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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금 서예에 쓰는 붓의 모양은 자루는 가늘고 붓모는 풍성한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초창기, 그러니까 문사사용의 이른 시기의 붓은 지금 서예용 붓보다는 이 붓펜에 더 가깝다. 붓 자루에 비해 붓모가 매우 가늘고 얇다. 자루를 뛰어넘은 현대의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선진과 진,한대의 붓 끝은 끝이 뭉툭하나 끝으로 갈 수록 좁은 모양을 하는데, 현재처럼 붓 뚜껑도 없고, 달리 필통같은 것이 없을 때, 머리에 비녀처럼 꽃고 돌아다니는 용도로 디자인된 것이다.(종종, 펜을 저렇게 꽃아쓰고 다녔는데... 아~! 짐순이의 1회차는 선진과 진,한 어드메에 위치하는 것이란 말이냐!) 붓의 길이는 보통 23cm 내외 당시 한대의 1척을 기준으로 규격화되었다. 창원 다호리나 김해에서 출토된 붓도 이 길이 규격에서 크게 벗어..
글쎄요. 그런 점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근대사학이라면 일제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서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이른바 실증사학이라는 학풍이 사학연구의 기조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사학의 성립이랄가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과정이고 필연의 추세였다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엄밀한 사료의 비판을 통해서 정확한 고증을 거쳐 ‘과거의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다’는 그러한 견지에 서는 것이 역사학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역사해석이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테두리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 권선징악적인 견지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있었던 것입 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미 ‘크로체’이후로..
페북에는 마침, 강감찬이나 이순신을 꽤나 오랜기간 다루는 페친들이 있다. 그 분들 정도는 아시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요즘으로 치면 군단장에게 ~~소령이라 부르는 식. 강감찬은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까지 지낸 사람이고, 애초에 문과급제자다.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인 문벌귀족과 조선의 양반이 뭐가 다르냐 다같은 귀족이 아니냐고 하는데, 이는 한국사람보고 중국인이라고 하거나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기술관료적 성격도 강하게 가지는 조선 문관(동반)과 달리 고려 시대 귀족은, 그것도 초기쪽으록 가면 전란기 호족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애초에 강감찬은 한강 이남 최대 호족) 한 지역의 왕초고, 또 국가의 거물이니 당연히 힘쓸 줄도 알아야 했..
한번 상상해보자. 1970년대 효창공원, 혹은 1980년대에 독립기념관 앞에서 일본 총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대해 사죄하는 장면을. 천황은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통석의 념같은 두루뭉실한 단어 대신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장면을. 누가 총리였던 간에 그 장면은 브란트의 사과 만큼이나 울림이 컸을 것이다. 적어도 몇몇 빌어먹을, 얼어죽을 이들이 말하는 과거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표현은 지금보다 더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에 대해선 진지하게 사과를 한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않고,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 참의원과 중의원에서 약간이나마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을 가..
예전에 어느 디자이너 였나, 그 많은 공순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란 글을 쓴 것을 읽었다. 그 글에서 매우 인상 깊었던 부분은 패션 디자인 산업의 완성을 숙련공에게서 찾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영감을 가진 디자이너가 있어도 그의 생각을 미세한 부분까지 구현해내줄 이가 없으면 그 생각은 스케치에 머물고 만다. 마치 마치 다 빈치의 구상을 당대 기술이 구현해내지 못한 것처럼. 그래도 저 바닥에도 시스템이라는 것이 어떤 건가를 생각하는 분은 계시는구나하고 절로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그 민망한 연구보고서같은 소리는 아니지 않나. 전태일이 사라지고도 한동안은, 아니 80년대말까지도 평화시장의 아이들은 주택가 지하실에 작은 재단용 책상, 미싱 두어개(삼봉, 본봉, 오바르꼬)만 있어도 적당히 먹고 살 수 있었다..
