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33)
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갠적으로, 개機적으로 고려시대도 관료제의 외피를 쓴 귀족제 국가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관료제론은 학설사로서의 의의는 있겠으나(연구 질적으로 심화) 실제 연구에 있어서는 사료를 넘어선 가정에 불과하다. 고구려는, 고구마 대제국은 질서정연한 관료제와는 거리가 먼 형태다. 어지간하면 고대사의 변명거리인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 ~~을지도 모른다'를 쓸 여지도 없다. 수당에게 있어서 고구마는 돌궐을 제칠 수는 없겠으나 토번에 이어 악의 축에 들 정도의 중요도는 가진다.(위구르도 있지만 이건 고구려멸망 후의 문제라 여기선 뺀다)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병부 직방낭중 진대덕이 와서 정보를 살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의외로 병부 아래, 아니 6부 아래 4개의 담..
이따금 경주의 복원 CG라며 돌아다니는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룡사를 검색하면 빠짐 없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 출처를 얼마전에야 알았습니다. 2016년에 경주시에서 제작해 공개한 영상의 그림이었습니다. 어느 커뮤 게시판에 올라왔던 걸 추적하다 보니(거기도 출처는 없었거든요) 발견한 것인데 거기에 실린 댓글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대개는 이렇게 거대할 리 없다. 조선시대 한양도 이거보다 작고, 거긴 초가집도 많았는데 이 화면에선 전부 기와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과정이 너무 심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그 반응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 한양도 그리 대도시가 아닌데 천년 전의 도시가 더 크고 반짝반짝 할리 없다 생각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겼다는 "고려도경..
한때 고고학과 고대사 업계에서는 전파론이 강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진 문물이 저쪽에서 '하사'되어짐을 당하면 넙죽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혹시라도 지난세기 80년대를 풍미한 고대한일관계사 이야기를 접하신 적이 있다면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거의 삼국인들이 일본인들 턱 붙잡고 '아~해, 이 色姬야'하고 신문물 한 숫갈 입에 물렸다는 식의 관점. 그러나 문제는 중국과 우리로 무대를 바꾸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리 주장하다 80년대 한일고대사로 작게나마 복수하였다고 우겨보면 편하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을 중시하는 수용론이 쥬류가 되긴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고 좀 더 냉정하게 사안을 분석한다는 것..
340년대, 고국원왕은 선대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대외확장정책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5호16국시대라는 중국의 대혼란을 틈타서 낙랑・대방군을 몰아내고 요동군과도 치열하게 싸우고 성공을 거둔 아버지 미천왕과 달리 고국천왕은 강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전연이 환도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그러니까 미천왕의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남으로 창끝을 돌리면 어떨까?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던 곳에 비해 남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
http://rgm-79.tistory.com/714 이 글의 후속글이지 말입니다 2014년에 고대사 개설을 올린 이후로 시간이 지났습니다. 한글화일로만 만들던 것을 이번엔 인디자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글에서 궁국의 도를 깨달았으니(개뿔!) 이젠 다른 도를 얻어야겠다는, 그러니까 머리에 120mm 자쿠 머신건 쳐맞은 객기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내 어림으로 인한 과오라는 것을" 저번엔 관악과 신촌이 어지러이 섞였다고 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봉의산과 소양강의 콜라보에 불과하군요. 뭐, 대단한 걸 기대하셨을리는 없지만, 그럴꺼면 ISBN코드를 받았겠지. 아래는 지난 버전의 머리말을 살짝 고쳐 수록해봅니다. 졸립고 방전이라 더는 길게 못쓰겠네. 17. 04. 15 수정본으로 교체17. 0..
혼자 인디자인을 뚝딱거리며(고대사 책을 사는 대신 질러버린 인디자인 책들과 @@@, ###선생님께 꾸벅) 만든 교재의 일부입니다. 원래는 한글로 만들었다가 이번에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이걸로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표로 가득한 간략한 것이었는데 손을 대다보니 디자인은 물론 글도 다시 쓰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뭐라고 말을 쓸까.. 며칠 잠을 안잤더니 할 말이 없네여. 인디자인은 한글과는 다르고(란바 랄 : 한글과는 다르다! 한글과는!! 짐순이 : 이 종지온 우주빨갱이 닥쳐!!) 계속 손보고 있는 교재는 공지영을 문장가로 둔갑시킬 만큼 비문 투성이였고 하루 한 챕터를 만들면 매우 빠른 정도.(뭐 처음 만져보는 프로그램을 바로 뚝딱하면 연방군 개발부로 영전했지!!) 원래는 12장인데 고대사는 4.7장 분량..
