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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관등이라는 건 쉽게 말해 9급 공무원이냐 장차관급이냐, 총리급이냐 하는 식으로 해당 공무원의 지위를 나타냅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등급은 그 권한의 차이를 보여주죠.(물론 봉급도 차이납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위계는 중요하지만 고대에는 더욱 중요합니다. 바로 그 시대가 신분제 사회기 때문입니다. 돌쇠라는 사람을 가정해보죠. 거기에 그가 6급 공무원이라고 해둡시다. 그가 평민이나 천민같으면 절대 오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단순히 공무원 위계로 치면 1~5급보단 낮고 7~9급보단 높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하나가 더 붙죠. 만약 그가 신라 식으로 진골이라면 그냥 처음 임용된 직후에 받는 급수라고 해두죠. 아마 그는 꽤 젊은 나이일 겁니다. 만약 그가 6두품 정도의 신분이라면 평생 경력의 중간입니다. 앞으로 ..
서울신문 - 온달장군과 아차산성 뭘 뒤지다보니 하나 걸리는 글이 있더군요.온달이 어디에서 죽었느냐에 대해서서울시 광진구와 충북 단양군의 의견이 매우 다릅니다.지자체에서 고구려 걸고 넘어지는 역사는 꽤 되었지요.언젠가 화제가 되었던 고구려유겐트 사건은 그런 분위기의 가장 극단적인 표출이었습니다.지자체 출범 이후 내고장 현창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다 보니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을 부각해서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각 지자체의 뻘짓이 텍사스 벌판의 버팔로가 몰려오듯.. 그랬습니다.그나마 요즘은 역사인물을 통한 관광상품 유행이 지났지요.뭐 그런 역사인물 현창사업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단양군입니다.단양에서 벌이는 온달문화축제는 자리를 잡은 극소수의 성공작입니다. (뭐 단양군의 사업은 그 역사적 여부를 떠나 순수 지방 축제..
"온달과 온군해는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지배선 선생님이라면 모용씨의 연만 가지고 평생을 파신 분입니다.특히 국내에 몇 분 되지 않던 위진남북조시대 전공자시기도 합니다.(요즘은 좀 늘어난 것 같군요)이분의 연구는 4~5세기 고구려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아무래도 미천왕대부터 장수왕대까지 전연~북연까지 이르는 이 국가군國家群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나중에는 고선지에 대한 연구성과도 남겨주셨지요.특히 이 분야에 대한 책은 거의 없던 상황에서 매우 귀한 가치를 갖습니다.(당장 떠오르는 다른 자료래야 룩 콴텐의 유목민족제국사-민음사, 대우학술총서-에서 약간,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이산, 2001- 정도?)다만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란 괴랄한 결론의 책도 있습니다만(탈..
공주랑 결혼한 온달을 어떻게 볼거냐를 가지고 약간이기는 하지만여러 의견들이 있었습니다.하급귀족일 것이라는 설부터, 신진세력의 성장을 보여준다는 설 등이 있지요.온달이 6세기 후반 고구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생각은 각기 의견이 다른 분들 사이에서도 공통점입니다.(사실, 6세기에 이 정도의 소스가 나오는 고구려인 자체가 없습니다;;) 공주와 결혼하기 전이야 꽤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 같은데정작 그가 어떤 신분인지는 명확한 게 없습니다.그래서 그가 왕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 나오는 관등이 대형에 주목해봅니다. 가장 마지막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신당서 고려전이나 한원 고려조에 따르면대형관등은 7등입니다.한원기록을 따르면 14관등 중 7등이니 딱 중간입니다.(이건 당의 침공 직전 고구려를 방문한..
이제 공주의 내조가 빛을 볼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 원문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 번역문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 삼월 삼일에 낙랑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여 멧돼지와 사슴을 잡았다. (그것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를 올렸다. 그 날에 이르러 왕은 사냥에 나서 군신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랐다. 이에 온달도 길렀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다. 그 치고 나감이 항상 앞에 있으니 사로잡은 것이 또한 많았다. 수서 고려전에 따르면 '매해 봄과 가을에 교외에서 사냥대회다 열리니 왕은 친히 참석한다'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때의 삼짓날 사냥대회는 거국적인 행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수렵대회..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요즘 정신없이 돌아다니다보니 집에 들어오면 머리가 멍해져서 아무 것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추석연휴에는 종일 드러누워 있었으니 그것을 한탄하는 아내가 없음이 다행이고, 그를 달래기 위해 백결선생처럼 거문고를 뜯어야 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온달과 같이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공주에겐 한가할 여유조차 없군요. - 원문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資用完具 初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 번역문 이에 금팔찌를 팔아 땅과 집, 노비, 소와 말, 가재도구를 사니 살림살이가 장만되었다. 처음에 말을 사려할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시정상인의 말은 절대 사지 마세요. 반드시 국마로 병들고 파리해서 내..
아주 오래간만에 이 블로그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여행후기를 더는 안쓰겠다는 것은 아니지요. 어찌되었든 이야기는 다시 이어갑니다. - 원문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 번역문 공주는 홀로 돌아와 싸리문 아래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온달)모자와 더불어 자세히 말하였는데, 온달은 마음이 정해지지 않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온달의 모친이 말하기를, "우리 자식은 지극히 천하니 귀인의 배필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하니 그런 고로 귀인이 머물만한 곳이 못됩니다"라 하였다. (그러자..
공주와 온달의 첫 만남은 아름답지도, 유쾌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자식들 앞에서 머리끄덩이를 잡혀도 할 말 없는 온달. 어찌보면 마누라 잘 만났다고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용케 결혼했구나 하는 심정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 원문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 번역문 공주는 (집에서) 나와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품었던 속내를 말하니 온달이 발끈하여 "여기는 어린 여자가 마땅히 올 곳이 아닌데(나타나니), 필히 사람이 아니고 (사람을 후리는) 여우귀신이구나. (너는) 나를 괴롭히지 말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지난 글에서는 나무 껍질이라고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