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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삼국인이야기 000 - 생각느니, 나는 외로운 사람 - 유리왕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삼국인 이야기

삼국인이야기 000 - 생각느니, 나는 외로운 사람 - 유리왕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09. 8. 4. 19:11

 

펄펄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 "삼국사기"13, 고구려본기 1, 유리왕 3년조 

고구려 초기사는 백제나 신라와는 어딘지 다른 색채를 보여준다.
우선 백제나 신라가 소국단계에 머물며 각기 마한과 진한지역의 패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칠 때,
이미 중국에까지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나 신라의 기록들이 이때도 대단했다고 말하듯
왕-귀족(신하)-백성의 '세 위계'가 체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고구려의 그것은 좀 다르다.
왕뿐만 아니라 왕자나 귀족들의 행위가 다양하게 그려진다.
왕자는 가만히 왕실의 수나 채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간다.
때론 차대왕 신성처럼 뭔가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개 그러한 행동이 돌출행위가 되어 탄압을 받기도 한다.
대무신왕의 호동, 태조왕의 두 아들들, 신대왕의 아들형제들, 중천왕의 아들 달가, 서천왕의 아들 돌고,
그리고 여기서 다룰 주인공인 유리왕의 아들들.
이는 고구려 국가의 부실함(후대에 비해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고대국가가 스스로의 질서를 확립해 가는 일어난 일들이
고구려 초기기록에 더욱더 생생하게 실려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유리왕이란 사람은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신화를 가진 아버지-동명성왕 추모-를 두고 있으면서도 자신 또한 스스로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 추모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존재 없이 자라났으며,
태어나 살고있던 부여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자라지 못하였고,
왕이 되기 위해 고초를 겪고 그로 인해 왕이 될 자격을 부여받은 것,
마지막으로 단신으로 부여를 떠날 때 세사람의 동행인이 있다는 것이 똑같다.
부자가 나란히 같은 유형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부자관계로 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마치 신라의 시조들이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명왕과는 별개의 인물인데 후대에 초기사를 정리하다 왕실계보정비로 부자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선 뭐라 말할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뒤에 좀 언급을 하겠지만,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유독 그의 아들들이 평탄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위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자.

유리가 부여에서 왕의 신표를 가지고 오자마자 동명왕은 죽는다.
동명왕에 의해 왕의 후계자임을 확인 받았으므로 그는 곧이어 왕이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동명왕이 복속시킨 송양왕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그러자 곧 왕비가 죽자 새 부인을 맞게 되는데 하나도 아닌 둘이다.
한 명은 고구려인으로 보이는 화희와 중국여자라는 치희.
이 두 여인의 싸움으로 이 노래가 불려지는 것이다.
왕비의 자리에 하나도 아닌 둘이 앉아 있으니 싸움이 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궁궐을 두 곳으로 지어 별거시켰지만
유리왕이 사냥을 나가 자리를 비운 틈에 화희가 치희의 심경을 건드린다.
천한 것이 무슨 왕비냐. 얼른 네 집으로 가라고.
치희는 짐싸들고 자기의 집으로 가 버리고,
이를 안 유리왕이 따라가 말리려고 했으나 그 여자는 뒤도 안돌아보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단다.
결국 돌아오려는데 꾀꼬리 두마리 정답게 지저귀는 것을 보고 한숨쉬며 지었다는 것이 위에 쓰여진 시다.
한 명은 떠났어도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외롭다니, 같이 할 사람이 없다니…….

