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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구려는 시기적으로 기원전 37년에 혼강유역의 환인지방에서 건국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광개토왕비에 적힌 왕대수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차이에 주목하며 200년 앞서서 건국했다는 것이 공식 견해입니다.또 중국기록에 고구려는 900년 된 나라라는 이야기도 나오지요.일부에서는 남한 학계는 식민사학 나부랭이라서 그딴 거 안믿는다고도 하지만(그에 대한 제 답변은 趙家之馬!입니다. 이놈의 19세는 욕도 잘해요~! 키랏!)아직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북한처럼 단정짓지는 않습니다.다만 북한처럼 완전한 고구려의 형태냐 원초적인 고구려적인 상태냐에 대해 조심스러울 뿐입니다.기원전 75년에 이 지역에 머물던 현도군이 만주로 이동하는데이를 고구려 국가형성의 중요한 분기로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입니다. 우선 본격적인 건..
원래 남들이 가라하면 안갑니다.항상 연방의 폭죽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이 블로그 처음 만들 적에 이렇게 하면 좋습니다, 저렇게 하면 좋습니다.. 이런 말 들려오면 허생 앞에서 츤츤거리는 이완대장마냥이건 아니므니다, 저것도 아니므니다.. 모드로 일관하였지요.그래놓고는 한다는 게 사람들이 그리 선호하지 않을 삼국사기 이야깁니다.관심가진 사람들과 살다보면 그게 단줄 아는데실제 리얼충의 세상에서는 ‘삼국사기에는 관심없다’가 6할, ‘김부식=큐베’가 3할그래도 재미있게 봐주는 사람이 1할..이게 냉정한 평가라고 봅니다. 그중에서도 이제 지증왕 두 편을 제끼고 동천왕을 건드렸는데(사실 한 편은 박사논문 하나 읽어야 하는데 그거 읽다가 피토하면 누가 살려주나여)머리 속에 대략 얼개는 그려지지만 그래도 자료는 확실히 ..
원문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서기 248년에 동천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신하들이 따라 죽으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중천왕은 뜯어말려야 했습니다만, 왕을 ..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거늘 어찌 돌아가 않으리요?이제껏 내 마음 몸뚱이에 부림 받아 왔거늘, 어찌 낙담하여 홀로 슬퍼하는가?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다가 올 일은 올바로 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실로 길 잘못 들어 더 멀어지기 전에 지금이 옳고 어제가 글렀음을 깨달았네.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출렁이고, 바람은 표표히 옷자락을 날리네길가는 사람에게 갈 길 물으며 새벽 빛 흐림을 한하네.이내, 멀리 내 집을 바라보고는 기쁨에 달려가니,하인들이 반겨 맞아주고, 어린 자식들 문앞에서 기다리네.뜨락은 잡풀로 우거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하네.아이들 데리고 방에 들어가니 술통엔 술이 가득하네.술병과 술잔 가져다가 자작하면서 뜨락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기쁜 얼굴 짓고남창에 기대어 거리낌 없..
공주랑 결혼한 온달을 어떻게 볼거냐를 가지고 약간이기는 하지만여러 의견들이 있었습니다.하급귀족일 것이라는 설부터, 신진세력의 성장을 보여준다는 설 등이 있지요.온달이 6세기 후반 고구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생각은 각기 의견이 다른 분들 사이에서도 공통점입니다.(사실, 6세기에 이 정도의 소스가 나오는 고구려인 자체가 없습니다;;) 공주와 결혼하기 전이야 꽤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 같은데정작 그가 어떤 신분인지는 명확한 게 없습니다.그래서 그가 왕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 나오는 관등이 대형에 주목해봅니다. 가장 마지막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신당서 고려전이나 한원 고려조에 따르면대형관등은 7등입니다.한원기록을 따르면 14관등 중 7등이니 딱 중간입니다.(이건 당의 침공 직전 고구려를 방문한..
원문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해석6년 봄 2월 왕은 친히 국내의 주군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로 하여금 군주로 삼았다. 군주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매번 하는 소린데 이 문장 한 줄로도 은하영웅전설의 외전 한 권 분량이 나옵니다.(그만큼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가 아니라 외전 한권 분량의 내용이 나온다는 겁니다. 오해 없으시길) 신라의 국가제도의 한 획기가 되기도 하려니와 한국고대의 제도사연구에서 이 제도가 갖는 것의 의미가 크거든요. 고구려나 백제는 너무도 단촐하여 이게 어느 시점의 것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가에 대해서 그리 나오지 않습니다. 고구려로 가면 아예 관부가 있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돕니다. 신라 지증왕 6..