문명의 개념, 도시와 국가의 관계 영어권에서 문명(civilziation)은 도시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도시는 대내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군사 등의 여러 측면에서 중심지 기능을 하며, 내부적 공간에 각각과 관련된 시설과 인구를 갖춘 공간을 일컫는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권력자가 거주하거나 권력기구가 구비된 궁정건축물, 경제적 측면에서는 근린 주변지역이나 원거리에서 유입된 물자가 저장되고, 유통되는 시장기반 그리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도시 자체는 물론 주변의 인구집단이 모여 종교적인 제의를 수행하는 시설 등이 갖추어져야 한다. 군사적으로 내부의 질서나 통제를 담당하고 대외적인 방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방어시설과 전사집단체제가 갖추어져야 한다. 또한 식량생산 이외에 수공업 제품이 생산되는 공장..
위진남북조시대의 의미 1. 위진남북조는 어떤 시기인가? ① 중국 역사상 후한(後漢)의 멸망부터 수(隋)의 재통일까지를 위진남북조시대(220~589)라고 통칭함. ② 중국에서의 ‘고대’사회였던 한이 멸망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무너짐으로 시작함. 앞선 시대인 진ㆍ한제국이 중국인 중심으로 유지되어온 반면,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북방의 호인들과 중국인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하면서 중국 역사의 새로운 흐름을 열어낸 시대.③ 한제국의 활발한 대외정복으로 북방의 여러 종족들이 중국 내지로 강제 이주당함. 이들의 존재를 중국의 중앙정부가 억제하지 못함에 따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단초를 제공함. 2. 위진남북조 시대의 변화 가. 삼국ㆍ위ㆍ진① 후한은 서기 184년의 황건적의 난으로 사실상 몰락. 권력은..
제목 거창하게 만드는 거 좋아하진 않은데(짐순이두 찌라시처럼 제목낚시 할 줄 알아염! 그저 싫어서 그럴뿐)뭐 암만 짱구를 굴려도 안떠오르네요. 그동안 지리나 지구과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해석 이야기를 종종 시도했었습니다.과거에도역사공부를 하려면 지구과학이나 지리공부도 잘해야..지리와 역사 2. 소백산맥의 빛과 그림자이런 글을 써왔으니 다시 이야기하면 동어반복, 자기 복제지요.그동안 짐순이는 나름 의기양양하게, 잘난척을 하고 있었어요.소백산맥, 서남해안에서 항해하기의 어려움을 떠들고선음, 전국의 19살 소녀들 중에선 짐순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재수업음 입자를 무한살포하고 있었지요. 어른들과는, 어느 정도 많이 돌아다니신 분들과의 대화는 좀 편해요.뭐라고 해도 다 알아들으시거든요.그러나 경험이 아직 부족..
이런 연구라하더라도 어느 정도 학문적 자율성이 주어진 상황에서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 결과라면 최소한의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북한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가 학문을 좌우하던 곳입니다. 다른 국가들이 당과 이론에 역사학을 맞추도록 강요하는 수준이었다면 부카니스탄은 아예 학설, 학문의 연구방향이 지도자에게 좌우되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숙청이라는 이름의 거세를 당하게 됩니다. 그냥 학계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학문적으로 잘 안팔리는 사람이 된다.. 정도가 아니라 정말 학계에서 추방, 또는 사회적으로 구축당한다는 겁니다. 사실 분단직후 남한보다 북한이 더 뛰어난 학자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인재들이 북한으로 자진해서 흘러들어갔죠. 특히나 사..
1990년대에는(짐순이가 호랑이 우유병 젖꼭지 빨던 시절) 북한의 연구성과가 물밀듯이 소개되었습니다. 북한의 공식 통사인 조선전사를 비롯, 박시형이나 김석형 등의 고전적인 연구서, 그리고 최신 자료들도 많이 나왔지요. 특히나 고고학과 고대사는 북한자료의 홍수가 매우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현장에 대한 감각은 커녕 그런 자료가 있었는가란 문제에 빠져 있었거든요. 신라나 백제사의 연구가 문자자료 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료의 개발과 함께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구려사연구는 1990년대 고구려 고분벽화의 소개, 그리고 직접 볼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고서야 타오를 수 있었지요.(그런게 그 시점이 지나 동북공정이 터져 너도나도 고구려사 새싹들의 양분을 앗아간 건 별개의 문제) 하여간 영인복사한 책들은 물론 정식 출판된..
