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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2010년에 오사카성 앞에서 발길을 돌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유적인 난파궁을 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을 때길에서 마주친 극우시위대입니다.워낙 멈춰있는 것, 고정된 것만 찍고 다니느라움직이는 것을 잘 찍지 못해서 이 사진 하나만 건졌습니다.저들의 구호를 찍은 것이 없다는 게 쵸큼 아쉬운 거군요. 불량한 조선인을 몰아내자.일본말을 모르는 짐순이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자주 간 건 아니지만 극우시위를 마주친 건 이거, 딱 한 번 뿐이었지요.뭐 더듬더듬 지도 펴놓고 물어보면 우리말로 대답해주거나아예 잡아끌고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사람이 많았지만요.그래선지 저 시위를 보면서도 신기한 걸 봤네..하는 느낌? 어제 오늘 들려오는 뉴스를 보니 생각나는 게 이 때의 시위였습니다.요 며칠 통일신라와 일본간의 외..
09년이었던가요.. 짐순이가 처음으로 듕궉땅을 밟은 것이,대련(따롄)에 내려 바로 점심을 먹으러 한인 거주지역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대충 밥먹고, 주변에 있는 슈퍼에 들어가서 이것저것을 사는데(왜냐하면 슬슬 도시를 벗어날 예정이라 뭔가 살 기회가 없겠죠)좀 먹을만한 과자를 사고아무래도 여름이니 음료수를 샀습니다. 입맛이 많이 달라 결국 모두에게 풀어버린 과자,스프라이트와 코카콜라, 그리고 물.코카콜라가 중국에서는 가구가락可口可樂으로 불리는 건 알고 있었어요.입맛에 맞고 즐거움이 커진다는 그 음료!그러나 물도 그렇고, 스프라이트도 그렇고, 가구가락은 시원하지 않았어요.물론 우리나라 상점처럼 냉장고에 들어가 있기는 했습니다만그 냉장고에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어요.왜 그럴까?이 동네는 아무리 듕궉에서 500만명..
80년대까지만해도 한일관계사를 바라보는 중심 시각은선진적인 한반도의 고대국가가 후진 일본에 문화를 전달해주었다는 겁니다.아니 일본이 우리보다 몇 수 아래에 있었던 상태라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뭐, 재야사학에 이르러서는 아예 우리가 그들을 지배했다는,적어도 매우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봅니다.그냥 왕인과 같은 이의 활약이 있었다고 보는 온건한 주장부터아예 식민지를 두고 지배했다는 (북한학자 김석형의) 극단론까지다양한 시각이 횡행했던 시댑니다. 또, 일본은 오래전부터 한반도로부터의 영향력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습니다.적어도 일본인의 국가의식이 성장하는 메이지시대 이후지배의 상태에 놓인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은지배의 정당성을 역사에서도 찾으려는 것과 충동했었으니까요.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
중국고대사에서는 토지의 단위로 무畝라는 단어를 쓰더군요.지금 찾아본 무의 사전적 의미에서는 30평, 약 100제곱미터라고 하는군요.문제는 이런 단위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지라 감이 안옵니다.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농경지의 형태,즉 정방형이나 장방형에 가까운 농지의 단위가 아니라고 하더군요.소에게 쟁기를 끌게하는 농법이 생기면서정방형이나 장방형은 소가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초기 운영상의 문제가 있어 아주 긴 세장방형의 농지형태를 가진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 한마리를 몰게 하여한 바퀴를 도는 거리.. 뭐 이런 식으로 설명을 들었습니다.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현재 쓰는 400미터 트랙이 아니라더 긴 트랙 한바퀴 도는 범위가 하나의 농사단위랄까요.. .여러분이 제 설명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처럼(뭐..
오늘 아침 라디오를 들으며 밥을 먹는데 미 상원의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보고서에서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문구의 삽입을 유보한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다만, 지금 다음과 네이뇬을 뒤져도 그 뉴스는 없습니다)동북아귀염역사재단에서 전문가를 파견하하고 여러 통로를 통해 문제 제기를 한 덕이죠.또 민간 차원에서도 뭔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이런 뉴스에 신경이 곤두서는 10대 후반의 걍박한 자아의 소유자로선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날은 필요할 때만 뽑는 거다.나름 질풍노도의 10대를 겪으며 얻은 결론입니다. -_-;;; 이게 단순히 남의 나라 역사를 개 뭣, 아니 홍어 생식기마냥 치부한 문제가 아닙니다.저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라 한다면 그저 우리만 기분 나쁠 일입니다.(그렇다고 위동네 뽀글이 아..
