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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http://daegu.museum.go.kr/gallery/gallery_content.asp 일시 : 012년 3월 27(화) ~ 5월 28(월)장소 : 대구국립박물관 대구박물관에서 대한제국을 주제로 한 특별전시를 개최합니다.'황실사람들', '변화와 존속', '일상과 공간'이란 세가지 주제로 구성되어있습니다.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려대학교 박물관, 부산박물관에서 모인 대한제국 관련 유물들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횝니다.
http://www.horimartcenter.org 일시 : 2012년 3월 28일 ~ 9월 28일장소 : 호림박물관 "신사분관"(호림아트센터) 제1, 2, 3 전시실관람시간 : 10:30~18:00휴관일 : 토, 일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연휴기간관람료 : 일반 - 8000원, 학생 - 5000원 호림박물관이 개관 3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까지 모아온 토기들을 한데 아우르는 전시를 합니다.선사시대로부터 시기별로 다양한 토기들을 전시합니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은 무료관람이라고 하는군요. 흠흠.. -------------------------------------- 그리고 이 특별전과 관련한 특별강좌도 마련된다고 합니다. 주제 - 가야토기-가야의 빛나는 유산강사 - 박천수 교수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
"자료가 없다" 한국고대사만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다.어느 나라던 고대사 전공자는 저 말을 달고 산다.문자 자료가 넘치는 중국과 로마도, 약간 적당히 있는 우리도,문자가 없이 극소수의 고고자료에 의지해야하는 어떤 나라도고대사 전공자에게 자료가 부족하단 말은 만국 공통어다.아마, 역사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국가의 모든 언어로저 문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오죽하면 고대사 전공자는 굉장한 천재거나 바보임에 틀임 없다는 말이 있으랴.(아마 범인은 중세 이후 전공자일 것이다. 위 말도 만국 공통어다) 석사논문을 쓰고나니 구비문학을 전공하는 다른과 선배가'거짓부렁은 내전공인줄 알았더니 니가 진짜 거짓부렁하는구나'란 말을 했다.이건 국문학도들이 고대사전공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라고 생각한다.하긴 맞는 ..
링크 - http://www.istanbul2012.co.kr 일시 : 5월 1일(화) ~ 9월 2일(일)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매우 흥미로운 전시를 엽니다. 국립중앙박물관(줄여서 국박, 요즘에는 중박으로 줄여부름)에서 연속으로 세계문명전을 개최해 왔는데 이번 전시는 08년 페르시아전에 이어 서남아시아의 문명을 다루는 전십니다. 앞선 전시가 이란을 무대로 한다면 이번에는 터키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전시는 크게 4부로 구성됩니다. 터키의 고대문명과 히타이트 제국, 그리스-로마 문명, 동로마제국, 오스만 제국의 황제 술탄 재미난 전시는 놓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고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 터키이슬람미술관, 톱카프궁박물관 같은 대표적인 박..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십수년을 넘게 역사책만 후벼파면서몇가지 가지고 있던 생각 중의 하나가'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못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에 대해 존경심을 갖자'였다.죽을 것을 알면서도 구식 화승총을 들고 용감히 일어선 의병들,먼 만주에서, 시베리아에서 풍찬노숙을 하던 독립군들,감옥에서 극한의 고통을 맛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총알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목숨을 바쳐 싸우던 군인들,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투사들.그 상황에 마주하였을 때, 그렇게 싸울 자신이 없다.아마 조용히 입다물고 숨어살았을 것이다.비겁하지만 그렇다고 꺼삐딴 리의 삶은 못살 것이다.그래서 그런 삶을 살아온 분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인간으로서, 역사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음지에 쳐박힌 인간에 끌려 역사공부를 시작했는데나이..
경주를 그렇게 좋아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은 고구려 후기 수도였던 평양성이었고 그게 불가능해서 대신 부여에 애정을 쏟았고 반면에 경주는 그냥 가는 곳.. 이런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서안을 가게 되고 나라를 방문하게 되면서 경주에도 관심이 생겼달까요. (요즘, 선배는 통일신라로 전향해 광명찾으라고 하고, 후배는 전공바꾸셨어요라고 묻습니다) 작년에 총알부족도 있어서 나라에서 열리는 정창원전을 가지 못한 아쉬움과 개인적인 일이 겹쳐 경주를 찾게 되었습니다. 마치 떠나는 날의 감상같은 서문은 집어치우고 다시 포석정으로 돌아갑니다. 포석정은 그저 경애왕이 나라의 위기에도 정줄놓고 술쳐먹으러 가서 놀다가 나라를 말아먹고 자신도 죽은 역사의 무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그게..