며칠 전에 읽던 책의 서문에서 시대구분에 집착하느라..그러니까 시대구분 담론 놀이하다 정작 중요한 걸 빼먹었다는 식의 문장을 읽게되었습니다.좀전까진 고고학 책이었나 싶어 뒤졌는데지금 이 문장을 적다보니 중국사 책이었던 것 같네요.사실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소홀하게 다뤄지는 것 같아언젠가는 해야지 싶었는데마침 그 쪽 책을 전부(!) 읽어야할 일이 있어서 이 참에 생각을 정리하게 됩니다. 주의 : 보통은 일부만 재미 있는 글이지만 오늘 것은 그 일부에게도 재미없는 이야깁니다. 짐순이만의 짧은 생각일런지는 모르겠지만역사공부의 시작과 끝은 시대구분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각 혁사적 흐름의 전환과 이어지는 국면을 파악하고또, 각각 구별되는 그 시대만의 특성을 찾아내는 것.그런 것에 대한 이해로..
겐지모노가따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천황인 형의 비가 될 여인을 건드린 히카루 겐지는 그녀 아버지의 분노를 사서 먼 해안가로 알아서 귀양을 갑니다. (황후가 될 사람인데 다 된 밥에 콧물 투척한 셈이고 또 겐지는 정적 계열에 속했지요) 뭐, 거기 가서도 히카루 겐지로서 할 건 다 하지만 -_-;; 거기에 가는 과정이 매우 비장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가듯.. 네, 실제 상황에 따라서는 그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습니다. 겐지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소설 주인공이잖아요) 많은 이들이 그렇게 가면 잊히거든요. 고려 때만 해도 정과정곡 같은 노래가 있고 조선시대만 봐도 농암 이현보의 츤데레 같은 시조도 있고 (어디선가, '짐순인 이 분이 참 맘에 들어요.' 했더니 듣고 계시던 분이 '나, 그 분 후손..
요즘 일이 바빠 댓글 다는 거 외엔 방치플레이로 남겨두는 짐순이입니다. (원래 네뇬은 그런 플레이를 좋아하는 자라나는 새싹 변태였지..) 오래 전부터 한국사 개설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글로 쓰는 것과 한글 표로 만들어진 축약본 2가지 작업인데작년 말에 일단은 해방공간까지 1단계 작업은 끝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의 작업이 10년은 더 걸린다는 거죠. 요즘은 잠시(반년가량) 쉬고 고대사 부분만 다시 정리하고 있어요. (얘도 완성에는 최소한 5년은 걸리겠지) 암튼 그 중에서 축약본 일부를 추려 고대사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이미 준비된 거라 본 작업에는 알려두기 쓰는 10분 정도 소요되었죠) 아주 축약된 버전이라 그다지 친절한 것은 아닙니다. 또 짐순이의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가 있어서 정확성이나 개설로의 신..
신라사에서 소백산맥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매우 큽니다.우선 지도를 펴놓고 보면 딱 경상도지역을 빙 둘러 감싸는 형세를 보여주지요.신라 천년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이 산맥은 그야말로 요람과 족쇄, 두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했습니다. 기원전후로부터 3세기 무렵까지 한반도와 요동지역에는마치 가루를 부려놓은듯한 모습으로 작은 정치체들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다들 알고 있을 삼한의 소국들이 바로 그런 정치체인 것이죠.이런 정치체는 그러나 어느 정도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그야말로 정글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혼란 속에서 탄생과 멸망, 결합과 분열을 반복하였지요.(혹시라도 그런 소국들 흥망의 모습이 궁금하신분께는비록 아주 역사적으로 정밀하지도 않은데다 원소스가 야겜이지만애니 "칭송받는 자"가 도움이 되지 싶습니다. -_..
