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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오늘 서점에서 벙찌게 만든 책이 이건데, 그럴리도 없겠지만 누가 짐순이더러 이 책을 사거나 읽을 것을 강요한다면 360mm로켓포로 아다마를 날려버리겠다. 딱보기에도 조선전사3과 조선단대사5~7을 쓰까놓은 듯한 체제인데, 본문에 들어가는 지도가 거기 책의 지도를 오려서 붙였다. 인용으로서 넣은 거라면 어설프게 손 보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다. 짐순이두 복사본으로 가지고 있는 책인데 보는 것이 뭐가 문제냐. 특히 조선단대사는 교보에서도 팔았는데 말이다. 북한역사학이 보는 고구려사 소개라면 나쁘지 않다. 그런데 얼치기 레포트 쓰듯 편집하구선 마치 새로운 고구려사인양 내놓은 게 문제지. 정성껏 표로 정리하였으나 북한학계의 고구려 초기연대관을 그대로 실은 것은 좀 웃음이 나왔다. 이 책의 목표는 ‘우리 역사 바로 ..
오늘 아침에 고구려사 관련 두 건의 신문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조를 재해석한 기사,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대한 기사입니다. 두 건 다 학술대회에 발표되었거나 예정인 내용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 문제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젖먹이일적부터 다짐한 것이 광개토왕릉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관심을 끊자였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수정과의 잣 정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러 압에 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뭐 공부하면 되지 않겠나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광개토왕릉비는 베트남의 정글과도 같습니다. 발을 들이밀면 다시는 못나갈 것 같은 예감. 다만 빨리 교통정리가 되어 맘편하게 과실만 쪽쪽 빨고 싶을 뿐입니다.(교통정리가 될리가 있..
340년대, 고국원왕은 선대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대외확장정책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5호16국시대라는 중국의 대혼란을 틈타서 낙랑・대방군을 몰아내고 요동군과도 치열하게 싸우고 성공을 거둔 아버지 미천왕과 달리 고국천왕은 강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전연이 환도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그러니까 미천왕의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남으로 창끝을 돌리면 어떨까?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던 곳에 비해 남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
□ 일시 : 2017년 2월 23일(목), 13:00~18:00□ 장소 : 한성백제박물관 강당□ 주최 : 동북아역사재단/한성백제박물관 13:00~13:20 등록13:20~13:30 개회식사회 이정빈(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개회사: 김호섭(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환영사: 이인숙(한성백제박물관 관장) 사회 여호규(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13:30~14:00 벽화고분을 비롯한 고구려 주요 유적의 분포 현황과 최근 성과정동민(한국외대 강사)14:00~14:30 최근 북한지역 고분벽화의 발굴 성과정경일(중국 延邊大學 교수) 14:30~14:45 휴식 14:45~15:15 고구려 고분벽화와 중국 북조의 고분벽화박아림(숙명여대 교수) 15:15~15:45 고구려 고분벽화의 모사 복원고광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서용..
평소 지론이 안악 3호분의 벽화고분을 근거로 고구려 군사사 논문을 쓰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그림을 토대로 병종분석하고, 무장 검토하는 것은 오래전엔 자료부족으로 어쩔 수 없었으나 2010년대에 이거 하면 재떨이 맞기 딱좋다. 하야시 미나오의 화상석 책을 보면 딱 물고기들이 무기들고 용왕의 행차를 시위하는 그림도 있고(화상석 그림이니 당근 안악 3호분보다 오래전이다) 이게 원래 고구려 사람도 아닌 얼마전에 망명한 전연의 관료 동수의 무덤이니 고구려 물이 들면 얼마나 들었겠는가. 물론 부카니스탄의 위대한 친구들은 이걸 고국원왕의 무덤이라 주장한다 하더라. 근데 평양 앞도 뚫린 판에 황해도에 왕릉? 미쳤냐? 국내성에 묻혀서 고국원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 시조이래 하늘에서 내려왔고 내 즉위 정통성이 주몽이..
