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실성왕 15~16년, 산이 무너지자 왕이 돌아가셨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실성왕 15~16년, 산이 무너지자 왕이 돌아가셨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5. 12. 15. 16:36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읽어보는군요. 이 블로그의 존재의의가 무색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짬을 내어 글을 써보는데, 정말 반년만의 글이로군요. 이런저런 일들로 고대사 글을 쓰기는 커녕 읽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니 어쩔 수 없긴 합니다. 과연 새해에는 여유가 날런지.. .


원문

十五年 夏五月 吐含山崩 泉水湧 高三丈

十六年 夏五月 王薨


해석

15년 여름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의 물이 솟구친 것이 5장에 이르렀다.

16년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셨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학자의 역사책이라고 불립니다. 때로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의한 역사서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신화적인 이야기는 많이 제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남겨진 구삼국사의 동며왕편을 보면 괴상하게 여겨질 이야기는 많이 줄여놓았습니다만, 김부식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줄인 것은 아닙니다. 중세 유학자의 시각에서 잘라낸 것이 아니라 나름 고대적 시각과 중세인의 관점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하였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죠?


오늘 이야기할 기사가 그렇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임금의 죽음이 석연치 않을 경우 그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이 직전 기사에 나옵니다. 특히 백제본기의 기사에 그런 부분이 많은데 용이 나타나면 왕이 죽는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정말 신비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왕의 비정상적 죽음을 사서에 담기 어렵다는 어떤 규제가(요즘은 어른들의 사정이라 하죠) 은유를 필요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치솟습니다. 그게 왕의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일단은 산이 무너진다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일단 토함산이 무너졌다는 말이 실제 현상일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김대성은 석불사(석굴암)를 토함산에 지을 수 없었을 것이고, 불국사도 평지에 지어지거나 다른 산에 지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함산이 무너졌다는 것은 실제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데 입이 가려운, 그야말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같은 거죠. 


토함산은 처음부터 석탈해와 관련 깊은 곳입니다. 석탈해는 바다를 통해 경주로 들어온 사람이지만 터를 잡은 후 토함산을 자신과 집안의 중심지로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토함산을 오를 때, 신이한 힘을 드러냅니다. 부하에게 산 아래에서 물을 떠오라고 시켰는데 그 부하가 몰래 물을 마십니다. 아무도 안봤으니 모를꺼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입이 바가지에 붙어버렸다지요. 그 상태로 돌아와 싹싹 비는 부하의 입에서 바가지를 입에서 뗍니다.  나중에는 토함산의 산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석탈해와 신라 중고기의 석씨가 같은 집안이냐는 사실 분명치 않습니다. 박씨들이 초기 왕위를 이어가는 와중에 석탈해만 갑툭튀로 왕을 하지요. 그의  왕계가 이어지지 않고 수백 년 후에 갑자기 석탈해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석씨가 나타납니다. 사실 석탈해와 석씨들이 혈연적으로 이어졌는지 증명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석탈해의 후손이라고 믿었다면 그렇다고 해두죠. 하여간 토함산은 석씨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무너졌다는 말은 무언가 석씨에게 큰 변화가 생긴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그냥 자연재해 기사로 넘겨버렸을 겁니다.


신라에선 내물왕 이후에는 김씨가 왕이 됩니다. 석씨 왕은 내물왕 이전까지만 나타납니다. 삼국사기를 봐도 석씨의 존재는 희미해집니다. 포항 중성리비나 울진 봉평비 등의 신라 금석문에도 석씨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토함산 붕괴기사를 석씨의 소멸과 연결짓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교과서에서 내물왕 때 부자상속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뒤를 이은 것은 아들 눌지가 아닙니다. 고구려에 볼모(인질)로 보냈던 실성이 귀국하고 갑자기 내물이 죽고 왕위를 눌지대신 실성이 물려받습니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실성의 정변으로 보지요. 이것을 지원한 것이 석씨라고 해석합니다. 실성은 자신을 인질로 보낸 것을 복수하듯 내물의 아들들을 고구려, 일본으로 보내버리죠. 눌지도 고구려로 보내는 척하며 죽이려고 하는데 그게 무산되고 눌지가 실성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어쩌며 이렇게 복잡한 왕위계승전의 와중에 석씨가 힘을 잃고 그것이 실성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이것도 증거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현존하는 자료를 통해 최대한 합리적으로 추론한 결과입니다. 짐순이가 보기에도 별다른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봅니다. 반대되는 증거가 나온다면 수정되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박, 석, 김, 3개의 성씨가 정말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왕실 안에서의 가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현대인의 시각에선 3개의 별개 가문이지만 혹시 같은 가문 내의 첫째네, 둘째네, 셋째네.. 이런 것이 아닐까 의심해보는거죠. 지금 알려진 자료로서는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증거로 입증할 수 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말꼬리 ----------------------------

1. 

토요일 어느 모임에서도 저런 모자이크질을 무심코 하니, 다른 분들이 이게 뭐냐고 물으시더군요. 뭐긴뭐야 음란한 짐순이의 증거다!

2.

저 기사를 모자이크할 게 안보여 7시 방향의 줄에다 모자이크를 칠하다보니 마침 1시 방향 기사도 모자이크를 해야했더군요. 대체 얼마나 굶주려 있던 거야!!!

3.

샘물이야기는 건너뛰게 되었는데 5장은 1장을 3.5m로 잡고(10척이 1장이고, 현재는 3.58m이나 과거에는 달랐으므로 대략 잡습니다) 17.5m로 계산되니 한 20m남짓 물이 솟았다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의미는 잘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닌거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