을 넘나드는 사랑이야기가 나오고

오늘도 소녀들은 백마 탄 왕자님을 꿈꿉니다.

(그러지도 않는 짐순이는 마음이 사막과도 같아요.. 쩝)

현재로 돌아오면 현 제1야당의 대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도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깁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쁘띠회장님의 첫째 딸의 결혼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죠.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와는 다릅니다.

지금에야 계급사회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보다 더 갑갑한 신분제 사회의 틀에서는 모든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것들이 

당시 사람들의 대다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었을테니까요.

짐순이가 그나마 자료를 가지고 있는 삼국시대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최소한 결혼에서 신분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무겁습니다.

차이를 벗어난 결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높은 신분의 남자가 낮은 신분의 여자를 자기 여흥의 수단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요.

(물론 성별이 뒤바뀐 경우도 있지만 전체 비율로 따지면

그건 바로 이 순간 짐순이가 애플 본사에 콜로니를 떨굴 확률 수치보다 더 낮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춘향이는 그래도 소실입니다.

둘 사이의 아이는 그야말로 '곁가지'가 되었을 겁니다.


이 표는 짐순이 직공(-_-;;)


잠시 위 표를 보실까요?

신라의 왕족들의 결혼에서 공주가 결혼한 기록을 추렸습니다. 

모든 결혼을 담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분제 사회에서 결혼의 추세는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석탈해 이하의 이름입니다.

나중에 왕이 되거나 왕의 아버지인 왕족,

또는 왕족에 준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공주랑 결혼을 합니다.

단 예외는 6두품이지만 왕녀와 결혼한 원효.

문제는 요석공주가 돌싱이라는 게 함정.

이건 그야말로 왕의 힘이 그야말로 강햇던 순간에 억지로 밀어붙인 것이죠.


그렇다면 왕의 결혼은 어떠했느냐

고구려와 백제는 왕족에 버금가는 집안과 결혼을 했으며,

신라는 근친혼에 가까웠습니다.

단 예외적으로 벗어나려는 경우가 보였는데

그렇게 결말이 좋지 않은 경우뿐입니다.

신라의 소지왕은 지방 순시를 나갔다가 토착세력의 여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몰래 만나러 다니다가 어느 노파에게 한소리 듣고는

바로 궁에다 들여놓고, 곧바로 아들을 보았는데

왕이 갑자기 죽고 나이먹은 삼촌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 유명한 지증왕. 

그의 즉위 이유는 전 왕에게 아들이 없어서입니다.

어쩌면 왕의 급사와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무리 신생아라 하더라도 왕자로서 인정도 못받았다는 것이죠.

장보고와 손을 잡고 신라 하대 최악의 왕위계승전을 종식시킨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은 부왕의 약속에 따라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다가

귀족세력의 강한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약 강행했다면 문성왕의 재위기간은 세기조차 민망한 것이라

아마 옥좌에 오르자마자 죽어 왕대접도 못받은 

할아버지 균정의 뒤를 이었을 겁니다.


그깟 결혼 할 수도 있지.

아무리 그래도 왕인데 말도 안되는 거 아니냔 분도 계실 겁니다.

현대의 시각에선 그리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결혼(물론 아랫것들의 결혼은 빼고)은 정치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신분은 인간 그 자체의 품격을 얼마나 시작이 창대하고

또 그 창대한 핏줄이 얼마나 순수하게 내려왔는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정말 사람이 피를 흘려도 누구는 황금물이고 

누구는 김칫국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시댑니다.

뼈도 누구는 백금이고요, 누구는 석횝니다.

응가를 봐도 누구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용의 그것이고, 

누구는 파리가 좋아하는 그겁니다.(파리가 좋아요라고 왱왱거립니다)

만약 순수한 피에 더 하찮은 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그 신분 자체의 오염을 뜻하는 것이니

다른 이들은 그들을 죽여서까지 막아야할 겁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을 겁니다.

아니 더 찾기 쉬운 예를 들어보죠.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이불도 널지 말라는 아파트 부녀회.

그것보다 10만배는 더 과격한 것. 납득 되시죠?


만약 저 청년을 죽인 자들은 

나름 액시즈가 지구로 떨어지려는 것을 온 몸으로 저지하려는 

론도 벨이나 네오지온의 파일럿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는 것이

신분제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무서움입니다.

어느 순정만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고

아니 애라도 하나 낳아 들어가면 순순히 받아주는 게 아닙니다.

그걸 깨려는 자는 몸 안에 들어간 나쁜 균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분적 굴레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이따금 설계두같이 희안한 존재가 나타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올더스 헉슬리의 "위대한 신세계"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지배층은 모두를 내려다보게 유전자 단계에서 교육받고

중간관리층은 위의 것은 머리가 아프겠다.

아랫것은 기름범벅으로 천하다. 우린 얼마나 축복받은 계층이냐라고 생각하고

제일 아래 노동계층은 몸으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책상에 앉아있는 윗 신분층을 가엽게 여깁니다.

(아! 이 나라도 노동자들이 재벌회장님 걱정을 하고 있네요!!!!)

그냥 그렇게 신분제라는 논리를 그냥 순응하고 사는 겁니다.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불교의 윤회사상을 받아들이고요.

그것을 모두가 순응하지 않게 되는 건 근대 이후의 이야기죠.


90년대까지 국문학계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조선후기의 발달하기 시작한 서민문화에서

새시대의 혁명논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황진이와 같은 기생들의 시에서 

남성우위 사회의 억압을 깨려는 시도를 읽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이야기였죠.

그녀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문학을 이용하였다는 것은 생각치도 않았죠.

그리고 그런 예가 하나 나올 때마다 그에 반하는 사례는

수백배, 수천배 널려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80년대 이후 고정된 정치운동의 필터가 덮인 분들이

정치색을 걷어낸 순수성만을 찾다니 매우 모순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건 그 당시 연구자들이 고전문학을 하면서 

정작 그 고전의 무대에 대해 공부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도 하고요.

(또 이건 당시 역사학계의 일부가 그런 소스를 제공한 원죄도 있죠)

요즘 공부하시는 분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말 문사철을 하는 건 요즘 국문학계더군요)


그냥 소설이나 여타 창작물은 재미를 위해 여러 장치를 넣어야 합니다.

거기에 역사적 엄밀성을 요구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착각하진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사실 그거 벗어난지 고작 반세기도 안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아직 그 잔재가 남아있는 사회를 제멋대로 해석해선 안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정당화하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저 청년의 명복을 빌며

저런 비극이 갈수록 줄어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절대 없어야 한다. 이게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참 쉽고 편한 수사를 남발하지 못하겠어요.


말꼬리 --------------------

위대한 신세계, 정말 읽어볼만한 SF입니다.

아시모프, 하인라인, 클라크의 작품들 못지 않은 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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