앞선 글에서 좀 길게 썼는데 이번엔 짧습니다.(저번 글보다는요!) 앞선 글의 마지막에서 고구려 관등에 대한 각기 상이한 기록 중에 어던 것을 취해야하는가 고민한다는 부분까지는 썼군요.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저번과 약간 다른 표 하나를 올려봅니다. 위서주서수서북사신당서한원삼국사기1알사대대로太大兄대대로대대로대대로대대로?2태사태대형대형태대형울절태대형태대형?3대형대형소형대형태대사자울절주부4소형소형대로소형조의두대형태부사자대상5 의후사의후사의후사대사자조의두대형위두대형6오졸오졸오졸대형대사자종대상7태대사자태대사자태대사자상위사자대형대형?8대사자대사자대사자제형발위사자소상9소사자소사자소사자소사자상위사자적상10욕사욕사욕사과절소형소형11예속예속예속선인제형제형12선인선인선인고추대가과절선인13욕살 부절조의14 선인 좀 더..
누군가 현기증이 난다며 다음 글을 재촉하는 댓글을 달 적에 짐순이는 늦은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졸음에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말이죠.(재촉하는 자에겐 양심의 가책을!!! 낄낄낄) 할 것은 많은데 정말 하기 싫은.. 그런 봄날 밤, 갑자기 떨어진 온도에 살짝 덜덜 떨며 '아직 잠들지 않았으므로 아직 오늘이야'라는 어느 락커의 라디오 멘트를 되뇌이며 글을 써볼까나여? 귀찮아서 번역은 한중연본 삼국사기의 것을 따다씁니다. 졸립고 귀차나여. 뿌우~~~. 원문高句麗人位 神文王六年 以高句麗人授京官 量本國官品授之 一吉飡本主簿 沙飡本大相 級飡本位頭大兄ㆍ從大相 奈麻本小相ㆍ狄相 大舍本小兄 舍知本諸兄 吉次本先人 烏知本自位 번역고구려인의 관등[高句麗人位] 신문왕 6년(686)에 고구려인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본국에서..
관등이라는 건 쉽게 말해 9급 공무원이냐 장차관급이냐, 총리급이냐 하는 식으로 해당 공무원의 지위를 나타냅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등급은 그 권한의 차이를 보여주죠.(물론 봉급도 차이납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위계는 중요하지만 고대에는 더욱 중요합니다. 바로 그 시대가 신분제 사회기 때문입니다. 돌쇠라는 사람을 가정해보죠. 거기에 그가 6급 공무원이라고 해둡시다. 그가 평민이나 천민같으면 절대 오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단순히 공무원 위계로 치면 1~5급보단 낮고 7~9급보단 높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하나가 더 붙죠. 만약 그가 신라 식으로 진골이라면 그냥 처음 임용된 직후에 받는 급수라고 해두죠. 아마 그는 꽤 젊은 나이일 겁니다. 만약 그가 6두품 정도의 신분이라면 평생 경력의 중간입니다. 앞으로 ..
사실 오늘 같이 이렇게 지나가는 글로 사용할 글감은 아닙니다. 책으로 치면 장 하나를 사용해서 이야기할 주제지요. 그러나 이 주제로 글을 써야지 맘 먹은지 1년이 지나고, 갈 수록 관심이 멀어지는 와중에 언제 쓰나 싶어 개략만 끄적거려볼까합니다.(지금 머리 맡에는 화랑에 대한 책이.. 다시 삼국사기의 화랑이야기 준비중임돠) 고대로 올라갈 수록 인구도 적고, 반면에 권력이 신적 권위에 더 많이 기대던 때라 후대 도시보다는 인위적이고 도식적인 면이 많습니다. 화약병기 도래 이후 전쟁사의 흐름은 병사들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는 것처럼, 후대로 내려올수록 인간의 거주 분포는 입체적입니다. 그런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인구도 적고, 인간의 자연개척 기술이 자연의 자체 수복력을 넘지 못할 때는 소수의 인간들이 좁은 공간..
9월 3일 문화재청 보도자료에 따르면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慶州 壺杅塚 出土 靑銅 ‘廣開土大王’銘 壺杅)가 보물 187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게 뭔가 하실 분들이 많아서 보도자료의 설명을 옮겨봅니다.(설명문 적기 귀찮은 것은 알려 하지 마라! 에이~ 우린 이미 다 알고 있당! -_-;;) 보물 제1878호「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慶州 壺杅塚 出土 靑銅 ‘廣開土大王’銘 壺杅)」는 1946년에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한 호우총(140호 고분, 노서동 213번지)에서 출토된 그릇이다. 규격은 높이 19.4cm 배 부분 지름 24cm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호우는 415년(고구려 장수왕 3)에 제작된 광개토대왕의 호우 10개 중 현존하는 ..
