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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13. 17:47

고구려와 백제는 수도를 두 번 옮겼습니다.(고구려의 경우는 약간 설이 분분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고구려는 정책적으로 이동했던 것이고, 백제는 웅진천도(475)처럼 아예 수도를 빼앗긴 상황에서 새로운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 경험을 가진 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신라는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경주, 서라벌에서만 보냈습니다. 물론 천년을 버티는 국가 자체가 흔한 건 아닙니다만, 그 역사 내내 수도를 옮기지 않는 경우는 더욱 보기 힘듭니다. 물론 삼국시대 후반의 항쟁이나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수도가 점령당한 건 멸망 직전인 927년에 견훤의 공격으로 경애왕이 죽임을 당한 게 유일합니다. 그러니 방어상의 이유로 수도를 옮겨야할 필요는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신라의 역사에서 초반부를 제외한 나머지 시절의 적은 소백산맥 너머에 있었고, 산맥 안에서도 동남쪽에 위치한 경주는 그만큼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물론 서라벌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가열찬 경쟁의 시대에는 유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위의 관구검이나 전연의 모용황에게 국내성을 점령당하기도 하였으며, 백제도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왕의 목숨도 잃었습니다. 신라는 소백산맥이란 거대한 자연 장성의 보호를 받고, 또 멀리 떨어진 상황은 적어도 국가의 핵심을 안전히 보존할 여유를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백산맥이란 장벽이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는 항상 나쁜 것이 따른다고 고구려와 백제를 다 아우른 시점에 서라벌이 가진 장점은 단점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처음에는 아이를 보호하는 장치들이 어느 정도 커버린 즈음엔 제약장치가 되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서라벌의 위치는 소백산맥 안에서 대장놀이를 하기엔 나쁘지 않지만, 영토가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으로 확대된 새로운 상황에는 되려 단점이 됩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라면 서울에 앉아서 부산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의 보고를 받고, 재빨리 대응하고 지원을 할 수 있으니까 위치라는 제약은 약해지지요. 하지만 빨리 가봐야 말로 달리는 것이 최고 속도인 시대에는 빠른 대응을 하지 못합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운 후, 움직이려 할 때는 이미 늦습니다. 아이가 물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가지만 이미 거센 물살에 한참 떠내려간 셈입니다.

신라도 딱 한 번 천도하려고 했습니다. 신문왕神文王 9년(689)에 도읍을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옮기려고 했다가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이 단 한 줄뿐이고, 또 달성하지 못한 계획상의 문제기 때문에 연구가 활발한 주제는 아닙니다만, 이 사건은 해당 시대 연구자들에게 통일신라사의 매우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보는 것 같습니다. 

왜 신라는 대구로 천도하지 못했을까요? 일단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론 기존 귀족들의 극렬한 반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일단 천도라는 것은 단순히 행정 중심지의 이전이 아닙니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전국토에서 차지하는 수도의 비중은 극단적으로 커집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6~7등신도 아니고, 머리 큰 인형옷 수준이 아닙니다. 머리가 8, 몸이 2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기능과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너무 극단적이라고요? 사실 9:1이라고 하고픈데 너무 과하게 보일까봐 나름 조정한 겁니다) 누군가의 말을 고대식으로 바꾸면 권력은 수도에서 나온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왕을 비롯하여 귀족들의 힘은 이 곳에 있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 장소를 옮긴다?

어떤 이는 어딜 가도 잘 먹고 잘 살 것입니다. 그런데 안풀리는 이들이 더 많기 마련입니다. 갑자기 경주에서 대구로 옮긴다면 거기에 기반을 두었거나 깊은 관계를 가진 이에겐 유리할 것이나 인연이 전무한 이에겐 지금보다 더 높이 올라가기는커녕 밀려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찬성한다거나 과반수를 넘긴다하는 일은 알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백제처럼 수도를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말이죠.

그런데 삼국통일전쟁기부터 이 시대까지 오는 가간을 돌아보면 왕권이 그리 약한 것도 아닙니다. 일단 고구려와 백제라는 오랜 적국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강대국인 당과 싸워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심지어는 전쟁 중에 왕과 대립한 것으로 보이는 귀족들을 숙청할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최전선에 나가 싸우는 상황이었는데도,

신문왕은 즉위 초 장인이었던 흠돌欽突의 난을 진압하고, 지금의 국방부 장관격인 군관軍官을 방조혐의로 자결케 합니다. 9주의 행정구역과 전통적인 6정군단과 다른 군사집단인 9서당誓幢을 완성합니다. 이런 왕이 힘이 약할 리 없습니다. 본인도 고구려인의 신라 내 국가였던 보덕국報德國의 반란을 진압했으니 군사적 업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천도에 실패했습니다.

