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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증왕 03 - 본격! 나라만들기의 첫 발..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지증왕 03 - 본격! 나라만들기의 첫 발..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9. 3. 12:13

원문

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해석

4년 겨울 10월에 군신들이 상언(上言:군주에게 말씀 올리다)하기를

"시조께서 창업하신 이래 나라의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

혹은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신 등이 보기에 신新이라는 글자는 덕업을 나날이 새로이 한다는,

라羅는 사방을 망하란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이 것을 국호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예로부터 보니 국가를 이끄는 자는 모두 제나 왕을 칭했습니다.

우리 시조가 나라를 세우신 후 지금 22대에 이르렀는데

단지 방언(고유어)으로 부르고 바른 존호가 없기에

지금 여러 신라들이 뜻을 모아 신라국왕이라는 존호를 올립니다"라 하였다.

왕이 여기를 따랐다.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지증왕4년조

사실 이 부분은 좀 이야기할 게 많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신라사는 그동안 안보던 것이라 좀 자신도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지증왕을 시작으로 중고기 특집을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이었다는 걸 깨달은 게 크죠. (이거 쓸라고 수백 편의 논문을 볼 수는 없는 겁니다. 다나카 요시키처럼 은영전을 쓸 수도 없구요) 지난주에 신라토성을 보고 지증왕은 완결지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벼운 몸을 일으켜 봅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천년이라고 보질 않았습니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나라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 내물왕 이전으론 올라가기 힘들기에 한참 후에 일어난 신라가 고구려보다도 앞선 것으로 역사를 끌어올린 게 아닐까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이것이 재야사학쪽에서 20세기 전반 일본의 한국고대사 부정논리와 유사하다고 공격을 받았는데 학계의 시각은 원사료를 수정해서 보자는 것이고 일본 학자들의 시각은 전면적인 부정이었으니 실은 거리가 멉니다. (물론 그들 중에서 츠다 소오키치같은 학자는 일본서기의 초기 천황기록은 뻥이라고 했다가 재판정에 설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은 지네 기록도 면도날을 날린 사람이지만 악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 요건 다음 기회에 다루죠))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고고학의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신라라는 국가가 의외로 일찍부터 존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경주에서 서력전후의 제철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신라도 일찍부터 존재한 것이라는 학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나라의 이#일이라는 작자가 식민사학의 잔재라고 욕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도 이런 분위기에서 만든 거지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국가건설로 보긴 애매한 점도 있습니다.

물론 도시나 국가, 문명의 전제조건 중에 금속제작이 들어갑니다만

그게 신라일 수도 있고, 신라 이전의 국가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신라의 원초적 형태가 발생한 것을 이때라 하더라도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

늦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직 나라의 이름도 제대로 고정된 것 없이,

사라, 사로, 신라, 계림, 서야벌, 서라벌, 서나벌, 신랑, 설라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학계에선 초기 소국단계를 사로국, 중고기 이후를 신라로 불러 구분합니다)

분명 실존을 하지만 아직 제대로된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김춘수의 싯구대로라면 여전히 신라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나라를 만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만

나는 존재한다는 자존의식도 중요합니다.

불러줘야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자존의 감각이지요.


제왕의 이름은 때때로 변했습니다.

시조인 혁거세는 수장이라는 뜻의 거서간을, 

아들인 남해는 무격 존엄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차차웅을,

다음부터는 잇빨이 많은자라는 전설로 불려지지만 

실은 정통성을 가지고 뒤를 잇는자란 의미의 이사금을,

지증왕 초반까지는 가장 우뚝 선 자, 여러 세력 중 가장 높다는 의미의 마립간을 사용해왔죠.

물론 금석문에서 보이듯 왕이란 단어는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 의미가 확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 6부의 대표자들도 왕을 칭했고, 신라의 왕은 가장 높은 왕이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기록 이후 신라라는 국호가 완전히 정착되고,

모든 사람이 신라왕을 절대지고의 존재로만 보진 않습니다.

여전히 강시의 생생한 기록인 금석문에는 왕은 매금왕이라고 불렸고,

다른 귀족들도 왕의 호칭을 썼습니다.

여러 귀족 대표자들의 회의는 제왕회의라고 불렸습니다.(帝가 아니고 諸입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존재한가고 해서 모두 일률적으로 좌향좌, 우향우를 하지도 않고

수백년간 내려온 관습을 쉬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여전히 입에 붙었겠지만

이 해 겨울로부터 서서히 신라는 나라다운 모습들을 제대로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왕은 신라국왕으로서의 권위를 갖추기 시작하고

왕과 여러 세력들 사이의 서열도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일어난 변화의 결과는 통일전쟁기에 겨우 완성될 정도로 느리지만

이런 건 고구려도 그랬고, 백제도 그렇습니다.

고구려사 하면 사실 광개토왕이나 장수왕대의 정복활동이나 만만세하지만

실제 그 왕들의 업적 이면에는 2백년 가까이 고집스레 추구한 국가체제 다지기가 있지요.

왕정이 없어진지 100년이 넘어가고, 공화정이 세워진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대통령을 제왕으로 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관념과 관습의 힘은 무서운 것이죠.


다음엔 드디어 신라장군 이사부가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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