원문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해석6월 고구려 수임성 사람 모잠 대형이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궁모성에서 패강까지 이르며 당나라 사람들과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했다. 원문에 연잠年岑대형으로 나와 있지만 다른 기록들을 대조해보면 모잠牟岑, 즉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검모잠입니다. 중종 초에 만든 목판본(그러니까 정덕본이라 부르죠)에 연잠이라 적혀있고, 그 뒤 영조 때 펴낸 금속활자본(주자본이라 부르고 여기서 사용하는 원문은 다 이겁니다)에도 똑같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정덕본을 교감한 이강래 선생님이나 정문연본 삼국사기의 교감을 하신 분들 덕에 원문의 오류를 따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요. 670년, 점령한 후 어수선한 분위기는 지난 수..
원문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해석4년 겨울 10월에 군신들이 상언(上言:군주에게 말씀 올리다)하기를"시조께서 창업하신 이래 나라의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혹은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신 등이 보기에 신新이라는 글자는 덕업을 나날이 새로이 한다는,라羅는 사방을 망하란다는 뜻이 있습니다.즉 이 것을 국호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또 예로부터 보니 국가를 이끄는 자는 모두 제나 왕을 칭했습니다.우리 시조가 나라를 세우신 후 지금 22대에 이르렀는데단지 방언(고유어)으로 부르고 바른 존호가 ..
김부식 빠심가득한 연방의 폭죽이지만그래도 그의 서술에서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그 중 하나가 봉상왕 때의 국상(재상이랄까요?) 창조리에 대한 기삽니다. 그의 열전은 삼국사기 권 49, 연개소문과 같이 실려있습니다.전통적인 분류로 보자면 반신전叛臣傳, 그러니까 반역을 한 신하의 범주에 놓여 있습니다.연개소문이야 왕을 죽이고 시체를 구덩이에 버렸으며, 동료 귀족 180여 명도 죽이고 권력을 잡았지요.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반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창조리를 어땠을까요?봉상왕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역을 치루고 있는데궁궐수리를 위해 사람들을 모아 노역을 시키고그것에 대해 간하는 국상에게 ‘너 죽을래’라는 협박을 날립니다.나라를 다 갉아먹을 것 같은 포악한 왕을 갈아치우지요.기록 그대로라면 피도 안..
원문十五年 移都平壤 해석십오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요 며칠 피로에 녹아나서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한 거라곤 누워서 『하야테처럼』을 완독하고 애니를 본 것 밖에 없네요.자도자도 풀리지 않는 상황이라 글쓰는 건 무리!그래도 뭔가 땜빵을 할까하다가 정공법으로 무거운 주제를 걸어봅니다. 문장은 매우 간단합니다. 정말 간결해서 행간의 의미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그렇지만 고구려 후기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국면의 순간입니다.장수왕 15년, 그러니까 서력으로 427년에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깁니다.뭐, 건국 초 한군현과의 대결 당시부터 국내성은 적의 공격에 자주 노출되었습니다.아무리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를 완비한들관구검이나 모용황에게 수도가 털리고 왕이 피난을 가야한 했지요.그나마..
원문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해석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함을 알리고 드디어 강역을 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을 경계로 하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히고, 동으로는 주양까지 미치었다. - 삼국사기 23, 백제본기 1, 온조왕 13년조 신라편향적인 글만 올리는 와중에 돌아보니 백제 글은 없는지라 이걸 골라놓고는 약간 후회를 했습니다. 백제 건국 초의 마한과의 관계라던가 백제초기 영역의 변화상은 그야말로 학위논문급의 주제입니다. 이 글 하나 쓰자고 백제 초기사를 다시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걸 다 하다간 차라리 출판사랑 계약하고 책 하나 쓰는 게 낫습니다..만 이 백제 초기사도 은근히 베트남 정글같은 분야라 피하고 싶습니다...
원문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번역3년 봄 2월 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게 하였다. 전에는 왕이 돌아가시면 즉 남녀 각 5명으로 같이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였다. 지증왕은 신라사에 있어서 그 어떤 왕 이상으로 중요성을 가지는 왕입니다.지증왕 이전의 신라는 소백산맥 안에서만 강한 척하는 약소국에 불과하였습니다.아들인 법흥왕의 여러 정치적 변화나손자인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활동만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지증왕이 없었으면..하는 말은 그저 혈연상의 수사가 아닙니다.시대의 변화상을 몸소 깨닿고 그쪽으로 과감히 방향을 전환을 한이 아버지,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과 손자의 위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광개토, 장수왕보다 소수림왕을 더 중요시하는데이 지증왕..
원문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 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盍逃乎” 曰 “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 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원문 번역검군은 (관아를) 나와 근랑의 문하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필히 말이 새나갈 것이다’라 하였다. 드디어 그를 불렀는데, 근랑은 그 모살(기도)를 알고 근랑에게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근랑이 이유를 묻자 검군은 아무 말도 안했는데 다시 세 번을 묻자 이에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였다. ..
