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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김부식[同接伴 通奉大夫 尙書禮部侍郞 上護軍 賜紫金魚袋 金富軾]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문벌가문[大族]으로 전대의 역사[前史]에 이미 실려 있었다. 박씨朴氏와 더불어 가문의 명망[族望]이 서로 대등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 가운데 글을 잘 하고 학문에 정진[文學] 함으로써 등용된 사람이 많다. 김부식은 얼굴이 크고 장대한 체구에 얼굴은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런데 두루 통달하고 기억력도 탁월하여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망을 얻는 데에는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우 김부철[富轍] 또한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찍이 그들 형제의 이름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친 분의 글을 보다 한백겸韓百謙의 구암유고久庵遺槁이 학위논문으로 역주되었다는 것을 알고 냉큼 받아서 보았습니다. 한백겸의 책은 구암유고나 동국지리지가 영인된 것이 전부라 글이 짧은 여아는 글을 읽기 어려웠거든요.사실 이쪽 전공이라면 동국지리지도 중요했지만 평양성의 도시구획과 기자의 정전제의 관련도 중요해서 구암유고도 꼭 봐야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런데 말입니다. 첫장부터 이상한 대목을 발견하고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주자 해설에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정전제를 최초로 언급했다는 대목입니다.이 17번 각주에 인용된 원문은 삼국사기 어느 부분에 있는지 적혀있자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대주의자라고 욕을 처묵다 못해 목까지 차올라 뚱뚱 불은 부식옵하라면 안적었을 리 없는데 삼국 이전 고조선과 관련된 ..
1.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역사서. 고대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연대기인 본기 28권(신라 : 12, 고구려 : 10, 백제 : 6), 연표 3권, 제사, 의복과 주거, 중앙과 지방 행정제도를 설명한 지 9권, 삼국초부터 후삼국까지의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한 열전 10권 등 총 50권의 기전체 역사서. 2. 김부식(1075~1151) 신라 왕실의 후예로 다른 집안과는 달리 그의 아버지 대에서야 중앙 정계로 진출. 김부식의 형제 4인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며 이름을 알림. 문장에 능해 여러 차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금의 압박이 거세지자 이자겸과 현실적인 외교관을 주장했으나 왕권을 위협하는 그의 전횡에는 반대함. 이자겸 제거 후 수상의 자..
지난 주에 내물왕 즉위년 조의 결혼을 이야기하고다음엔 거기에 대한 김부식의 논평을 이야기 해보자고 예고를 했습니다만이미 한참 전에 이 사론에 대해 쓴 것이 있군요, 사론 02 - 나물왕즉위년조의 사론 엄훠낫, 지가 돈이 얼마인지 자식이 몇인지 몰랐다는 분도 아닌 뇬이글을 써놓고 안썼다고 생각하다닛!!!뭐, 약간의 생각이 바뀐 것도 있지만 그래도 사론에 대한 것은 위의 글을 봐주셨으면 합니다.단 원문과 해석글 빼고 5번째 문단까지는 지난 주와 겹치니그 다음부터 읽어주시길..일단은 설명에 앞서 사론을 다시 인용해 봅니다. 논하여 말한다.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노공(魯公)이 오(吳)나라에 장가들고 진후(晉侯)가 사희(四姬)를 취한 것을..
삼국사기를 읽는 이들의 불만 중 하나가 글의 세밀함이 적다는 것에 있습니다.중국 정사나 자치통감, 또는 일본 6국사와 비교해도기록의 세밀함이 떨어지고 내용 서술이 빈약한 곳이 많습니다.그 이유를 들자면 삼국사기가 12세기에 편찬되었다는 것,신라의 기록만 압도적으로 살아남았고이러저런 전란과 혼란기를 거치며 살아남은 기록이 적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또, 누구는 신라위주의 기록이란 욕을 하겠지..)거란의 침입 덕분에 고려 초기의 기록조차 많지는 않습니다.하물며 그 이전 시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또 하나는 김부식이 고문파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고문파라고 전보에 적는 글을 선호한 건 아니지만잡다한 수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원고지 매수는 많이 줄었지 싶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삼국사기의 문..