현재 대한민국은 과거의 망령을 고이 저승으로 돌려보내지 못해 산 사람이 사는 세상에 과거의 의지가 혼란을 던지는 꼴이랄까요. 사소하게는 개개인의 꼰대질부터 크게는 국가와 사회의 압축 퇴행의 모습까지.. 아, 그러니까 뭐 이렇게 질질끄나 싶을 정도의 문장을 쓰는 지금 어떻게든 화를 안내려고 비비꼬아 말하려는 짐순이의 마음을 아실라나요. 짐순이가 역사를 좋아한다고 해서 과거 짱짱이라고 주장하지 않음을 몇 번이라도 오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고대사를 공부하고, 그 중에서도 고구려사를 좀 많이 들여다 보지만 그 시절이 아름답다거나 이상적인 사회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을요. 마침 며칠 전에 한국사를 대표하는 명군의 목록에 광개토왕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 이런 글 쓴 저능아 色姬는 영구격리시켜야 한다고 길길이 날뛴..
얼마전까지 가재는 고통을 느끼는 통각기관이 없다고 알려졌습니다. 펄펄 끓는 물에 살아있는 가재를 넣는 요리가 너무 잔인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에 나온 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재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까요? 어디선가 나온 이야기에는 물에 집어 넣을 때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그게 가재의 비명이라고 합니다. 동물은 불쌍하니까 먹지 말자는 사람들도 서슴없이 먹어도 된다는 식물 조차도 베어지고 뽑혀질 때 특수한 호르몬을 방사해 주변의 동료들에게 위기를 알린다는데, 동물이라고 완전한 벙어리겠습니까? 그걸 우리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요즘에야 귀찮아서 언급도 안하고 있지만 여전히 고구려가 우리의 미래이고, 앞으로 나가야할 지향점이라고 나불나불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신경..
(우문술은) 이미 잦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믿었고, 또한 여러 의견에 몰려서 마침내 진군하였다.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으로부터 30리 떨어진 곳에다가 산에 의지하여 군영을 세웠다. 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보냈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꿰뚫었고지리地理를 다하였네.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만족할 줄 안다면 그치면 어떠할까!” 중문은 답서를 보내 을지문덕을 타일렀다.- 삼국사기 권44, 열전4 을지문덕전 이 부분은 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하여 수의 진영을 염탐한 후에 수의 30만 별동군을 더욱 깊이 끌어들이기 위해 무려 7번을 고의로 져준 후 평양성 이르기 직전에 수의 사령관 우중문에게 보낸 시를 이야기합니다. 국문학에선 초창기의 한시로 5언시의 형식을 갖추었지요. 황조가와 ..
어제 거의 좀비가 된 상태에서(뭐긴 뭐겠어요. 잠을 안잤으니..) 지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백제 동성왕 때 백제가 한강유역에 다시 들어갔느냐 아니냐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뭐, 그 것에 대한 논문을 보고 의문이 들었답니다. 이래저래 한 40분 가량을 그 문제에 대해 통화를 했지요. 이란 그 논문에서 나왔다는 영유와 점령의 기본 개념, 그리고 한성 함락 후 백제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 개괄.. 고고학이야 담을 쌓고 사는지라.. (생각해보니 짐순이 주변엔 고고학자들이 고대사 하는 사람들보다 몇 배 많습니다.. -_-;;)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분명 한강 이남에 고구려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 백제의 흔적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론 기록만 놓고 보면 500년이니 아예 안보인다는 것이 더 이상합..
