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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475년의 파국에 대해서 대개는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는,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수도를 잃었다, 왕이 죽임을 당했다, 그 정도면 꽤 아팠겠다 싶은 인상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475년 한성 함락은 백제인들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건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사실 실상을 알고나면 어느 정도는 공감가는 일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고민 거리 중 하나가 지방소멸, 수도권의 비대화입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아예 머리가 8, 몸이 2인 상황입니다. 수도에 모든 것이 몰려 있는 정도가 극단적으로 심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을 보여주면 서울은 아예 식물인간 수준이 아니냐고 할껍..
짐순이가 여기에 글을 쓰는 동안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적게 했지요. 백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안들러주신 것인지 불만접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고대사 공부를 백제사로부터 시작한 것 치곤 그동안 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초기 국가 형성사에서 백제부분은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자료가 전해의 이야기를 고물로 만들어버리니, 국가형성사에 약한 짐순이는 더더욱 안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여기에 글을 남기지 않는 동안 백제 초기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원문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해석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한 이래 문자로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기록함이 있었다/처음으로 "서기"를..
아마 다음 주나 다다음 주의 글에서는 이 싸움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귀산전에서는 그저 귀산과 추항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이 싸움은 삼국시대 후반의 정치사를 이리저리 꼬아버릴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때 얘기~! 원문百濟敗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해석백제군이 (싸움에) 져서 천산의 못가로 물러나며 복병을 숨겨서 대기시켰다. 아군이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물러나는데 그때 무은은 후위가 되어 군의 뒤에 섰다. 복병이 나타나 갈고리로 떨어뜨렸다. 약간 미리 역사적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이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백제가 졌습니다. 그야말로 백제군은 전멸을 당했지요. 앞서 554년의 관산성 전투의 대참패에..
삼국사기 읽기의 초창기 글을 보면 원문의 양이 매우 적습니다. 짐순이나 여러분이나 수준이 올라간 것은 아닐텐데(혹시라도 계실지 모를 분들에게 사과해!!) 이렇게 늘어나는 건, 요즘 끊기가 참 힘들다는 것이죠. 마치 변비환자 화장실에서 명상하듯 뭔가 길어집니다. 원문眞平王建福十九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城 王使將軍波珍千乾品・武梨屈・伊梨伐 級干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箒項 並以少監赴焉 해석진평왕 건복 19년 임술, 가을 8월에 백제는 대병을 일으켜 아막성을 포위했다. 왕은 장군인 파진간 건품・무리굴・이리벌, 급간 무은・비리야 등에게 병력을 주어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도 소감으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602년의 가을, 신라가 소타성, 외석성, 천산성, 옹잠성 등 4개의 성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전..
예전에 부여박물관의 상설전시실 개편과 관련된 전시를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전시안내] 국립부여박물관 - '한 눈에 보는 사비 백제'전그 작업이 완료되어 새로운 전시를 열었습니다.일시 : 2014. 9. 25 ~ 11. 30장소 : 국립부여박물관 기획전시실링크 : 국립부여박물관 안내 페이지그 동안 소개를 안한 건 중박 홈페이지에 안올라왔었다는 거죠.포스터는 춘천에서 봤는데 오늘까지도 올라오지 않아서이걸 하는 걸까 안하는 걸까.. 확인하기도 어렵고..이러다 생각해보니.. 웅..부여박물관 홈페이지 들어가면 되잖아!!!!!눼, 짐순이는 바보였습니다. 홈페이지의 안내는 대략 이렇습니다. 사비도읍기의 백제권역에서는 중국에서 수입된 도자기와 중국문물의 영향을 받아 백제의 형식으로 제작된 박산향로와 호자, 신라식의 허..