원문朔州 賈耽古今郡國志云 "句麗之東南 濊之西 古貊地" 盖今新羅北朔州 善德王六年 唐貞觀十一年 爲牛首州 置軍主 번역삭주는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따르면 (고)구려의 동남 예의 서쪽, 옛 맥의 땅이라 하였다. 아마 신라의 북쪽 삭주를 말하는 것 같다. 선덕왕 6년, 당 (태종) 정관 11년에 우수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오늘 예정을 바꾸어 삼국사기 번외 글 하나 올려봅니다.(눼, 이른바 땜빵선발이죠) 사실 별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삼국사기의 오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침에 문득 삼국사기 지리지 삭주(그러니까 지금의 춘천입니다) 부분을 펴놓고 읽다가 순간 짐순이의 해석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옆 화면의 中자를 두고 끊어읽기가 잘못되고 있던 거예요. 당의 정관 11년 중..
원문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歧作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裹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羣臣立延優爲王 해석(연)우는 의관을 바로하고 (왕후를) 문에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은 죽고 자식은 없는데, 발기는 연장자로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첩에게 이르기를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난폭하고 무례하니 그래서 도련님을 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우가 예를 더하여 친히 칼을 칼을 잡고 고기를 썰었다. 실수로 그 손가락에 상처가 나니, 왕후는 치마의 띠를 풀어 그 상처가 난 손가락을 싸매주었다. 장차 (왕후가) 돌아가려 할 때, 연우..
김부식 빠심가득한 연방의 폭죽이지만그래도 그의 서술에서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그 중 하나가 봉상왕 때의 국상(재상이랄까요?) 창조리에 대한 기삽니다. 그의 열전은 삼국사기 권 49, 연개소문과 같이 실려있습니다.전통적인 분류로 보자면 반신전叛臣傳, 그러니까 반역을 한 신하의 범주에 놓여 있습니다.연개소문이야 왕을 죽이고 시체를 구덩이에 버렸으며, 동료 귀족 180여 명도 죽이고 권력을 잡았지요.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반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창조리를 어땠을까요?봉상왕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역을 치루고 있는데궁궐수리를 위해 사람들을 모아 노역을 시키고그것에 대해 간하는 국상에게 ‘너 죽을래’라는 협박을 날립니다.나라를 다 갉아먹을 것 같은 포악한 왕을 갈아치우지요.기록 그대로라면 피도 안..
원문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번역3년 봄 2월 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게 하였다. 전에는 왕이 돌아가시면 즉 남녀 각 5명으로 같이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였다. 지증왕은 신라사에 있어서 그 어떤 왕 이상으로 중요성을 가지는 왕입니다.지증왕 이전의 신라는 소백산맥 안에서만 강한 척하는 약소국에 불과하였습니다.아들인 법흥왕의 여러 정치적 변화나손자인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활동만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지증왕이 없었으면..하는 말은 그저 혈연상의 수사가 아닙니다.시대의 변화상을 몸소 깨닿고 그쪽으로 과감히 방향을 전환을 한이 아버지,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과 손자의 위업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광개토, 장수왕보다 소수림왕을 더 중요시하는데이 지증왕..
원문論曰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是故 魯公之取於吳 晋侯之有四姬 陳司敗 鄭子産深譏之 若新羅 則不止取同姓而已 兄弟子 姑姨從姊妹 皆聘爲妻 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 若匈奴之烝母報子 則又甚於此矣 번역논하여 가로되, 처를 취함에 있어 동성은 취하지 않음은 구별이 두터운 것이다. 이에 고로 노나라 공이 오에서 (아내를) 취하고, 진후가 4명의 희(씨성)를 취한 것은 진의 사패와 정의 자산이 그것을 깊이 비판한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동성(의 아내)를 취함에 그치지 않고 조카와 고종, 이종자매까지도 모두 찾아가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하다고 중국의 예로써 이를 책하는 것은 매우 어긋난 것이다. 흉노의 경우에 어미와 사통하고 자식과 사통하는데 이보다 심한 것은 다시 없다. 아주 오래간..