우선 이 지도를 봅시다.한반도에 국한해서 동쪽과 북쪽이 높은 것이 지형적 특색임을중학교 1학년 이상이면 다들 아는 이야깁니다.하다못해 지도의 푸른색은 평지,적갈색(짐순어로는 응가색)은 산지라고 초등학교 때 배웁니다.학교의 지리수업에서는 흔히들 동고서저라고 가르치지요.엄밀히 말하자면 동고서저 북고남저입니다.한반도를 케이크 자르듯하여 번호를 붙이면동쪽과 북쪽에 걸친 2번이 높습니다.그리고 서쪽과 남쪽에 걸친 3번이 가장 평야를 많이 가진 지역입니다.초3의 눈으로 보자면 농촌이 많달까.. .사실 이 동고서저 북고남저를 이해한다면한국지리의 반절을 먹고 들어가는 것이고 한국사에서 백제/신라의 발전속도 문제와영남 남인들의 분포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여기야 고대사블로그니 그 문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
80년대까지만해도 한일관계사를 바라보는 중심 시각은선진적인 한반도의 고대국가가 후진 일본에 문화를 전달해주었다는 겁니다.아니 일본이 우리보다 몇 수 아래에 있었던 상태라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뭐, 재야사학에 이르러서는 아예 우리가 그들을 지배했다는,적어도 매우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봅니다.그냥 왕인과 같은 이의 활약이 있었다고 보는 온건한 주장부터아예 식민지를 두고 지배했다는 (북한학자 김석형의) 극단론까지다양한 시각이 횡행했던 시댑니다. 또, 일본은 오래전부터 한반도로부터의 영향력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습니다.적어도 일본인의 국가의식이 성장하는 메이지시대 이후지배의 상태에 놓인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은지배의 정당성을 역사에서도 찾으려는 것과 충동했었으니까요.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
성곽이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한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뭐든지 처음부터 찬란한 건 없어요.(언젠가 써먹을 게 줄어들면 아껴둔 이 명제에 반하는 일 이야기를 할 껍니다만..지금은 거기까지 공부하기엔 짐순이의 귀차니즘은 숭고해욧!)처음부터 폼이나는 건 그다지 없었어요.오늘은 그 창세기랄까요.웅장한 성벽과 달리 창세기의 방어시설은 어떠하였는가를 이야기해봅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겐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습니다.애시당초 후대의 단단한 흙이나 돌, 그리고 벽돌로 쌓은 것과 달리창세기의 방어시설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아주 부서지기 쉽거나 썩기 쉽거나구조가 간단하고 엉성하여 역사의 풍화작용에 의해 사라졌거나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여기에 대한 정보를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요.한..
이번에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물론 역사학 분야에선 이 정도도 폭주다)거기에 동참하자면 쓸 거리야 무궁무진 하겠지만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쓰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문제이기도하고...하나 다뤄보고 싶은 것이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고이족이라는 주장이긴 한데동이족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어가야 하니 좀 엄두가 안난다.(사실 쓸 거리가 무궁무진한 블로그이긴 하나전문 포럼도 아니니 막상 쓸 수 있는 것이 많지도 않다.특히나 오프라인에서의 짐순이는 매우 까탈스럽게 쳐낸다.여기에 들어오는 대다수의 눈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가 항상 문제다)다만 좀 짧게 이야기를 해본다면, 특히나 번역된 사료랑 인터넷 하나로'나는 도를 깨달았다'라고 주장하고픈 얼간이들을 위해욕대신 좀 뭔가 도움이 되는 이..
어제쯤 올라가야 하는데 이래저래 문명2에 불이 붙어서 못했다는 진실만 적어둡니다. -_-;;그리고 바로 아래 글에 성벽이란 무엇인가라고 적어놨군요.한자만 틀리면 이상야릇한 의미가 되는뎁..본격 성교육 포스팅 지금 갑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의 존재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 시리즈를 시작해야 할 겁니다.과연 성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사실 이건 초등학생도 다 압니다.적이 쳐들어올 때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지요.어디 담벼락이론같은 것은 제쳐두고 나갑니다. 초딩들은 이거 안볼테니까.보통 성에 대한 안내와는 다른 포맷으로 가보는 거죠. 대체 뭔지 모르겠죠?저 위의 가로로 눕혀진 것은 성벽, 중간의 세로로 길게 늘어져.. 에잇! 다시 그리고 색깔을 입혀봅니다.(스케치북 프로를 간만에 사용했더니 뭐가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