왜 였을까요? 반대는 늘 있을 것이고, 왕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고구려와 백제의 사례를 들어서 신라의 일을 살펴보지요. 고구려의 평양천도나 백제의 사비천도는 어떤 이유이거나 장기간 준비한 대사업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낙랑군을 몰아낸 직후부터 평양에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알단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이자 낙랑군의 중심지였으니 인적・물적 자원은 풍부합니다. 낙랑군이 물러갔다고 모든 사람들이 떠난 건 아닙니다. 그들을 흡수하고, 위진남북조의 항쟁을 피해 도망온 사람들을 배치했습니다. 전통적인 귀족세력과 관계가 없으니 왕실이 흡수하려는 의도였겠지요.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9개소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는데, 왕실에게 평양이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불교는 국가에서 공인한 상태지, 고구려 전체가 믿고 따르는 상황이 아닙니다. 특히 초기 불교의 교단조직과 행정조직과 상호보완적 관계였으므로, 국가가 절을 세운다는 것은 왕실의 개인 사찰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상상을 가미하자면 신도시 건설계획의 준비단계가 아닌가 합니다. 뒤에도 이야기 하겠지만 적어도 천도에 협조적인 사람들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정황을 보면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는 천도를 늦어도 장수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양왕부터 준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427년 평양으로 옮기기까지 차근차근 기반을 조성한 다음 실행에 옮겼다고 봐야겠지요.

백제는 어떨까요? 475년 한성이 함락된 후 웅진으로 천도하였지만, 이는 긴급상황이라 뭘 이리저리 재고 분비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구려‘놈’들이 여기까지 쫓아올까봐 겁이 난 상황이었으니 좋고 나쁨을 가릴 여유는 없으니까 일단 튀어야지요. 신라와 비교해서 참고할만한 사례는 538년의 사비(현재의 부여)천도입니다. 공주는 더 성장하기엔 협소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백제왕실에게 무엇보다 웅진시절의 기억이 너무 잔혹해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웅진에 있던 기간(475~538) 중 천수를 다한 왕은 무령왕 뿐입니다. 문주, 삼근, 동성왕이 연달아 신하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성왕이 천도를 하였지만 동성왕 시절부터 사비를 염두에 둔 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말을 타면 금방 다녀올 수 있는 거립니다. 사냥이라거나 시찰이란 명분으로 꾸준히 탐색하고 준비한 듯 보입니다. 질서 정연하게 구획된 시가지는 임금님 명령 한 번에 순식간에 만들 수 없을테니 여기쯤 왕궁을 세우고, 여기쯤 관청을 놓고, 어디어디는 택지, 어디어디는 제반시설 등등의 구상과 검토가 이루어져야 나올 모습입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지금 읍내의 복판을 차지하는 정림사처럼 사찰도 군데군데 자리잡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천도는 몇 대에 걸쳐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무턱대고 ‘나, 이사갈래’라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전세나 월세살이를 하자면, 미리 집주인에게 이야기해야겠지요. 만약 계약기간 만료 전이라면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보증금도 받아야 하고, 새 집도 찾아야 하고, 이사준비도 해야하지요. 사람 한 두 명이나 가족이 사는 집도 그러할텐데 하물며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냥 목이 싫으니 배나 가슴에 붙여야겠다고 무턱대고 머리를 베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라의 경우는 오랜 기간에 걸친 준비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빨라야 문무왕 말년이고 늦어도 신문왕 즉위 후인데, 마음이야 먹었다 한들 이를 추진할 방도가 없습니다. 현재 연구자들은 경주 귀족들의 반대가 커서 무산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단 그건 가장 큰 이유 맞습니다. 그러나 모든 귀족들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죠. 종종 역사 연구자들은 이런 집단들을 가정하고 일사분란하게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늘 이런 정치적 모림은 강철의 단일대오를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천도 반대를 외칩니다. 그렇다면 그와 척을 지고 있거나 대구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찬성을 외칠 것입니다. 또 찬성을 외친 사람이 특정 가문의 수장이라면, 그의 자리를 노리는 일족 중 누군가는 그 자리를 노리고 반대파에게 댓가를 제공하면 네 편을 들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귀족사회의 경우 같은 집안이라도 여기저기 다리를 걸쳐야 여차한 경우 일부라도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거의 유전자 각인 수준으로 당연한 원칙임으로 한 집안, 어느 지방 기반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흐름에 몸을 던지지 않습니다. 원성왕과 왕위 계승을 두고 밀려난 김주원의 아들 중 하나인 헌창憲昌은 9주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이끈 반란의 주동자가 되었지만, 종기宗基는 경주의 거대 귀족으로 행동합니다. 왕이 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집안에 전해진다고 해서 모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천도 시도 불발은 물론 귀족들의 반발도 크지만 근본적으로 준비부족이라고 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왕이 할 일은 당장 가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표를 더 많이’ 얻어야지요. 만약 한 명이 반대한다면 그와 대척점의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고 회유하거나, 그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할 약점을 쥐거나 설득을 하거나하고, 그 와중에 미리미리 새 도읍지의 건설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거나(앞서 고구려나 백제가 오래 걸린 이유에는 분명 단기간에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큰 무리가 따른다는 점을 이해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도를 하면 모두에게 이런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죠.