일본 'G7 확대해 한국 참가시키는 것에 반대' 표명 이게 일본과 일본에 경도된 미국 조야의 시각이다. 얼마 전에 에드워드 루트왁(종종 그의 책-전략-을 추천하기도 했는데)도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에 기울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지들 딴에는 종놈이었던 놈이 겸상하자고 들이미는 꼴이라 기분이 열라 둏진 않을 것이고, 실무적으로 봐도 저렇게 갈 경우 위화단 사건 이후 미국과 가져온 아시아 문제의 대리인으로서의 지위가 위협받는다. 예전에야 그렇담 우리는 군비확장으로 타개한다는 옵션이 있었으나 평화헌법은 그걸 막는다. 그렇다면 결국 가장 유효한 수단은 뒷담화였으나 이젠 그거 약발이 떨어지니 당당히 앞에서 하는 것.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한국전으로 일본이 발전한 게 아니라 회생의 기회를 잡은 ..
전근대 시대에 대한 오해 중에 정말 이가 갈리도록 고쳐지지 않는 것을 들라면 단연 외교에 대한 개념이다. 학계조차 아직도 대외관계의 여러 모습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만 대중의 오해는 그야말로 곰이 성형외과에 갔더니 미녀가 되어 나왔다는 수준의 믿음이다. 전근대 왕조, 특히 조선은 민족주체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없이 외세에 납작 엎드린 것으로 인식하게 일쑤다. 그냥 사대와 모화의 개념도 없이 그냥 배꼽을 보여주는 시골 강아지 보듯 한다. 한 번 물어보자. 중국에 가장 많은 사신을 보낸 왕은 누굴까? 정답은 고구려의 장수왕이다. 1년에 두 번, 세번 가는 것도 아니라 무려 1년에 네 번씩이나 한 두해도 아니고 그 "긴 치세"(오죽하면 아들이 기다리다 먼저 죽고 손자가 즉위할 정도)내내 그..
※ 일단 이 이야기는 예전에 쓴 글 "역사적 맥락, 사회적 경제"의 후속글이다. 그리고 벼멸구같은 놈들을 위해 쓰는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읽겠지. 쩝.. 요즘 한일관계의 악화로 인해 징용공이나 종군위안부(일본군 성노예)라는 단어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전자는 이번 관계악회의 도화선이 되었고, 후자는 한국의 일부 학자들(라고 자칭하는 …… .)이 그 존재를 부정해서다. 그 논지의 역겹냐 아니냐를 떠나서 한 번 화끈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때가 되었다. 그 부분이야 현대사를 다루는 분들이 더 잘할 문제니 그 사실과 관련한 역사적 맥락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20세기 중반의 사건을 왜 21세기에 이야기하는가어떤 이들은 왜 이제와서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느냐고 말하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
오늘은 고대사대신 근현대사, 또는 세계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뭐, 맨날 부식옵하 이야기만 지겹지 않습니까?) 일단, 짐순이가 살고 있는 춘천을 무대로 한정해봅니다. 요즘은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사회적경제라는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인연이 있는데 이 분들과의 대화에서 떠오른 생각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욕하는 것이 아니니 초장부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춘천에서 사회적경제라는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아직 춘천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강원도 영서에서 춘천과 묘한 경쟁관계를 구축중인 원주는 한국 사회적경제의 성지같은 곳이고, 또 새롭게(아니 이제 고인물인가?) 충남 홍성같은 곳이 대두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협동조합 교육으로 원..
아주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현대사 인물연구에서 가장 골머리를 섞을 사람은 백선엽이 될꺼다. 이승만이야 앞으로 일부 매니아와 연구자들만 아는 수준의 이야기가 널리 퍼질 수록 이승만의 공은 줄어들 수 밖에 없으며(독립운동? 인간뻐꾸기라는 표현이 이보다 걸맞는 놈이 있을소냐), 김구도 흑역사는 요즘 영화화한 사건과 임정의 한계, 해방공간 등 여러개가 있긴 하나 공이 너무 크다. 테러로 퉁치려는 이들도 있지만 김구의 활동에 민간인을 겨냥한 무차별 공격이 있었느냐만 따지면 된다. 문제는 백선엽이다. 특히 간도특설대에 몸담았으므로 친일부역자명단에서 빠지기는 어렵다. 그가 임관했을 때는 팔로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던 시기라는 이야기는 그쪽 연구자들이 해결할 문제다. 다만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제..
