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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論曰 人君卽位 踰年稱元 其法詳於春秋 此先王不刊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太甲元年 正義曰 成湯旣沒 其歲卽 太甲元年 然孟子曰 湯崩 太丁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 則疑若尙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卽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 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 太甲元年 是也 孟子云 太丁未立者 謂太丁未立而死也 外丙二年仲壬四年者 皆謂太丁之子太甲二兄 或生二年 或生四年而死 太甲所以得繼湯耳 史記便謂 此 仲壬 外丙爲二君 誤也 由前 則以先君終年 卽位稱元 非是 由後 則可謂得商人之禮者矣 사론(史論): 임금이 즉위하면 해를 넘겨 원년을 칭하는 것은 그 법이 춘추에 상세히 있으니, 이는 고칠 수 없는 선왕의 법이다. 이훈(伊訓)에 ‘성탕(成湯)이 이미 죽었으니 태갑(太甲) 원년이다.’하였고, 정의(正義)에는 '성탕이 이미 죽었으니 그..
요 며칠 머리회전도 멎어버려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여름이기도 하고요(여름은 쥐약입니다) 지쳐버린 탓이기도 했습니다. 공부도 공부고, 블로그 관련 세 집 살이를 하는데 전부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휴가도 없는 일상이 사람 기력빠지게 하나봅니다. 그러다 몇 년 전에 보고 분노했던 기사를 다시 읽어버렸습니다. 아니 웹 공간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죠. ‘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한겨레 2005-10-04) 이 기사를 다시 읽으며 맥이 빠져버렸고, 의욕이란 게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삼국사기 블로그를 열었다고 해서 무조건 빠돌이 역할을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김부식이란 인간 자체도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삼국사기도 완벽한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사람들에게 구역질난다는 소리를 들을 정..
공주와 온달의 첫 만남은 아름답지도, 유쾌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자식들 앞에서 머리끄덩이를 잡혀도 할 말 없는 온달. 어찌보면 마누라 잘 만났다고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용케 결혼했구나 하는 심정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 원문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 번역문 공주는 (집에서) 나와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품었던 속내를 말하니 온달이 발끈하여 "여기는 어린 여자가 마땅히 올 곳이 아닌데(나타나니), 필히 사람이 아니고 (사람을 후리는) 여우귀신이구나. (너는) 나를 괴롭히지 말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지난 글에서는 나무 껍질이라고 해석..
지난 글에서 끊어 읽기를 잘 못한 것 같습니다. 乃行至其家를 문장이 끝나는 것으로 했는데 다시 읽어보면 이 문장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뒤에 오는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요. - 원문 1.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2.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 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 번역문 1. (공주가) 그 집에 이르러 보니 눈이 먼 노모가 있음을 보고 앞에 나아가 절하며 그 아들의 간 곳을 물었다. 2. 노모가 대답하기를 "우리 자식은 가난한데다 미천하니 귀인이 가히 가까이할 바가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내가 특이하오. 그대의 손은 부드럽기가 면과 같으니 반드시 천하의 귀인일..
펄펄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 "삼국사기"13, 고구려본기 1, 유리왕 3년조 고구려 초기사는 백제나 신라와는 어딘지 다른 색채를 보여준다. 우선 백제나 신라가 소국단계에 머물며 각기 마한과 진한지역의 패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칠 때, 이미 중국에까지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나 신라의 기록들이 이때도 대단했다고 말하듯 왕-귀족(신하)-백성의 '세 위계'가 체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고구려의 그것은 좀 다르다. 왕뿐만 아니라 왕자나 귀족들의 행위가 다양하게 그려진다. 왕자는 가만히 왕실의 수나 채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간다. 때론 차대왕 신성처럼 뭔가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개 그러한 행동이 돌출행위가 되어 탄압을..
오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 학부 답사준비 세미나에 갔다 왔다. 답사자료집에 들어갈 내용을 미리 점검하는 자리인데 거기서 재미있는 발표가 두 건 있었다. 그중에서 불국사와 석굴사(석불암)에 대한 발표에서 의문점을 던졌는데 두 절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일개 귀족이 고작 부모를 위해 짓는 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심이 강하다한들 불상이나 조성하는 정도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하면 그 건 틀린 생각이다. 먼저 불국사와 석불사가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할만큼 중요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문장을 두 절의 가치가 없단 말로 오해 말기를 바란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절은 황룡사나 사천왕사, 흥륜사 등의 '성전'..
대개의 경우 딸이 아버지에게 대들어서 좋다고 하악하악할 부모는 화성인을 만나기보다 어렵습니다. 바로 평강왕도 그런 평범한 아버지입니다. 원문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번역문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즉 나의 딸이라 할 수 없다. 어찌 같은 곳에 살 수 있겠느냐. 마땅히 네가 가고자 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보석 팔찌 수십매를 팔꿈치 뒤에 매고 홀로 궁궐을 나왔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으로 가는 길)을 묻고 바로 그 집에 이르렀다. 드디어 공주가 쫓겨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뚜껑이 열린 상태라 ..