그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홀어머니에게 자랐다.
그가 부여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설움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암살의 위협을 느껴 도망친 것이리만큼 그가 기를 펴고 살았을 리는 없다.
그가 추모의 아들임을 알았다면 정치적 탄압으로,
만약 모르고 살았다면 홀어머니의 자식으로 외로움 속에 살았을 것이다.
삶의 고난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의 재능을 갈고 닦은 것이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겼다는 신표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쓴 것이었다.
그가 고구려로 와서 추모의 아들임을 인정받았고 곧바로 왕이 되었다.
그야말로 애비 없는 자식에서 왕으로의 격상이다.
불행히도 그런 변화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정신분석의의 관찰보고서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으로는 황조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허무다.
그는 이방인이고, 경계인이다.
부여에서처럼 고구려에서도 그의 처지는 주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추모가 나라를 세웠다고 하나 그 곳은 원래 독자적인 정치체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추모도 그 땅에서는 이방인이었다.
비록 추모의 능력으로 고구려라는 나라로 바뀌었다고 하나 아직 옛날의 그림자를 지우기는 힘들었다.
추모는 영원한 결속의 표시로 소서노와 결혼해서 비류와 온조를 둔 것인데
(다른 기록에는 온조만 추모의 자식이거나, 둘 다 전남편의 자식이라고 한다)
전혀 자기들과는 연고가 없는 유리가 와서 갑자기 왕이 되니까 소서노와 온조, 비류 형제는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의 옛 동지들과도 의견충돌을 빚어 한 사람은 남쪽으로 떠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아버지의 신화로는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도 그가 빠져들 곳은 허무와 외로움이며,
그걸 잊기 위해서라도 부여잡을 것은 권력과 자신의 ‘사람’에 대한 집착이다.
허무와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집착할 수밖에 없고, 그럴 수록 마음은 더욱 황폐해진다.
아직 하나가 남은 상황에서 떠난 하나를 그렇게 그리워함은 무슨 심정에서 나온 일일까?
 혹 치희를 더 사랑했을까?
그래서 화희가 치희에게 상처를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유리왕이 치희를 더 사랑했기보다는 자신의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절망에 빠진 것이라고 본다.
본디 우군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생긴 ‘사람’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그 ‘사람’이 떠나게 되는 경우에 히스테리에 가까운 상황을 보이는 것은 고독한 자의 숙명이다.
스스로 그걸 깨지 못하고 자신만의 성에 숨어 웅크리고만 있기에 더욱더 ‘사람’에 절실한 것이리라.
다만 그런 그를 무너지지 않게 한 것은 왕으로서의 책임감이다.
고구려사에서 유리왕은 그런대로 좋은 왕, 아니 잘 다스린 왕이다.
아무 연고도 없던 곳에 고구려왕국의 기틀을 잘 다졌고,
초기에 주위와의 무의미한 충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쩌면 치희의 존재도 그런 정책의 한 반영이라고 보여진다.
당시의 왕실이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하였기에
유력한 세력들과 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자신의 힘에 보태는 식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에게 사랑으로 결혼한다는 말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나는 잠깐 왕자의 이야기를 했다.
왕자들의 부침이 뚜렷한 속에서도 유리왕의 아들들의 부침은 선명하기 그지없다.
핏빛이다. 아들들의 부침도 그의 허무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첫째왕자 도절은 인질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반항하였다가 그 몇 년 후 죽었다.
그 다음 아들 해명은 졸본에 남았다가 인근 황룡국과의 분쟁에 휘말려 자결형을 선고받고
꽃아놓은 창에 몸을 던지는 극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다.
셋째왕자 무휼은 부여사신을 쫓아내고 그 보복으로 부여군이 쳐들어올 때 선봉으로 막는다.
비록 이겼지만 그의 어린 나이를 볼 때 희생양으로 내몰렸던 것으로 보인다.
형들과 달리 살아남은 무휼은 다음 대무신왕이 되나 역시 아들 호동을 죽게 한다.
여진은 익사한 채로 발견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유리왕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무휼 다음의 왕이 된 해색주와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만 제 수명을 누렸다.
그가 죽음으로 내몰았든, 자식들이 스스로 불섶에 뛰어들었던 간에
자신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자식들이 먼저 죽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쩌면 자신의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조그만 일에도 실망하게 되고 분노만 커져간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권좌와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그를 항상 앞질러나가게 했을 것이다.
‘하나라도 있으면 족하다’가 아닌 모두 채워져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를 잃는 것은 슬픔이고,
어렵게 얻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야한다는 건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황조가는 서럽기만하다.

 - 己卯. 1. 11 초고 : 9. 5수정.

자꾸 옛날 글을 올려서 부끄럽습니다.
예전에 다른 필명으로 엣 시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이 글은 황조가를 주제로 쓴 4번째 꼭지글입니다.
그 이후에 삼국인이야기라고 한 열 편가량의 글을 쓰다 중단했습니다.
애착이 가던 글이었는데 쓰면서 돌아보니 모자란 게 너무 많았달까?
삼국사기 한 꼭지를 읽고 나면 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한 편씩 써보려고 합니다.
다음 글이 올라오면 001번, 그래서 이 글은 000번입니다.
단, 온달은 쓰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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