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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사론 02 - 나물왕즉위년조의 사론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사론

사론 02 - 나물왕즉위년조의 사론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7. 2. 11:35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나물왕즉위년조

원문

論曰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是故 魯公之取於吳 晋侯之有四姬 陳司敗 鄭子産深譏之 若新羅 則不止取同姓而已 兄弟子 姑姨從姊妹 皆聘爲妻 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 若匈奴之烝母報子 則又甚於此矣


번역

논하여 가로되, 처를 취함에 있어 동성은 취하지 않음은 구별이 두터운 것이다. 이에 고로 노나라 공이 오에서 (아내를) 취하고, 진후가 4명의 희(씨성)를 취한 것은 진의 사패와 정의 자산이 그것을 깊이 비판한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동성(의 아내)를 취함에 그치지 않고 조카와 고종, 이종자매까지도 모두 찾아가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하다고 중국의 예로써 이를 책하는 것은 매우 어긋난 것이다. 흉노의 경우에 어미와 사통하고 자식과 사통하는데 이보다 심한 것은 다시 없다.


아주 오래간만에 사론을 읽자니 번역이 정말 개판이 됩니다.(여기서 번역의 품질을 논하지 말고 좋은 판본을 골라 읽어주세요) 겨우 끙끙거려 하다보니 사론은 그냥 정문연본 긁어서 하기로 마음먹은 거 아니었던가..란 생각도 드는데 이미 했으니 몰라!


위의 김부식의 평은 나물왕 즉위년조에 나물왕의 인적사항을 언급하면서 붙은 것입니다. 그의 왕비는 그의 사촌이었지요. 적어도 유교의 영향권 아래 놓인 고려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근친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와 중세의 신분제에 대한 기본 인식의 차이였기 때문이죠. 물론 중세의 귀족신분도 귀한 몸이긴 했으나 희소성에 있어 고대귀족과 비할 바가 못됩니다. 고대 귀족들은 타 신분들과 물질적인 면도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피도 다르고 살과 뼈도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왕족과 다른 신분이 결혼한다. 한마디로 피가 섞이는 것인데, 이런 것이 요즘에는 순정만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될 일이지만 그 당시엔 사회 기반을 뒤흔드는 행위지요. 


그래서 중세에도 조금 그랬지만, 고대의 귀족들은 특히 근친혼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워낙 귀족의 수가 적다보니 결혼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적습니다. 

특히나 왕족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얼굴 몸매 따질 여유는 없습니다. 

정말 남자도 애를 낳을 수만 있었다면..이라는 건 제 망상이지만 그만큼 결혼은 절실한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이 시대의 신분제의 주된 뿌리는 바로 '피'이기 때문입니다. 

잘난 집안일수록 신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와 연결을 내세우던 당시에 

그보다 못한 상대와 연을 맺는다는 것은 자기 피의 품질 저하를 의미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 집안 전체의 하락을 의미합니다.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연결이 나올 경우 가족, 집안이라는 집단은 

자기들의 위치를 흔들려는 '악행, 사회파괴행위'로 봅니다.


그렇다고 적으면 얼마나 적겠느냐 하실 수도 있는데, 정말 귀하니까 귀족인 겁니다. 

헤이안시대의 일본 인구를 다룬 어느 표에서 900만에 가까운 사람들 중

중,하급귀족과 그 아래 하급관료군들이라고 해야 1만 3천명 정도입니다. 

소위 말하는 황족이나 귀족이 약 200명. 

이 수치가 남성만을 의미하는지 여성까지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여성까지는 아닐껍니다(그랬다면 이때 이미 여성들이 관리가 되었겠죠) 

하여간 겐지모노가따리에 나오는 그런 귀족들의 수는 200명이 채 안된다는 겁니다. 

여성까지 넣어서 400명이라 해두죠. 그런데 노인, 아이, 기혼자를 제외하고 나면 

그 시절 처녀총각의 수는 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네, 이 시대의 상류신분층에서 고르는 것은 사치입니다.