어제 거의 좀비가 된 상태에서(뭐긴 뭐겠어요. 잠을 안잤으니..) 지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백제 동성왕 때 백제가 한강유역에 다시 들어갔느냐 아니냐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뭐, 그 것에 대한 논문을 보고 의문이 들었답니다. 이래저래 한 40분 가량을 그 문제에 대해 통화를 했지요. 이란 그 논문에서 나왔다는 영유와 점령의 기본 개념, 그리고 한성 함락 후 백제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 개괄.. 고고학이야 담을 쌓고 사는지라.. (생각해보니 짐순이 주변엔 고고학자들이 고대사 하는 사람들보다 몇 배 많습니다.. -_-;;)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분명 한강 이남에 고구려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 백제의 흔적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론 기록만 놓고 보면 500년이니 아예 안보인다는 것이 더 이상합..
지난 달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머리를 아프게 해서 이래저래 책을 볼 여유가 없더라구요. 연료가 안들어가니 글도 안나오고 또 그럴 맘도 안되고.. . 그 와중에도 딱 하나 읽고 있는 게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소개한 기상청의 고대 기상 자료집입니다. 자료안내 - 한국 기상기록집① -삼국사기ㆍ삼국유사로 본 기상ㆍ천문ㆍ지진 기록 김양의 글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하나 건진 게 있어 아예 자료집을 처음부터 읽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 건진 한 토막의 글로 다시 삼국사기 읽기의 발동을 걸어볼라 합니다. 다만 원문과 해석은 자료집의 것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1. 신라 파사 이사금 29夏五月 大水 民飢 여름 5월에 큰물이 나서 백성이 굶주렸다. 2. 고구려 태조왕 56春 大旱 至夏赤地 民饑..
노트북 내부를 뒤적이다 보면 뭔가가 자꾸 기어나오죠.오늘도 사진 폴더를 뒤지다보니 마주치는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과거의 2G폰으로 찍은 백제의 사람 얼굴 소조입니다.뭔가 우수에 젖은 표정이 일품이지요.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나중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다양한 불교조각상을 보았고,결정적으로 춘천박물관의 숨겨진 걸작인 나한상을 보노라니어쩌면 이것도 나한상의 한 부분이 나니겠는가 싶어요.불교미술에서 다양한 군상을 살피는데 탱화를 떠올리는 분이 많지만진짜 살아있는 표정은 나한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조만간 춘천박물관에 갈 예정인데 가서 나한상이나 찍어와야겠군요.
제목 거창하게 만드는 거 좋아하진 않은데(짐순이두 찌라시처럼 제목낚시 할 줄 알아염! 그저 싫어서 그럴뿐)뭐 암만 짱구를 굴려도 안떠오르네요. 그동안 지리나 지구과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해석 이야기를 종종 시도했었습니다.과거에도역사공부를 하려면 지구과학이나 지리공부도 잘해야..지리와 역사 2. 소백산맥의 빛과 그림자이런 글을 써왔으니 다시 이야기하면 동어반복, 자기 복제지요.그동안 짐순이는 나름 의기양양하게, 잘난척을 하고 있었어요.소백산맥, 서남해안에서 항해하기의 어려움을 떠들고선음, 전국의 19살 소녀들 중에선 짐순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재수업음 입자를 무한살포하고 있었지요. 어른들과는, 어느 정도 많이 돌아다니신 분들과의 대화는 좀 편해요.뭐라고 해도 다 알아들으시거든요.그러나 경험이 아직 부족..
지난 번에 창경궁의 소박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그러면서 중간에 백제본기의 한 대목을 인용했지요.그냥 넘어가면 뭐합니까?한 번 읽어나 보지요. 원문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해석십오년, 봄 정월에 새로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이 문장에서 삼국사기의 전후 맥락만을 읽자면 간단합니다. 건국 초기에 여기저기 도읍을 정하고 이동하는 와중에 정착한 하남 위례성에서 왕이 머물 곳을 조성할 때의 이야깁니다.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지요? 왕은, 온조왕은 그야말로 성군, 군자왕입니다.(이걸 서울시 모 동네의 왕으로 이해하면 대략 난감. 아! 가까운 곳이로군) 마치 유교경전에 통달한 것처럼 어찌 그렇게 이상적인 군주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까요? 어..
