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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아마 다음 주나 다다음 주의 글에서는 이 싸움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귀산전에서는 그저 귀산과 추항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이 싸움은 삼국시대 후반의 정치사를 이리저리 꼬아버릴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때 얘기~! 원문百濟敗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해석백제군이 (싸움에) 져서 천산의 못가로 물러나며 복병을 숨겨서 대기시켰다. 아군이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물러나는데 그때 무은은 후위가 되어 군의 뒤에 섰다. 복병이 나타나 갈고리로 떨어뜨렸다. 약간 미리 역사적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이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백제가 졌습니다. 그야말로 백제군은 전멸을 당했지요. 앞서 554년의 관산성 전투의 대참패에..
드뎌 다음 주로 안넘기고 이어서 씁니다!!!(뭐, 별걸 다 자축하고 그래? -_-;;) 원문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别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 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如此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丗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해석법사가 말하기를 ‘불계에는 보살계가 10종류가 있지만 너희들은 다른 이의 신하된 자로 (그 계율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세속에서 지킬 수 있는 다섯 가지 계율을 내리니 첫째가 군주를 섬김에 충성을 다하라(사군이충), 둘째로 부모를 모심에 있어 효를 다하라(사친..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 글이 나옵니다. 이러저러한 일로 잠시 손에 놓았는데 그 동안에도 이런저런 시도들이 잇엇지요. 다만 나오지 못한 것일 뿐. 원래 진행하려던 김양은 잠시 접고(아마 다른 방식으로 나갈 것 같습니다), 최근에 관심을 가진 어떤 주제에 대해 하려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로에서 갑자기 두어번 선회를 하다보니 오늘의 이야기로 나왔습니다. 그동안 오뒤세우스의 모험의 1/1000은 떠돌았던 것 같네요. 원문貴山 沙梁部人也 父武殷阿千 貴山少與部人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盍聞道於賢者之側乎 時圎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貴山等詣門 摳衣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해석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 아비는 무은 아간이다. 귀산은 어려서부터 ..
원문 旣定日引其人 薛氏固拒 密圖遁去而未果 至廐見嘉實所留馬 大息流淚 於是嘉實代來 形骸枯槁 衣裳藍縷 室人不知 謂爲別人 嘉實直前 以破鏡投之 薛氏得之呼泣 父及室人失喜 遂約異日相會 與之偕老 해석 그 정한 날에 그 사람을 불러들이니 설씨녀는 굳게 저항하여 몰라 도망가려 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마굿간에서 가실이 남기고 간 말을 보며 크게 탄식하며 울 뿐이었다. 이때 가실이 교대하고 돌아왔다. 몰골이 몹시 야위었고 옷은 낡고 헤져 집안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였다. 가실이 앞으로 나와 깨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녀는 그것을 줍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부친과 집안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다른 날 서로 모이기를 약속하고 더불어 해로하였다. 어떻게 첫 문장을 시작할까요? 왜 이 글은 늦어지고 있는가? 짐순이는 어쩐 일로 땜빵글..
원문會國有故 不使人交代 淹六年未還 父謂女曰 "始以三年爲期 今旣踰矣 可歸于他族矣" 薛氏曰 "向以安親 故强與嘉實約 嘉實信之 故從軍累年 飢寒辛苦 況迫賊境 手不釋兵 如近虎口 恒恐見咥 而棄信食言 豈人情乎 終不敢從父之命 請無復言" 其父老且耄 以其女壯而無伉儷 欲强嫁之 潛約婚於里人 해석마침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겨서 사람을 교대할 수 없었기에 6년을 머물게 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설씨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처음 3년을 약속하였는데 지금 이미 한참을 지났구나. 이젠 다른 집안에 시집을 가야겠다"라 하였다. 설씨녀가 답하기를 "아버지를 편케 하기 위해 가실과 더불어 굳은 약속을 맺었는데, 가실은 그것을 믿고 몇년째 종군하고 있어요. 춥고 배고픈 고생을 하고 더구나 최전방에 있어 병장기도 못풀고(쉬지 못하고..
원문薛氏甚喜 入告於父 父引見曰 “聞公欲代老人之行 不勝喜懼 思所以報之 若公不以愚陋見棄 願薦幼女子 以奉箕箒” 嘉實再拜曰 “非敢望也 是所願焉” 於是嘉實退而請期 薛氏曰 “婚姻人之大倫 不可以倉猝 妾旣以心許 有死無易 願君赴防 交代而歸 然後卜日成禮 未晩也” 乃取鏡分半 各執一片云 “此所以爲信 後日當合之” 嘉實有一馬 謂薛氏曰 “此天下良馬 後必有用 今我徒行 無人爲養 請留之 以爲用耳” 遂辭而行 해석설씨는 매우 기뻐하며 그의 부친에게 고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가실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노인의 일을 대신하고자 한다고 들었소. 기쁘면서도 걱정이 듦을 이길 수 없소이다. 이걸 어떻게 갚을까 생각해보았는데, 만약 그대가 어리석고 가난하여 꺼려하지 않는다면, 어린 여식을 권하니 비질이나 시키게 해주면 좋겠소만.” 가실이 다시 ..