금 나라 임금 아골타가 아기(阿只) 등 5명을 시켜 글을 부쳐 보냈는데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고(조상)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조심스럽게 섬겨 왔는데 거란이 무도하게 우리 강토를 짓밟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삼으며, 여러 번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득이 항거하였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섬멸하게 되었으니 왕은 우리에게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 대대로 무궁히 좋은 사이가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좋은 말 한 필을 보낸다."고 써 있었다. 글이 도착하니 대신들이 화친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는데, 어사중승 김부철(金富轍)이 상소하기를, “금 나라 사람들이 대요를 격파하고..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한때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이, 임궁에서 범어를 파하니 / 琳宮梵語罷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 天色凈琉璃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부식이 그 시를 좋아한 끝에 그를 구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은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두고 시를 짓기를,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는냐? 왜,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과연 김부식이 신라왕족의식을 갖고 삼국사기를 일부러 신라 편향적으로 썼느냐에 대해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학계에서도 종종 그런 시각을 확인하게 되어 놀랍긴 한데 (그만큼 김부식이나 고려사회의 지적 풍토라던가 특히 귀족사회의 특질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단 겁니다) 슬슬 여기에 대해 이곳에서든 논문으로든 뭘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마침 올해부터 사용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보다가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위의 글처럼 김부식은 대대로 귀족의 자리에 오른 신라왕족 출신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출세한 것도, 신라왕족 출신이라는 점도 절대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신라왕족 출신이기 떄문에 아주 잘먹고 잘 살았던 귀족통뼈였을까요? 김부식의 가문이..
고대사에 대한 기록 중에는 고흥이라던가 이문진, 또는 김대문이라는 이름은 전해지지만 그들의 저작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화랑세기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최소 김부식은 여러 종류의 사서를 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 중국사료들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김부식이 국내사료를 인멸하지 않았음은 다음 글을 살펴주세요 → http://rgm-79.tistory.com/8) 그래서 김부식이 서술한 삼국사기가 어떤 사서인지 비교할 대상이 없기에 각자의 마음 속에서 그리는 심국사기의 이미지가 너풀너풀 날아다니는 중이죠. 문제는 삼국사기 안읽고 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진실처럼 포장된 상태로요. 그런데 삼국사기 안에는 약간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김부식은 유달리 최치..
※ 현재 RGM-79가 모처에서 진행중인 한국사 수업에서 삼국사기에 대한 부분은 따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여기서나마 대략적인 내용을 적어두려고 합니다. 어차피 삼국사기를 다루는 블로그니 이런 개략적 정리 하나쯤은 필요하겠지요. 김부식과 삼국사기 1. 김부식(1075~1151) : 신라왕실의 후예로 다른 집안과는 달리 뒤늦게 중앙정계로 진출. 김부식의 형제 4인이 모두 과거에 합격함. 문장에 능해 여러 차례 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금의 압박이 거세지자 이자겸과 현실적인 외교관을 주장했으나 그의 전횡에는 반대함. 이후 수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묘청일파가 서경천도를 주장하자 반대함.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개경의 서경파를 제거하고 진압에 나서 1년 만에 토벌함. 윤관의 아들 윤언이와의 ..
삼국사기에 인용된 자료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은 확실한 인용이 있는 것만 추려보니 총 65건 이상이 발견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내기록을 추려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시중에 돌고 있는 삼국사기에 대한 책의 상당수는 삼국사기에 대한 번역이거나 아주 전문적인 연구서들입니다. 많이 들어본 이름과 달리 친숙하게 접근할 수도 없죠. 예전처럼 논어 맹자는 유치원 때 다 읽었다는 시절도 아니니 번역서를 편다해도 그 생경한 단어들과 지금과 너무 다른 글쓰는 방식에 의해 편안하게 읽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누군가 (역시나 제대로 읽지못한) 한 말을 이어받아 확대재생산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게다가 인터넷의 보급으로 유사역사학이 더 활기를 찾아감에 따라 삼국사기는 그 실체를 잘 모르니 신비주의로 포장되기는 커녕 실체와 반대로 너덜너덜해지고 있지요. 전문서이긴 하지만 학부생의 수업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책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구복, 『삼국사..
1. 들어가며 삼국사기는 한국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문헌기록입니다. 동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김부식은 자료수집의 과정을 거쳐 전시대에 기록된 문헌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또 내부의 기록 속에 인용한 자료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인용서적은 중국의 사서오경부터 일본의 기록까지, 시문집으로부터 불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이 글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어떤 방법으로 쓰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입장에서 국내자료, 특히 고려시대의 저술과 문집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찾아내보려고 합니다. 과연 김부식은 어떤 자료를 보았는가를 넘어서, 동시대인들이 편찬했을 다른 자료들을 어떻게 취급했는가에 관심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지요. 2. 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