아침에 페북에서 아파트 이야기로 신분제 이야기를 했는데 뭐 이런 거 우리나라에만, 우리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에 한식산이 유행할 적에 이것을 구입해서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왕가나 공경귀족 밖에 없었다. 중금속 덩어리인 이 약을 먹으면 체온이 급격히 오르고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인다. 그 때 사람들은 이것이 신선으로 가는 트랜스 과정이라 착각했다. 중국 고대문명이 야만족들에게 아작나고 축축한 땅으로 도망오니 신선세계로 도피하고플 정도로 멘붕 온거지. 죽림칠현이 옷을 훌러덩 벗고 다니거나 부모 상에도 곡을 못한 건 아 이 약의 부작용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참다못해 곡을 하고 피를 한사발 쏟았다. 문학하는 술꾼들이 종종 인용하는 위진시대 초기 시인들도 술 없이 못산 이유가 다 이거..
일단 전제조건으로 말해야 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에게 일본은 매우 중요한 나라다. 일단 미국이 동북아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나라기도 하고, 더 오랜 연고의 필리핀과 달리 나름 열강 나와바리 안에 들었다. 의화단 사건 이후 2차대전을 제외한 기간 내내 일본은 미국의 중요한 동아시아 파트너로 자리 잡았단 말이다. 만약 한국과 일본이 미국보고 우리 둘 중의 누가 더 좋아라고 물으면 10000번이면 9999.9번 일본 좋아를 택한다는 말이다. 최소한 2차대전이나 80년대 일본의 경제적 침략(?) 같은 시점만 아니면 미국은 일본을 손댈 일이 없다. 1. 일본의 군대소유에 대한 미국 입장자위대, 농담삼아 마스터베이션 가드라고 부르지만 객관적으로는 어지간한 국가의 군대는 찜쪄먹을 수준은 된다. 2차..
이미 식어버린 이야기에 늦게나마 숫가락을 얹는 것은 예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기 때문일게다. http://rgm-79.tistory.com/712 그때나 지금이나 기본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다. 역사를 재미나게 만들어 이야기하는 사람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사라는 학문의 특성상 정확한 면이 필수로 따라와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글은 여전히 방패질하기 바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1. 모두 그렇게 가르치던데요? 그래, 10억 넘는 중국인들의 학교에서 고구려는 듕궉 꺼라고 가르치면 걔들 선생이 우리보다 더 많을테니(인구 800만의 시안-장안-시 인구가 적다는 나란데?) 그 말이 진리가 되겠구나. 니놈들 말대로라면. 일단 그 시험 문제 출제하는 사람이 학계의 정설이 아니라 자기만의..
오전 중에 방명록의 글을 읽고 비몽사몽중(눼, 연방의 MS는 시동을 걸면 한참 후에야 정상가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전투로 인해 손상이 많이 가서요)에 글을 적다보니 적절하지 않은 건성건성한 글로 예의에 어긋난 것 같아 밤이 되어서야 이렇게 적어봅니다. 원래는 방명록의 글을 옮기려 하였으니 비밀글이라 그 대답만 좀 더 풀어서 적어볼까 합니다.(눼, 스텔스 모드로 하신 건 매우 잘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어디나 지온군의 정찰기들이 득실득실하니까요)질문을 해주신 분은 아주 간략한 정보만을 주셨으므로 19살 어린 나이로는 명쾌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만 그래도 어르신(?)의 고민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대학원에 가려고 하는데 고민 중이라 하셨습니다. 일단은 앞으로 먹고사는 문제겠지요. 또 내..
캠프 짐순-집에서는 보통 아무것도 안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인지라 일전에 책상을 옮기면서 새로운 곳에 전진기지를 차렸다. 무작정 책을 쌓을 수는 없는 공간이라 일단 주제를 한정한 게 고대사(+한국사) 개설서,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한 사료집, 시대구분론, 7세기 전쟁의 딱 네종류. 뭐 책이름 줄줄 나올 사람들이 보면 책을 많이 안놓을 거라는 의지를 느끼겠지.(다시 옮길 일이 있으면 혼자 개고생이니까.. 책이 상할까봐 보통 쓰는 방식으론 안한다) 진단학회 "한국사" 고대편부터 일전에 나온 한역연의 한국고대사까지 가짓수가 많아졌다. 얼마전에 선생님과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한국사강좌" 고대편을 슬쩍 디스하며 요즘엔 볼 개설서가 업쪄.. 이랬는데 알고보면 나온 건 많았다. 지금 쓸만한 책이 없어서 문제였지.(그..