10년에 북경과 서안을 다녀오면서 만리장성을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아주 어릴적 가졌던 부푼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공부에 방해 되었던가 뭔가 사고를 쳐서 텔레비전 시청이 전면 금지되었던 중2시절에유일하게 허락된 것이 교육방송에서 하는 한달짜리 만리장성 다큐였습니다.(이것마저 금지했다면 정말 큰 사고칠 기세였을까요? 기억이 안납니다)그때만해도 나중에 중국에 갈 수만 있다면산해관에서 서역의 끝까지 만리장성을 걸어서 주파하겠다는 야망을 가졌는데고딩들이 서울우유 먹다가 연세우유, 건국우유, 나중엔 삼육우유로 간다는 농담처럼야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이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그래서 정작 만리장성을 간다는데 흥도 안났습니다.그 시절이라면 감격하다 못해 심장마비에 걸렸을텐데요.마침 두 군데..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131715&cp=du 한 10년전인가 고구려에 대한 세미나가 있어서 모 학회 행사에 간적이 있습니다.갔더니 학생급은 하나도 없이 전부 원로급들만 있어서 짬에 따라 맨 앞에서 모든 발표를 들어야 했죠.졸지도 못하고, 토론시간 되니 제일 만만하다고 녹음기주며 녹음하라 그러고(여담이지만 그 학회 행사는 단행본으로 항상 묵직하게 나오는데 그날 세미나 분량만 토론녹취가 생략되었습니다. 녹음기를 잘못 만졌나봐요...) 그날의 모든 발표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이 부여의 위치에 대한 발표였습니다.고고학하곤 담을 쌓은 인간이 제일 인상적인 게 뭐였냐면고구려의 뿌리인 부여가 길림성에 있나, 흑룡강성에..
“어머, 옷고름이 비뚤어졌어요.” 상제上帝님의 정원에 모인 정인貞人들이 오늘도 천사같이 천진한 웃음을 띠고 높은 문을 지나간다.더러움을 모르는 몸과 마음을 짙은 색의 관복으로 감싸고.옷자락의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얀 옷고름이 펄럭이지 않도록, 차분히 걷는 것이 이곳에서의 몸가짐. 물론 입궐시간에 닥쳐 아슬아슬하게 뛰어가는 등의 품위 없는 정인 따위 존재할 리도 없다. 성탕成湯(은의 건국자)시절에 건립된 이 관아는 전통있는 점술기관이다.은, 박에 머물던 시절의 옛 모습처럼 나무가 많은 이 지역에 상제님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언제나 나라를 위해 점을 치는 정인들의 정원.시대는 한참 을 변하고 변한 오늘날에도 상제님의 온실에서 순수배양된 정인들이 점만 친다는 시스템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귀중한 관아인 것..
1980년대였나 일본의 학자들이 백두산의 분화가 발해멸망의 배경이라는 설을 발표했습니다.그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그 당시의 과학상식으로야 황당무개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입니다.그 이후로도 발해의 멸망원인으로 거란의 대두와 위협,그리고 발해 내부의 정치적 내분을 드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이 글을 쓰는 저도 국가 멸망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내부 분열이라고 보는 편입니다.실제로도 내부가 안정적인데 순수한 외부 충격으로 쇠망하는 국가의 예는 없습니다.압도적인 서양 무기에 굴복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정치체로 반론할 수 있겠지만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잡한 내정 문제가 얽혀있습니다.하다못해 피사로의 2백명에게 8만 석기시대 병사가 패한 잉카제국도내분상태에 처해있었고, 많은 이들이 피..
"자료가 없다" 한국고대사만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다.어느 나라던 고대사 전공자는 저 말을 달고 산다.문자 자료가 넘치는 중국과 로마도, 약간 적당히 있는 우리도,문자가 없이 극소수의 고고자료에 의지해야하는 어떤 나라도고대사 전공자에게 자료가 부족하단 말은 만국 공통어다.아마, 역사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국가의 모든 언어로저 문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오죽하면 고대사 전공자는 굉장한 천재거나 바보임에 틀임 없다는 말이 있으랴.(아마 범인은 중세 이후 전공자일 것이다. 위 말도 만국 공통어다) 석사논문을 쓰고나니 구비문학을 전공하는 다른과 선배가'거짓부렁은 내전공인줄 알았더니 니가 진짜 거짓부렁하는구나'란 말을 했다.이건 국문학도들이 고대사전공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라고 생각한다.하긴 맞는 ..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서안과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서안에서 진시황의 병마용갱과 대안탑은 보고 싶었습니다. 북경은 그닥 관심이 없었구요. 선진시대 연의 수도로서, 혹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계라는 도시라면 모를까 명청이야 그닥인 것은 전공상 어쩔 수 없군요. 서안에서 가장 기대한 것은 대안탑이었습니다. 옛 장안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건축물인 그 것을 신라의 사신들이나 끌려왔던 고구려인들이나 백제인이라면 누구나 보았겠지요. 지금 서안보다 더 큰 옛 장안의 흔적을 알려주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습니다. 6752년에 삼장으로 유명한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여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고 제자들을 기른 자은사에 세워진 탑입니다. 고종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군요. 여기엔 불경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