원문眞平王時 其父年老 番當防秋於正谷 女以父衰病 不忍遠別 又恨女身不得代行 徒自愁悶 해석진평왕 때에 그의 부친은 늙었는데도 정곡에 수자리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는 부친의 몸이 쇠하고 병들어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지만 여자의 몸이기에 대신할 수 없음을 한탄하고 스스로 근심에 빠져 있었다. 요즘 날이 덥다보니 한랭지 모델, 드디어 퍼지기 시작했어요. 지난 주에는 아예 건너 뛸 수 밖에 없었던 게, 너무 더워 책이 안들어오는 걸.(엉엉엉.. 훌쩍) 그리고 또 과도하게 부담을 가지다 보니 또 안나오더군요. 1주일 늦었지만 갑시다. 분명 설씨네 아가씨를 고르면서 전쟁이야기, 정치 이야기는 좀 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이건 멍청한 생각이었죠. 왜냐하면 이 이야기 자체가 전쟁 난리통에 벌어진 이야기고, ..
원문薛氏女 栗里民家女子也 雖寒門單族 而顔色端正 志行脩整 見者無不歆艶 而不敢犯 해석설씨녀는 율리의 민가의 여자다. 비록 빈한한데다 단촐한 집안이었으나 얼굴빛은 바르고 단정하였고 생각과 행동은 잘 닦였다. 보는 자마다 그 고움을 흠모하지 않는 자 없었으나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길고 긴 사랑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좀 딱딱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바로 신분에 대한 이야기지요. 오늘 들어가는 부분은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소개부분이라 딱히 길게 할 이야기는 없어야겠지만. 이 블로그가 어디 그렇습니까. 한 단어에 집착해서 정나미 떨어질 때까지 나불나불대는 게 특징이니.. . 어제 글에서 신분에 따른 결혼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은 각각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요. 높은 자는 높은 자와, 낮은 자는 낮은 자와..
원문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 懼殊無鬪心 庾信曰 “吾聞 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或搴旗 諸軍乘勝鼓譟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해석51년(629)년 가을 8월에 왕은 대장군 용춘과 서현, 부장군 유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성을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사뭇 성대하여 우리 군사들은 그것을 보고 두려움에 싸울 맘을 잃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소매를 펼치면 갗옷이 단정해지고 벼리를 끌면 그물이 펼쳐진다 들었다. 나는 소매와 벼리가 되고자 한다"라 하였다. 이어 말에 올라 칼을 뽑고 적진으로 곧바로 나아갔다.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나오메 매번 돌진할 때마다 적의 장수..
원문三十年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해석30년(608) 왕은 고구려가 계속 영토를 침입해오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병사를 청함으로써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원광에게 명을 내려 걸사표(군사를 청하는 표문)를 만들라 하였다. (원)광이 말하기를 ‘나의 안전을 구하기 위해 타인을 멸하려는 것은 사문의 길이 아니지만 빈도(승려가 자신을 낮추는 말)가 대왕의 땅에 살면서,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으니 감히 이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이에 (표를) 지어 올렸다. 한국의 불교를 말할 때 흔히들 호국불교라고 합니다. 고려 말에 유학자들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어 결국에는 신국가에서는 강하게 ..
원문薛罽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罽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太宗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蹕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 左右奏新羅人薛罽頭也 皇帝泫然曰 "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 問從者 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해석설계두는 신라의 귀족의 후예다. 일찍이 친구 4명과 같이 어울려 마시길 즐겼는데, 각자 그 (마음에 품은) 뜻을 말하는데 계두가 말하기를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논하니 진실로 그 (높은) 종족이 아니라면 비록 빼어난 재능과 탁월한 공이 있어도 능히 ..
원문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 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盍逃乎” 曰 “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 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원문 번역검군은 (관아를) 나와 근랑의 문하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필히 말이 새나갈 것이다’라 하였다. 드디어 그를 불렀는데, 근랑은 그 모살(기도)를 알고 근랑에게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근랑이 이유를 묻자 검군은 아무 말도 안했는데 다시 세 번을 묻자 이에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였다. ..
아주 오래간만에 이 블로그의 본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고구려 전쟁기록 두 편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충분한 자료가 모이지 않은 관계로 우선은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그런 땜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미안한 맘이 들기도 할 정도입니다. 원문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大日伊湌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번역 검군은 대사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다. 건복 44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