※ 표면적으로는 애니얘기지만 또 그것만은 아니라 여기에 적게 됨을 미리 밝힌다. 이번 분기 신작들도 나쁘지 않다. 다만 보는 편수가 대폭 줄었다. 의욕과 시간이 없음에 따라 어중간한 작품은 통과! 또 유달리 취향을 거스르는 놈도 많고, 이런저런 기준이 좀 더 빡빡해진 거지만.. . 대유년은 아니어도 유년(풍년)은 되는 지라 최고의 작품을 고르라면 좀 애매한데 며칠 전까지는 "작열의 탁구소녀"였다가 지금은 "배를 엮다"로 넘어간 상태다. 꽤나 지루한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그보다 더 지독한 사전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교토대에서 옹정제의 문서를 수십년간 역주하는 와중에 누가 그랬던가 문서는 너무 많고 진도도 안나가 지루하다고. 그때 또 다른 누군가 "이것이 학문이다"라고 했다한다. 정말 수십년에 ..
얼마 전에 누가 "설민석이 역사전문가 잖아요"란 말을 들었다. 거기에 화를 내지 않은 것은 어쨋거나 그가 역사로 밥먹고 사는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말한 사람의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한국엔 수백만을 넘는 19살 이하가 삽니다. 나름진지 ON!) 전공자가 뭔지를 모르니까 걍 넘어갔다. 물론 권위자란 의미로 사용한 거겠지.. 사실 사람들앞에서 말하다보면 누구든 실수는 하게 되어 있고, 또 말빨이 생긴다거나 임계점을 넘으면 아드레날린의 과다 분비 한다.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쯤 될까? 나름 진지하게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도 그런 실수가 생기는데 그들에게 정밀도를 요구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1타 내지는 그 등급의 강사로 올려놓은 교재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건 빼고 말이다...
브랙시트인지 뭔지에 대해 한 마디 건들자면 쌤통이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이제 니들도 제대로 망할 때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항상 대륙과는 엇박자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대륙의 연합에서 발빼고 싶은 것은 꽤나 그럴듯하다. 그로부터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주로 이긴) 되새김질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근대의 복잡한 외교사에 한정짓지 않아도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영국은 꽤나 괴랄한 길을 갈뻔했다. 그랬으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절에 개박살이 난 건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었겠다 싶을 정도. 하여간 대륙과는 다르다! 대륙과는!!..유전자가 그들에게 내재되고 유전된 것이다. 역사적 맥락의 배경은 그렇다. 하여간 어느 해인가 영국의 외무장관이 현재(21세기 초) 국제분쟁의 80%는 우리탓이다란 발언을 했을 ..
나름 글을 쓴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건 이 블로그의 거친 글이다.(그렇다고 나머지 글이 또 정연하진 않아) 대다수는 보여주지 않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다. 지금 쓰는 것은 안풀릴 때는 원고지 30매를 4달 걸려 쓰기도 하고, 딱 (b5 사이즈로 놓고 글을 쓴다) 세 줄 고치는데 책을 다섯권을 펼쳐 놓기도 하고, 딱 한 줄 쓰느라 책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작업 중인 하나는 10년 잡고, 또 하나는 쓰다가 늘 그렇듯 짐순이 선에서 폐기할 지도 모른다. 참 전업으로 글을 썼다면 "스무살까진 살고 싶어요"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헐 19살인뎁) 대단한 사람도 아닌 짐순이조차 글을 쓰는게 매우 조심스럽다. 사실 아무렇게나 쓰자면 원고 30매는 두어시간이면 쓰는 글이다. 그럼에도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으련만,..
한참 주구장창 떠들다가 요 몇년간 귀찮아서 안하는 이야기 한 번 해보죠. 역사는 모두가 상세하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요? 과연 일반인이 알아야 하는 것은 어디까집니까? 필수상식과 교양의 경계는 어디입니까? 짐순이는 모두다 역사에 대해 해박해야하는가, 역사공부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싫어합니다. 한동안은 만나면 역사를 잘 몰라서 죄송하다는 어른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때 든 생각은 왜 미안해하지 였지요. 역사를 많이 알면 지혜도 얻을 수 있고, 교양도 엄청 쌓이죠. 그러나 몰랐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자기 일이라면 나름 전문성도 갖춘 사람들이요.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오용되는 말이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죠. 다시 말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 눈이 넓어지죠. 그러나 그게 꼭 모르고 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