신라왕경 복원 모형(국립중앙박물관, "統一新羅" 소도록, 2003, 25쪽)

그런데 신문왕은 군사제도나 지방제도, 그리고 귀족들의 급여체계까지 손을 댈 정도로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걸었는데 천도는 실패합니다. 단순히 왕권이 미약하다거나 귀족들의 반대가 너무 극심하단 말로는 해결하지 못할 의문이 따릅니다. 그만큼 천도는 매우 큰 일이거나 준비가 부족했다는 반증이겠지요.

이미 실패로 끝난 일이지만 그나마 신문왕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방법이 있기는 했습니다.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한 번 써먹은 방법입니다. 남조인 제齊를 친다고 군사를 일으켜 낙양洛陽에 머무르면서 천도를 기정사실화 해버리죠.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기벌포 해전 이후 나당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서로 충돌을 피하다보니 어느 순간 흐지브지 된 것이지 당시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새로운 정복지는 경주에서 너무 멀어 관리하기 힘드니 경주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낙동강을 둘러싼 소백산맥 안쪽의 원신라땅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도 있으니 잠시라도 거기서 상황안정을 노려야겠가고 선포하고 옮긴 후에 ‘이제 이불깔고 디비누워보니 다시 일어나기 귀찮네. 방구들이 접착제여’ 이랬다면 어물쩍 반대를 무릅쓰더라도 천도에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가정이므로 단 한 줄만 남은 천도 기사 너머에 무슨 고약한 사정이 있었을 지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생각을 하고 선언만 한다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교훈 뿐입니다.

김씨 | 2022.01.16 20:3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지방으로 이전된 공기업 직원들이 생활기반(처자식이라든가..)은 여전히 서울에 두고 목요일 오후만 되면 회사셔틀버스로 귀경하느라 난리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Favicon of https://rgm-79.tistory.com BlogIcon RGM-79 | 2022.01.16 22:00 신고 | PERMALINK | EDIT/DEL
뭐, 월요일 새벽 5~시 사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KTX나 몇몇 기관들이 있는 지방 소도시/군에서 서울로 가는 18시차에 좌석 없는 것은 늘 잇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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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5. 13:36

예전에 대구지역 소국의 발생과정을 정리한 적이 있는데 윤용진 선생님 이후 몇몇 분들이 시기별로 취락이 어디에 형성되었다 사라지고, 또 어디는 커지고, 어디는 또 다른 곳에 '소속'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지도 위에 점을 찍어 시기별로 커지고,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 과정을 동영상처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한번 시도해보긴 했으나 영 파이였다. 움직이는 건 지온놈들 때려잡는 거 빼곤 못한다.)

이희준, '삼한 소국 형성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틀', "한국고고학보" 43, 2000, 130쪽의 그림을 다시 그린 것

삭주에도 그걸 하면 둏긴하다만, 문제는 댐이다. 의암, 소양 등 여러댐의 건설 이후로 춘천의 지형이 은근하게 바뀌었다. 지금의 위성사진을 펴놓고 거기에 점을 찍어 유적의 위치, 변천과정을 추구하다보면 원래 지형에 입각한 것과는 다른 결론이 나온다.(많은 글에 그리 되어 있다) 강만 넓고 깊어진 게 아니다. 사람들의 이동방식, 토지이용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형 자체의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달벌국과는 다르다.

일제강점기 지도 중 삭주 시내.

어디가 더 성장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또 어디가 새롭게 부상하다 강려크해지는 과정을 최소한 일제강점기 지도와 고지도를 바탕으로 잡아야 한다는 게 난점. 게다가 삭주는 중도와 전평(현재 소양동)이 너덜너덜해져서 별다른 자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거. 진짜 남은 게 당간지주와 석탑뿐이다. 킹치만 이건 약간 후대의 자료인걸.

최근에도 이 지역의 인구 밀집도를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규명하는 논문이 나오고 있다. 한 줄의, 그것도 프로파간다 성향이 짙은 사료 한 줄로 맥국이 있네 없네하는 것보다 더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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