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가. 박인호, 한국사학사대요 제3판, 이회, 2001.한국사학사에 대한 입문서로는 유일한(이 문제는 다음 책 소개에서 다룬다) 책이다. 저자는 평생 한국사학사란 우물만 팠다. 조선후기가 주종목이지만 그 앞시대도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3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책을 내놓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나온 1996년부터 2001년까지 3판에 걸쳐 나온 것은 장점이나 2001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약간 아쉽다. 아직 소수파인 사학사라는 분야가 정치사나 경제사회분야보다 활발한 것은 아니지만 20년 넘게 성과가 축적되고 있으니까 이제 새로운 판이 나아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최근 그래24에서는 품절이나 알라딘에서는 구입가능하고, 교보는 아직 품절이 뜨지는 않았다.나. 이기백, 한국사학사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왕조(조선이라 해도 둏다) 시절의 미담을 그 자체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단 이 글의 시작은 페친님의 글에 댓글을 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국왕의 행차는 대사건이다. 왕궁이 왕경의 상당수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이유가 그 안에 갇혀 딴생각하지 말고 일하란 이야기다. 그리고 경복궁의 실제 면적은 자금성과 큰 차이가 없다. 진짜 유생들이 25평 아파트만 주고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했으면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걸주가 되어버렸을 것이다.(명나라는 자금성을 주었는데도 그리 막장황제 투성이다. 연산군을 가져다 놨으면 성군이라 불렸을게다) 여담이지만 조선의 역대 왕은 정궁인 경복궁을 둏아하지 않았는데, 아주 효율적으로 일만 하고 잠깐 쉬라고 설계되어 왕들에겐 숨 막히는 곳이었다고 ..

지금 보는 사료가 정확하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작성자의 악의적 의도에 의해 오염될 수도 있고, 또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어휘나 관념, 제도의 차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자기 시대의 것을 기준으로 하여 착오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이를테면 100여년 전에는 아가씨는 매우 귀한 신분의 여아에 대한 존칭이었으나 50년 전에는 결혼을 안한 묘령의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다가, 지금은 하대하는 느낌의 비칭으로 씁니다. 현재의 용례를 가지고 과거에도 아랫것이 상전의 여식을 함부로 불렀다고 오해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실수가 사료를 오염시키기도 합니다. 원 작성자는 주석으로 남겼는데(보통 필사본이던 활자본이던 작은 글씨로 두 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세주細注라고도 합니다) 필사를 한다거나 필..

삼국사기 자체를 궁구하는 이는 매우 적은 게 현실이다만, 그 소수조차도 간과하는 게 있다. 지금 삼국사기가 완질로 남아있음이 매우 신기한 상황이란 거다. 그니까 20년대를 기준으로 조선 초, 경상도에서 판각한 3차 판각본의 일부만 남아있는 게 정상이다. 북송 이전 중국정사의 사례들처럼 여러 종의 사서가 최종 본 하나 나오면 다 사라지는 게 보통이다. 후한서도 20여종 가까이 남았지만 현재 범엽의 기전체, 원굉의 편년체 후한기 둘만 남아있다. 진서도 두자리수 넘게 있었지만 당태종 시절에 나온 것 하나만 남았다. 위서도 현존하는 건 위수와 위담(위수의 조카인데 당초에 개정판을 냈다)의 것을 스/깠/다. 구오대사인가 하나는 나중에 여러 책을 뒤져서 인용된 것을 추려 복원한 거다.누가 태운 것도 아니다. 안팔리..

삼국사기는 완성 직후부터 여러 차례 인쇄되었습니다. 과거의 책이라는 게, 요즘처럼 한방에 수백 부, 수천 부를 찍어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보관되다가 없으면 또 찍거나, 그냥 필사해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몇 번 말했지만 과거의 책은 특정 전쟁으로 불타는 것보다 일상적인 화재, 수해, 관리소홀 등으로 없어지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저 전쟁 한 번에 타오르는 장면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렇게 뇌리에 남을 뿐이죠.삼국사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네 번 목판본으로 찍고, 한 번 금속활자본으로 찍었습니다. 딱 이렇게만 찍었다가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 판본을 검토해 보니 이렇습니다. 현재 통용되는 각 판본의 연대는 아래와 같습니다.구분판본연대목판1차1146(인종 사후)~1174(명종 4년) 사이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