어제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백제의 왕권은 어떻게 강화되었나"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짐순이도 거기에 가야할 사정이 생겨서 다녀왔습니다. 이상하게 그 동네만 가면 길을 잃어버리는지라 (어젠 전철 하차역을 두 번이나 놓치고, 한번은 방향도 틀리기까지..) 오전의 발표는 듣지 못하고 오후의 토론만 참여했었지요. 사실, 백제사는 잘 모릅니다. 이 곳에서 백제사 관련 글이 거의 없다는 건 다 이유가 있지요. 거기에다 고고학자료에 대한 무지까지 겹치니 많은 부분의 토의가 그저 외계어로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얻은 성과들도 있기는 했습니다. 원래 약한 분야지만(이뇬아! 네 뇬이 강한 분야는 뭔데? 귀염떠는 거??) 국가형성에서 국가체제 완성에 대한 개념을 다시 잡아야 한다는 사실, 한때 짐순이는 ..
몇 년 전에 25권이라는 거질의 연구총서 "백제문화사대계"를 발간했던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또 하나의 책을 냈습니다.위의 책이 비매품으로 소수의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면이번엔 대중을 위한 작은 소책자입니다.한권 백제라는 꽤나 간결하고도 강렬한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나 좀 역사책은 봤다우..하는 분들께 적합한 책은 아닙니다.정말 비전문가들을 위해 만들어졌달까요.하지만 이분들이 아주 대중 친화적으로 쓴 건 아닙니다만전문적인 작가가 아니라 순수 연구자들이거든요.그러나 나름 어떻게든 평이하게 쓰려고한 노력의 고심이 보입니다.그 점에서 이 책의 존재 의의를 높이 사고 싶습니다. 1장에서 4장까지는 백제의 역사흐름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1장은 백제건국으로부터 근초고왕까지,2장은 무령왕, 3장은 성왕~무왕, 4장..
신라사에서 소백산맥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매우 큽니다.우선 지도를 펴놓고 보면 딱 경상도지역을 빙 둘러 감싸는 형세를 보여주지요.신라 천년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이 산맥은 그야말로 요람과 족쇄, 두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했습니다. 기원전후로부터 3세기 무렵까지 한반도와 요동지역에는마치 가루를 부려놓은듯한 모습으로 작은 정치체들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다들 알고 있을 삼한의 소국들이 바로 그런 정치체인 것이죠.이런 정치체는 그러나 어느 정도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그야말로 정글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혼란 속에서 탄생과 멸망, 결합과 분열을 반복하였지요.(혹시라도 그런 소국들 흥망의 모습이 궁금하신분께는비록 아주 역사적으로 정밀하지도 않은데다 원소스가 야겜이지만애니 "칭송받는 자"가 도움이 되지 싶습니다. -_..
우선 이 지도를 봅시다.한반도에 국한해서 동쪽과 북쪽이 높은 것이 지형적 특색임을중학교 1학년 이상이면 다들 아는 이야깁니다.하다못해 지도의 푸른색은 평지,적갈색(짐순어로는 응가색)은 산지라고 초등학교 때 배웁니다.학교의 지리수업에서는 흔히들 동고서저라고 가르치지요.엄밀히 말하자면 동고서저 북고남저입니다.한반도를 케이크 자르듯하여 번호를 붙이면동쪽과 북쪽에 걸친 2번이 높습니다.그리고 서쪽과 남쪽에 걸친 3번이 가장 평야를 많이 가진 지역입니다.초3의 눈으로 보자면 농촌이 많달까.. .사실 이 동고서저 북고남저를 이해한다면한국지리의 반절을 먹고 들어가는 것이고 한국사에서 백제/신라의 발전속도 문제와영남 남인들의 분포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여기야 고대사블로그니 그 문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
오늘 전시소개는 아주 편리하군요.일시 이런 것까지 다 그림화일로 제공하니..한성백제박물관 감사하무니다~~(오늘은 날로 먹는 포스팅! 데헷~)
어제 아는 분의 부친상이 있어 강릉에 다녀왔습니다.결혼식은 못가도 상가에는 간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는데다(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정과 겹치면 못가지만요..)오랜 시간동안 알고지낸 분이어서 안갈 수는 없더군요.자정께 돌아와 기진맥진했다가 일어나칠지도 얘기나 해볼까 금석문책을 펴보다 생각이 나서 이걸로 갑니다.(그렇다! 짐순이는 지조때로 살아가는 19세 청순가련 병약미소녀였던 것이다!!) 1919년 부여의 부소산성 안의 사비루 근처에서 불상이 하나 발견됩니다.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부처를 보살 둘이 보좌하는 삼존불의 형태이지요.가운데 부처를 본존불, 양 옆의 보살들을 협시보살이라고 부르죠.(이른바 업계용어. 알아두시면 박물관에서 편합니다..)불상이야 전형적인 삼국시대 불상입니다.대개는 불상하면 대웅전이나 비..