2박 3일의 일정으로 경주에 왔습니다. 일정은 크게 정해진 건 없고, 개인적으로 안압지와 경주박물관만은 보고야 만다..만 확정입니다. 원래 여행이란 건 시간단위 일정을 짜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정말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입니다. 우선 오늘은 오릉, 나정, 포석정, 감은사와 감포를 오갔습니다. 전철 하나를 놓친 끝에 서울역에서 열차를 1분차이로 놓치고 다음 차로 점심 때쯤 신경주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가서 버스를 기다리다 택시를 타고 찾아간 오릉. 이건 동행인의 강력한 요청탓인데 사실, 신라의 상고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답사때도 여길 온 게 10년 전 한 번뿐이지 싶군요. 오릉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기왕(岐王)의 집에서 항상 그대를 보았고 최구(崔九)의 정원에서 노랫소리 몇 번을 들었던가 지금 이 강남은 한창 좋은 풍경인데 꽃 떨어지는 시절에 다시 그대를 만났구려 ---------------------- 기왕 : 당예종의 넷째 아들로 현종의 동생이기도 한 이범 최구 : 최척. 구는 최씨집안의 항렬에서 아홉째라는 뜻. (번역은 김원중 역, "당시감상대관", 까치, 1992, 37쪽에서 따옴) 두보가 젊었을 시절에 기왕과 최구의 집에서 만나던 이구년을 강남에서 만났다. 한 명은 필명을 날리던 문사였고, 한 명은 노래 하나로 알아주는 가수였다. 안록산의 난을 맞이하여 이리저리 헤메고 다니다 강남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아,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데 우리들의 신세는 화..
요즘 가장 관심있는 일은 논문을 쓰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시각적으로 간결하게 보여줄 것인가입니다. 아무래도 책상머리 앞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가르치는 시간이 더 길어서 그럴껍니다. 일전에 소개한 골품제 그림처럼 한 눈에 보여주는 걸 좋아합니다. 한때 교재로 쓰려다 말았던 책이 있는데 (결국 직접 만들어야 했습니다. 뭐, 결론적으론 도움이 되었지만) 여기에 실린 그림 하나가 ㅎㅇㅎㅇ거리게 뿅뿅가게 만들었습니다. 주경식, 백유정의 "한국사 흐름 따라잡기"라는 책입니다.(휴머니스트, 2002) 삼국시대의 각각의 국가적 성장과 흐름을 아주 간결하게 만들었는데 나름 핵심적인 내용을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의 전성기 를 표현한 그래프에 대해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RGM-79의 관점에서는 이..
변태섭 - 요즘 한국사의 붐이 일고 있는데, 그것이 순수하게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면 환영할만 합니다. 또 각종 시험에 국사과목이 많이 끼이는데, 국사공부가 시험과목으로서 억지로 강요된다면 도리어 학생들은 국사를 지긋지긋하고 귀찮은 것으로 여기게 될지도 몰라요. 김원룡 - 동감입니다. 최근에 치른 대학입학 예비고사의 국사문제를 보니까,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과연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 자신도 모를 게 많아요. 변태섭 - 얼마 전 제주도의 어느 여고 교사한테서 내게 편지가 왔는데, 예비고사 국사문제 중 어느 하나를 지적해서 항의를 했더군요. 나 자신도 모를 뿐만 아니라 아마 국사학자 모두에게 물어도 모를 그런 문제였어요.(웃음) 김용덕 - ‘어려운 국사’가 되어선 안되지..
어제(22일), 전시회 두 가지를 보고 왔습니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중인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을 보고, 이어서 광화문 지하에서 진행중인 "세종이야기, 충무공이야기"를 봤습니다. 본 순서대로라면 문자, 그 이후를 먼저 다루는 것이 좋겠으나 항상 맛난 건 나중에 먹는다는 신조를 철저히 지키기에 역순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박물관에서 도록을 샀는데 이걸 들고 이동하기도 갑갑하고, 또 월요일에 동료들에게 보여주러 가져오기 귀찮다는 이유로 먼저 사무실에 들러 놓고나서 슬슬 광화문으로 걸어갔습니다. 안국역에서 광화문, 뭐, 평소 퇴근할 때 걸어가는 길이라 별다를 건 없었습니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입구로 들어가니 먼저 세종이야기를 보는 동선이 되더군요. 사실, 세종이야기 부분은 끔찍..
올 초에 공산성에 갔을 적에 공산성 내 공북루쪽의 성안마을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백제의 갑옷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갑옷은 가죽 찰갑이며 옻칠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최고급인 제품이지요.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발굴된 것을 보니 습기 덕분에 명문같은 것이 잘도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가죽부분은 사라졌고, 그 위를 두껍게 덮어쓴 옷칠 부분만 남았습니다. 갑옷에서는 아래와 같은 명문이 있습니다.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정관 19년이라는 연대입니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 19년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645년입니다. 이 갑옷이 언제쯤 만들어졌느냐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적어도 이 것이 누..
