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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에도 유행은 있다..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고대에도 유행은 있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0. 11. 23. 23:58
어느 조선시대사 분이 그럽디다.
10년마다 여인네들 옷 매무새가 달라진다고..
유방의 노출의 폭이나 치마길이 등에 변화가 있다는군요.
끽해야 4색당파마다 특색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뭐, 솔까말 조선시대 전공도 아니고 복식사도 아니니 
봐도 그게 그거 같습니다.

신라의 사신이 전진의 부견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죠?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그처럼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안악3호분 서쪽 측실의 부인그림


357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안악3호분의 부인벽화입니다.
나중에 보여질 그림들에 비해 한국색은 거의 없는 얼굴과 옷매무새로
동시대인 전연의 여러 벽화고분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에 거주한 여인의 첫 그림은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왕릉설은 사학사상으로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총의 시녀 그림..



5세기 전반의 것으로 편년되는 무용총의 시녀 그림입니다.
그림 기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구려만의 스타일이 나오지요.
오른쪽 섶이 왼쪽을 덮는 좌임도 중국의 것은 아니지요.
다른 그림에서는 여인들이 바지를 입는 것도 나오는데
당시 낮은 신분 아낙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저 그림의 두 여인만해도 신분이 좀 높거나, 높은 분을 모시는 사람이어요.
완전 치마는 아니지만 웃옷이 도포처럼 하의를 가리잖아요.
전에 오녀산성에 갔을 때 아래 박물관에서 
성쌓는 장면을 홀로그램으로 보여주는데 막일하는 여인들이 치마를 입었더라구요.
그거 고쳐달라고 했는데 고쳤을지는 의문입니다.(아마 변방의 오랑캐가 지끼는 말은 바람으로~~)

보충 : 아니구나.. 치마 입었네요. 끝만 나와 못봤어요.



이 짬 좀 되는 분은 좀 더 지난 후에 5세기 후반의 수산리 벽화에 출연중이신
귀부인이십니다.
아마 이 무덤 주인공 중 하나셨을 듯.
확실히 치마가 보입니다.(하지만 속은 알 수 없어요;;;;)
기왕 비교하는 김에 시녀언니 출현!


이 분들도 치마를 입었네요.
위의 분보다는 좀 더 높거나 아니면 귀족의 수행원들까지 치마가 퍼진 것일 수도 있지요.
이를테면 '나, 이런 분을 모시는 귀한 노동자야!' 이런 식으로요.


여기서 다카마쓰고분(고송총)의 여인들을 소환할 차례지만
7세기 이후의 유행을 주도하는 당의 복식을 가져다 봅니다.
당 중종의 맏아들로서 할매 측천무후한테 죽임을 당한 이종윤의 무덤 벽화입니다.
(한원으 저자인 장초금에 대한 기록 보면 황족들이 처형장에 장작더미처럼 시체놀이를 했죠.
이 분도 여동생과 매제와 같이 할매 디스하다 걸림;;;;)
7세기 이후에는 한중일 3국에(정확히는 당-통일신라-발해-일본의 4국)
중국식의 복색을 비롯한 생활양식이 그야말로 공유의 수준으로 퍼져 나갑니다.
발해 초기 공주무덤 벽화에서도 이런 양상을 발견할 수 있지요.
정창원의 유물이라거나 통일신라의 유물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자료를 제공하진 않겠지만
고구려의 복식을 다룬 정완진 선생의 박사논문에서 재미난 것을 봤는데
벽화고분에 나온 복식들을 분석해보니 시대차도 있지만 지역차도 있답니다.
국내성쪽에서는 고구려적인 면이 강한데 비해 평양쪽에서는 중국색이 강하다는군요.

아까 어느 분의 글에서 드라마에 나오는 4세기 고구려의 복식을 이야기하는데
6~7세기 자료 들고와서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한 번 올려봅니다.
그런 포스팅 보면 참 즐거워요.(이런저런 의미로)

※ 고구려벽화는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와 문화재청에서 펴낸 "고구려고분벽화"에서
    중국벽화는 장홍수가 펴낸 "중국당묘벽화집"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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