2010년,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지금의 부여에서 목간 하나가 발견됩니다."벼슬자리 주십시오"..백제 편지목간 발견 所遣信來 以敬辱之 於此貧薄 一无所有 不得仕也 莫瞋好邪 荷陰之後 永日不忘그냥 귀찮으니 누군가 풀어놓은 번역문을 그대로 옮기자면보내주신 편지 삼가 잘 받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이 몸은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며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주십시오.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나이다.그 중에 於此貧薄 一无所有 不得仕也.. 요 문장이 끌리네요.여기에 빈궁하게(찌그러져 있다보니) 가진 것 하나 없고, 일도 얻지 못하였습니다..란 말. 왕조국가의 공무원수는 매우 적습니다.억단위 중국을 좌우하던 명청시대 중앙관리가 5만을 넘치 않았다고 들었..
원문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해석13년 봄 2월 왕도의 노파가 남자로 변하였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안에 들어왔다. 왕모께서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였다. 고대사회의 인간이나 현대의 인간이나 달라진 건 그다지 없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라면 사용하는 도구의 차이랄까요? 그외에도 몸담고 있는 정체政體라던가 경제제도 같은 것을 들수 있겠지만 적어도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것적으로 보자면 크게 변한 것은 없다고 해야죠.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든 사회구조나 과학기술의 문제보다는 차라리 과다한 기계의존으로 뇌의 용적량이 줄었다던가 근력이나 신체 능력이 떨어진 게 더 큰 차이가 될 겁니다. 물론 대다수의 인문학자들이라면 나의 발견, 자아의 형성을 들 ..
원문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 해석28년(373) 봄 2월 사신을 보내어 진에 조공케 하였다. 가을 7월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사실, 오늘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지난 주에는 쉬었고, 동천왕시리즈도 잠시 숨을 돌릴까, 그리고 너무 백제를 방치플레이했구나란 생각이 겹쳐 성왕이야기를 하렸더니 이것도 2부작 분량이라 현재 진행중인 흐름을 끊을 수도 없어.. 이래저래 짱구를 굴리다..(원래 속도라면 점심시간에 올라갔어야죠) 그냥 타협한 것이 이 이야깁니다. 아무래도 현직으로도 역사소설가이신 니자드님 소환의식이 되어버릴 거 같아요오~~. 이걸 할까 저거 할까 생각해보다 이 부분에 이르니 떠오르는 소설이 있..
원문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해석위덕왕의 휘는 창이고 성왕의 원자다. 성왕이 재위 32년만에 돌아가시자 뒤를 이었다. 위덕왕은 그렇게 잘 알려진 왕은 아닙니다.(뭐 생각해보세요. 자료 찾아보는 걸 그토록 귀찮아하는 짐순이가 메이저한 왕을 다룰리가요. -_-;;) 그의 아버지는 백제를 부흥시켰던 성왕입니다. 한국의 기록에서는 고작 그 정도로 다뤄집니다. 바다를 건너가도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죠. 고대한일관계사를 아신다면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는 아좌태자를 아실 겁니다. 그는 위덕왕의 아들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할 이야기거리가 그리 없어 보이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보복전을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