지난 달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머리를 아프게 해서 이래저래 책을 볼 여유가 없더라구요. 연료가 안들어가니 글도 안나오고 또 그럴 맘도 안되고.. . 그 와중에도 딱 하나 읽고 있는 게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소개한 기상청의 고대 기상 자료집입니다. 자료안내 - 한국 기상기록집① -삼국사기ㆍ삼국유사로 본 기상ㆍ천문ㆍ지진 기록 김양의 글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하나 건진 게 있어 아예 자료집을 처음부터 읽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 건진 한 토막의 글로 다시 삼국사기 읽기의 발동을 걸어볼라 합니다. 다만 원문과 해석은 자료집의 것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1. 신라 파사 이사금 29夏五月 大水 民飢 여름 5월에 큰물이 나서 백성이 굶주렸다. 2. 고구려 태조왕 56春 大旱 至夏赤地 民饑..
며칠 전에 아는 중딩과 이야기를 하다가 살수대첩을 수공으로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다는 겁니다. 엥? 마침 교과서를 가지고 있길래 한번 펴보자고 했더니 그런 얘긴 없어요.(교과서에는 없어!) 다시 물어보니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누나가 공부해봐서 아는데 그거 틀린 거임"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좀 오래전에 그렇게 친절하진 않지만 여기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긴 합니다.살수대첩에서 수공하지 않은 것은 알기 싫냐?아무래도 짐순이가 건축이나 물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그렇게 구체적인 논증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읽어보니 손대야할 것 투성이네요.(혹시? 짐순이는 글감이 떨어질 것을 대비, 개판으로 쓴 건 아닐까? 에이~ 그럴리가... 연방군의 양..
제목 거창하게 만드는 거 좋아하진 않은데(짐순이두 찌라시처럼 제목낚시 할 줄 알아염! 그저 싫어서 그럴뿐)뭐 암만 짱구를 굴려도 안떠오르네요. 그동안 지리나 지구과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해석 이야기를 종종 시도했었습니다.과거에도역사공부를 하려면 지구과학이나 지리공부도 잘해야..지리와 역사 2. 소백산맥의 빛과 그림자이런 글을 써왔으니 다시 이야기하면 동어반복, 자기 복제지요.그동안 짐순이는 나름 의기양양하게, 잘난척을 하고 있었어요.소백산맥, 서남해안에서 항해하기의 어려움을 떠들고선음, 전국의 19살 소녀들 중에선 짐순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재수업음 입자를 무한살포하고 있었지요. 어른들과는, 어느 정도 많이 돌아다니신 분들과의 대화는 좀 편해요.뭐라고 해도 다 알아들으시거든요.그러나 경험이 아직 부족..
원문七年 …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해석7년 가을 9월에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군세를) 옮겨 백암성을 공격하니 왕은 장군 고흘을 보내어 1만 명을 이끌게 하였다. 막아 무찌르니 죽여 얻은 적의 수급이 1천여 개였다. 547년에 신성과 백암성의 방어시설을 재정비한 이야기는 한참 전에 했습니다. 과연 그로부터 4년 후인 551년에 북방의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과 백암성을 각각 공격하고 있었지요. 짐순이는 고구려의 6세기를 매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전반기의 치열한 정치적 혼란, 그리고 후반기의 급변하는 국제정세, 그리고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할 온달까지.. 앞시대와 뒷 시대만큼은 아니어도 주목할만한 가치가 ..
원문 三年秋七月 攺築白巖城 葺新城 해석 3년(547) 가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하였다. 양원왕은 고구려사에서 그렇게 많이 불려지는 이름은 아닙니다. 앞 시대는 광개토, 장수왕(덩달아 그의 손자 문자명왕)이 있고, 그의 다음대에는 온달과 평강공주로 알려진 평원왕, 그리고 국제전과 멸망기의 3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이 한국사 능력시험을 보는 이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지요. 6세기 전반부의 왕들은 그야말로 공기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더욱이 고구려사의 연구논문도 이 시대를 다루는 것은 매우 적습니다. 이 시대를 다루는 논문을 쓰려던 사람이 매우 중요한 논문을 쓰신 다른 선생님에게 '그 시대를 전공하려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뭐, 그런 대접을 받는 시대의 이야..
원문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해석 5년(375)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또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이다. 한국고대사에서 불교의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태학설립과 율령의 반포/관제정비와 동급의, 어쩌면 그 이상가는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이전의 일반적인 사상적 흐름은 그야말로 범신론이었죠.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부 신비로운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습니다. 산에는 산신이 있고, 강에는 강의 신, 동물과 초목, 바위, 당시로서는 규명되지 않은 모든 자연현상이 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겨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