앞에서 온달을 소개했으니 이제는 여주인공인 공주를 소개할 차례입니다. 대개 평강공주라고 불리고 있으나 실제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평강공주라는 이름은 평강왕의 공주라는 뜻으로 불립니다. 자, 기록을 살펴보죠. - 원문 - 1. 平岡王少女兒好啼 2. 王戲曰 “汝常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3.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4.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 번역문 - 1. 평강왕에게는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울기를 잘하였다. 2. 왕이 놀리며 말하기를 "너는 항상 울어 내 귀를 아프게 하는구나. 장차 커서는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으니 마땅히 바보(같은) 온달에게 시집보낼 수 밖에 없구..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관련된 전설로 그가 삼국사기를 펴내면서 과거의 사료를 불태워 자신의 저작만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그랬던 것일까? 김부식보다 한참 뒤에 살았던 이규보의 글에서 한가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들이 얘기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뒤에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
자, 시작해볼까요? 드디어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전의 첫머리, 온달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먼저 왼쪽의 문장을 보기 쉽게 옮겨봅니다. - 원문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1)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 해석문 온달은 고구려의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는 파리하여2) 우스웠으나 마음만은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니 항상 음식을 구걸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저자거리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바보(같은) 온달이라 하였다. 주 : 1) 정문연 본에 따라 曉로 수정 2) 龍鐘 : 늙고 여위었다는 뜻이나 파리하다로 수정. 이기백, '온달전의 검토'("백산학보" 3, 1967 ; "한국고대정..
간만에 전공개설서를 다시 읽어보니 고구려의 조세제도에 대한 부분의 여백 위에 "무분별하고 과도한 수탈 →인두세적 조세 →재산세적 조세징수"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흐름을 정리한 것 같은데 그 조세의 발달에 대한 내 인식에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조세는 국가체제의 발전에 따라 합리화의 흐름에 따랐는가? 정말 과거 전근대사회의 조세제도는 무분별하고 과도했던가? 고려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는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갈수록 복잡하게 변해갔으므로 우선 범위를 고대라는 시점, 그중에서 삼국시대로 한정해서 보기로 하자. 이 시기의 조세의 본질은 '규모'라는 한 단어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종전에는 족장族長, 호민豪民 등 공동체에 기반한 지배자들이..
1.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사에서 위만衛滿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일단의 중국인으로 이 땅에 한의 식민지를 건설한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그에 반발로 연에 끌려갔다가 대탈출을 감행한 모세와 같은 인물로, 아니면 남월南越의 조타를 모델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중국에서 조작한 가공의 인물로 그려졌다. 재야학자들에게는 그저 조선제국의 혼란을 틈타 서쪽을 잠식해 나라를 세운 변방의 패역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암묵적으로 그의 조선은 그전의 조선과 따로 보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여기서는 그의 출신과 그가 조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가 세운 나라의 성격, 그와 동시기에 유사한 왕조를 세웠던 남월의 조타를 살펴보겠..
왕명 재위 서력 事 項 文咨王 1 492 위魏에서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요해제군사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책봉함. 3 494 부여왕이 항복함. 신라와 살수薩水에서 싸움. 4 495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원군에 격퇴당함. 5 496 제齊에서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올려줌.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함. 6 497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함락시킴. 7 498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로 삼음. 10 501 백제에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함. 11 502 백제에서 변방을 공격함. 15 506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눈으로 회군함. 16 507 장군 고로高老를 보내 한성漢城을 치게 하였으나 격퇴당함. 17 508 양梁에서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
자, 뭘 하겠다고 이런 그림을 걸어놓았을까요? 이제 삼국사기를 읽고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공부를 할 RGM-79 GM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자면 어디에선가 한국 고대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초짜연구자라고 해두죠. (신비주의 컨셉으로 나가면 뭔가 있어보인다 이거죠;;;;) 삼국사기를 갖고 뭘 어떻게 할꺼냐. 이게 문제죠. 먼저 하루에 한 줄, 혹은 한 문장 정도씩 읽어나가고요. 그 다음에 읽은 부분의 핵심인 인물과 사건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나갈까 합니다. 너무 팍팍 나가면 읽는 분들도 어려워할 뿐만 아니라 제가 매우 귀찮아 합니다.(문제의 핵심!) 맨 첫 발은 썰렁하게 나가지만 마지막 한 발은 천지를 울릴 것이다 생각하고 나가봅시다. 우선은 첫 시작은 삼국사기 권 45, 열전 5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