원문論曰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是故 魯公之取於吳 晋侯之有四姬 陳司敗 鄭子産深譏之 若新羅 則不止取同姓而已 兄弟子 姑姨從姊妹 皆聘爲妻 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 若匈奴之烝母報子 則又甚於此矣 번역논하여 가로되, 처를 취함에 있어 동성은 취하지 않음은 구별이 두터운 것이다. 이에 고로 노나라 공이 오에서 (아내를) 취하고, 진후가 4명의 희(씨성)를 취한 것은 진의 사패와 정의 자산이 그것을 깊이 비판한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동성(의 아내)를 취함에 그치지 않고 조카와 고종, 이종자매까지도 모두 찾아가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하다고 중국의 예로써 이를 책하는 것은 매우 어긋난 것이다. 흉노의 경우에 어미와 사통하고 자식과 사통하는데 이보다 심한 것은 다시 없다. 아주 오래간..
원문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해석(영류왕) 14년(631) 당에서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유해를 추스려 묻고 제를 지내게 하고, 당시에 세운 경관을 허물게 하였다. 봄 2월 왕이 무리를 모아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리가 되었고, 무릇 16년이 걸려 일을 마쳤다. -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10, 영류왕 14년조 원래 삼국사기 읽기의 복귀로 작년에 전반전을 마친 검군의 후반부얘기를 하려고 했는 데 때가 때인지라 장성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만 먼저 이 자리를 빌어 약간의 이야기를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저께 글에 천리장성은 만리장성은 ..
사실 뒷북이긴 합니다.작년 연말에 국립기상연구소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기상기록을하나로 모아 자료집을 발간했었습니다.이 소식을 접하고 바로 다운받고, 학교에 갔더니 책이 와있더군요.이런 자료집은 공부를 할 때 매우 요긴합니다.사료 전체를 하나하나 뒤져서 카드를 만드는 작업은 선생님 연배나10년 위 선배들이 하던 일인데요즘 잘 나온 전산자료로 검색을 이용하면 그 분들이 빼먹은 것도 발견하게 되더라구요.이제는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들도 없지만, 또 그것만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긴 합니다.카드 만들던 시절에 비해 읽어야할 논문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거든요.물론 사료를 1쪽부터 끝까지 읽다보면 남는 게 더 많은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서울 인근에서 발굴작업을 하던 선배가 자료 좀 뽑아달라고 해서4~5..
아주 오래간만에 학교에 갔습니다.집 위가 학교인데 서울서 돈벌이를 하다보니 퇴근하면 10시라,그리고 서울서 자는 날도 많아 시간이 별로 없죠.하여간 간만에 바쁜 후배놈과 논문 얘기를 신나게 했습니다.조교일을 너무 잘해 업무에 치여사는데다(워낙 잘해 너도나도 시키는 통에 직속선배랍시고 일 시켜본 적 없습니다)결혼을 했고 애가 태어나는 여러 일을 거쳐 한참 전에 나왔어야 할 논문이 몇 년째 중단되었지요.그런데 책상을 보니 간만에 사료들이 펼쳐져 있어서(하도 바쁜 터라 말 걸기도 힘듭니다)요즘 공부 하나 싶어 말 걸었더니 신나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해줍니다.처음 줄기 잡을 때도 매우 기대하던 논문인데 오늘 들어보니 찌릿합니다. 그 중에서 중국 자료를 그동안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해석했다는 걸 밝혀낸 게 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개정판을 준비중이란 소식을 듣고 작년 이맘때 매우 흥분한 상태였습니다.학부시절에 삼국사기는 두계 이병도의 교감본으로 공부하다좀 지나니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의 삼국사기가 나오더군요.학부시절의 전반부는 두계본, 후반부는 정문연본과 함께 했습니다. 두계본이 해방직후부터 70년대 후반까지 긴 시간에 걸쳐 정련된 것이라면정문연본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고대사연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결실입니다.둘 다 한국고대사연구에 있어서 획을 그은 소중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원문교감과 역주로 나뉘어진 두계본은 절판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물론 세로조판을 가로조판으로 바꾸고, 원문과 번역을 한데로 모은 버전은 지금도 있습니다)정문연본 역시 금새 절판이 되어 대체 요즘 공부하는 애..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한때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이, 임궁에서 범어를 파하니 / 琳宮梵語罷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 天色凈琉璃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부식이 그 시를 좋아한 끝에 그를 구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은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두고 시를 짓기를,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는냐? 왜,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과연 김부식이 신라왕족의식을 갖고 삼국사기를 일부러 신라 편향적으로 썼느냐에 대해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학계에서도 종종 그런 시각을 확인하게 되어 놀랍긴 한데 (그만큼 김부식이나 고려사회의 지적 풍토라던가 특히 귀족사회의 특질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단 겁니다) 슬슬 여기에 대해 이곳에서든 논문으로든 뭘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마침 올해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보다가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위의 글처럼 김부식은 대대로 귀족의 자리에 오른 신라왕족 출신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출세한 것도, 신라왕족 출신이라는 점도 절대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신라왕족 출신이기 떄문에 아주 잘먹고 잘 살았던 귀족통뼈였을까요? 김부식의 가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