과연 김부식이 신라왕족의식을 갖고 삼국사기를 일부러 신라 편향적으로 썼느냐에 대해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학계에서도 종종 그런 시각을 확인하게 되어 놀랍긴 한데 (그만큼 김부식이나 고려사회의 지적 풍토라던가 특히 귀족사회의 특질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단 겁니다) 슬슬 여기에 대해 이곳에서든 논문으로든 뭘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마침 올해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보다가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위의 글처럼 김부식은 대대로 귀족의 자리에 오른 신라왕족 출신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출세한 것도, 신라왕족 출신이라는 점도 절대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신라왕족 출신이기 떄문에 아주 잘먹고 잘 살았던 귀족통뼈였을까요? 김부식의 가문이..
고대사에 대한 기록 중에는 고흥이라던가 이문진, 또는 김대문이라는 이름은 전해지지만 그들의 저작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화랑세기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최소 김부식은 여러 종류의 사서를 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 중국사료들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김부식이 국내사료를 인멸하지 않았음은 다음 글을 살펴주세요 → http://rgm-79.tistory.com/8) 그래서 김부식이 서술한 삼국사기가 어떤 사서인지 비교할 대상이 없기에 각자의 마음 속에서 그리는 심국사기의 이미지가 너풀너풀 날아다니는 중이죠. 문제는 삼국사기 안읽고 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진실처럼 포장된 상태로요. 그런데 삼국사기 안에는 약간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김부식은 유달리 최치..
아주 오래간만에 이 블로그의 본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고구려 전쟁기록 두 편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충분한 자료가 모이지 않은 관계로 우선은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그런 땜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미안한 맘이 들기도 할 정도입니다. 원문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大日伊湌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번역 검군은 대사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다. 건복 44년 ..
제13회 하계세미나 일정 일시 : 2011년 7월 28-29일(목-금) 장소 : 대구 팔공산 온천관광호텔(대구시 동구 용수동 89-16, 053-985-8080) 후원 : 한국연구재단,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금복문화재단, 백제문화재연구원, 시공테크, 중앙문화재연구원 주제 : 동아시아 속의 한국고대생활사 [1일차](2011년 7월 28일) 제1부 : 개회식 및 기조-주제발표 (13:00 - 15:50) 사회 : 여호규(한국외대) 개회사 : 이영호 한국고대사학회 회장(경북대) 기조발표 : 無와 裏面의 역사, 고대 생활사를 위하여 발표자 : 송기호(서울대) 제1주제 : 漢代 서북변경 吏卒의 일상 발표자 : 김경호(성균관대) / 토론자 : 윤재석(경북대) 제2주제 : 일본 율령국가의 연중행사 발표자 : 김은숙(..
쇼토쿠태자(574~622)가 세운 시텐노지(사천왕사四天王寺)는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무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587년 일본에서 불교의 도입을 둘러싸고 모노노베씨와 소가씨가 싸울 적에 불교도입을 주장한 소가씨의 편에선 태자가 사천왕에게 기원을 한 후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언젠가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요) 소가 우마코가 세운 아스카데라(비조사飛鳥寺)와 함께 일본 최초의 사원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천왕사에선 쇼토쿠 태자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요. 잠시 쇼토쿠태자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요메이천황(용명)의 아들로 우마야도라고도 불렸습니다. 고모인 스이코천황(추고)이 즉위하자 당대의 실력자 소가 우마코와 연합하여 섭정으로 활동합니다. 603년의 12관계 도입, 604년의 헌법 17개조를 반포했고..
※ 현재 RGM-79가 모처에서 진행중인 한국사 수업에서 삼국사기에 대한 부분은 따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여기서나마 대략적인 내용을 적어두려고 합니다. 어차피 삼국사기를 다루는 블로그니 이런 개략적 정리 하나쯤은 필요하겠지요. 김부식과 삼국사기 1. 김부식(1075~1151) : 신라왕실의 후예로 다른 집안과는 달리 뒤늦게 중앙정계로 진출. 김부식의 형제 4인이 모두 과거에 합격함. 문장에 능해 여러 차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금의 압박이 거세지자 이자겸과 현실적인 외교관을 주장했으나 그의 전횡에는 반대함. 이후 수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묘청일파가 서경천도를 주장하자 반대함.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개경의 서경파를 제거하고 진압에 나서 1년 만에 토벌함. 윤관의 아들 윤언이와의 ..
포도로 빚은 좋은 술 야광배에 부어, 마시려니 비파소리 말 위에서 자지러진다. 취해서 모래밭에 누웠다고 그대는 웃지 말라. 예로부터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 왕한, 양주사 당은 국제적인 국가답게 전쟁도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벌였습니다. 동쪽의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북으로는 돌궐, 서로는 티벳,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 그리고 아랍과도 싸웠지요. 그래서 전쟁에 참여한 문인들의 시가 많습니다. 전쟁에는 반드시 군인들만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참모역할을 해야할 문관들도 필요하지요. 전투만 벌이는 것이 아니라 지배까지 해야하니까요. 바로 그런 전선에서의 삶을 어떻게 견뎌내었는가에 대한 시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위에 적힌 시는 병사들의 두려움과 그것을 이겨내려 안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