김부식은 이러한 근친혼에 대해 비판하는듯합니다. 

춘추전국의 고사를 빌어 노나라 소공이 오나라의 공주를 얻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나라나 노나라나 다 주 문왕에서 나온 뿌리들이죠. 

그래서 노나라에서는 희씨성의 아내를 오씨라고 공식발표합니다. 

또 주 왕실에서 분가한 진에서 주나라 공주 4명을 아내로 삼습니다. 

이것을 진의 사패와 정의 자산이 비판했다는 말을 적으며 근친혼에 대한 입장을 밝힙니다. 

그러나 외국에 있어서만큼은 중국의 예를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흉노는 모자지간에 서로 쿵짝쿵짝도 하는데 이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고 덧붙이며 말이죠. 

어라, 이상하네 이 인간이 대체 뭐라하는 건가?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고려 초의 근친혼입니다. 

고려태조 왕건은 형제자매끼리 붙여주며 딸에게 황보씨라 하여 스리슬쩍 넘어가기도 하지요. 

자기 왕조에 이런 예가 있으니 김부식이 조심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기만 했을까요? 

당나라 율령엔 공식 행사에 글 한 자 잘못 쓰거나 잘못 읽은 자를 벌하는 조항도 있습니다. 

명태조 주원장도 자기의 과거와 관련된 글자를 쓰거나 비슷한 발음의 글자가 나오면 죽여버렸죠.

연산군 때 사회를 불러일으킨 조의제문도 그렇고,

이규보같은 사람도 글씨 잘못 넣었다고 탄핵갇기도 합니다. 

왕조시댄 그런 겁니다. 설화나 필화가 엄청 많습니다.


삼국사기를 비판하는 대다수의 논조는 사대주의에 맞춰져 있습니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자. 특히나 신채호 이래 이 시각은 거의 고정적입니다만, 

조선시대만해도 김부식은 얼치기 유학자로 비판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32개 사론, 각 지의 서문을 읽다보면 

김부식에 대한 인상이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어느 사론에서는 극단적인 사대주의가, 다른 곳에선 극우스런 발언도 튀어나올 것입니다. 

김부식이 써놓은 사대스런 것만 오려놓고 사대주의자라고 욕하는 몇몇 책들은 

삼국사기의 일부분만 보았거나 앞서 욕한 책만 보고 그렇구나..라고 써버린 걸 자백하는 겁니다.

(특히 정치인 유모씨, 당신말야!!)


김부식은 사대주의자도 꼴통유학자도, 그렇다고 국수주의자도 아닙니다.

(김부식 5형제 중에 4명이 과거급제자, 1명이 스님입니다. 불교를 배척했을리가요) 

다만 요건 어거, 조건 조거..하는 식의 중세보편주의자라고 보면 됩니다. 

사대하는 듯하지만 사안에 따라 국가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식이 아니라 나름 자기 기준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고유성과 보편성을 두루 이해하는 것은 중세인의 본성입니다.

현재의 국가, 민족에 고정된 사유로 그들을 이해하긴 좀 힘듭니다.

그렇기에 "중국의 예가 중요하긴 한데 

과거 이 땅에서 특수한 사정으로 일어난 일까지 따지는 건 옳지 않다"가 

이 사람의 진짜 속내일 껍니다. 

반면 조선조에 들어서 나온 사서에선 얄짤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보고는 선비정신 운운하며, 또 그들이 융통성 없을을 아쉬워하면서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진 잣대를 들이미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격한 용어가 목까지 올라오지만..아잉~)


말꼬리 : 

내물왕이라고 배우셨겠지만 점차 나물왕으로 부르는 추세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국사시간 테스트에 틀리면 혼나던 시절에

정답이 내물왕인 문제가 나왔는데 옆 친구가 막혀서 '뇌물왕'이라고 해줬더니

정말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더군요.

물론 저는 그날 내내 쉬는 시간마다 도망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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