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전파와 수용의 이야기.. 본문
한때 고고학과 고대사 업계에서는 전파론이 강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진 문물이 저쪽에서 '하사'되어짐을 당하면 넙죽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혹시라도 지난세기 80년대를 풍미한 고대한일관계사 이야기를 접하신 적이 있다면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거의 삼국인들이 일본인들 턱 붙잡고 '아~해, 이 色姬야'하고 신문물 한 숫갈 입에 물렸다는 식의 관점. 그러나 문제는 중국과 우리로 무대를 바꾸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리 주장하다 80년대 한일고대사로 작게나마 복수하였다고 우겨보면 편하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을 중시하는 수용론이 쥬류가 되긴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고 좀 더 냉정하게 사안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나름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론이 주류가 되었다고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 단계로 가야한다. 받아들인 제도를, 아니 새로 접하게 된 제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그 소화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해할 때가 온 것이다.
이따금 한국고대사연구에서 중국제도(뭐, 우리한테 그만한 영향을 줄 나라가 듕궉밖에 없다만)의 이식移植을 논하는 주제가 나온다. 당장 생명을 좌우하는 무기류같은 물질분야라면 모를까 제도나 기술분야로 가면 당시의 고대국가가 이해하고 소화하는 속도는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느리다. 어느 자료에 문구가 나온다고 그 시대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고 생활이나 사회제도에 즉각 적용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문제는 그 소화 속도에 대한 증거를 고대사의 자료에선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게 신라 중고기의 지방 군정사령관인 군주軍主. 이건 위진남북조에서 등장한 관직인데 요즘 식으로 설명하자면 처음 등장할 적에는 군단장이나 사단장 격이더니 남북조 말기쯤 되면 대대장 격이나 마찬가지로 하락한다.(군단장, 대대장 비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인 신라는 현시점을 본 것이 아니라 제도의 첫 출발을 봤다. 만약 이것이 우연의 일치로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나마 이해/소화의 속도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북위 낙양성과 당 장안성
일본의 등원경
일본의 고대 도시 형성과정에서 등원경과 평성경의 왕궁배치 관련 한국학자인지, 일본학자인지 재미난 이야기를 했는데 694년 등원경을 지을 시점에는 당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도시건설에 대한 자료를 신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신라도 구닥다리 데이터를 가지고 있어서 당시 도성건설의 주류와는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설이 나왔다. 무슨 말인고 하니 등원경의 왕궁입지는 성 한가운데 위치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미 황궁은 도성의 북방에 위치한다. 군주는 우주의 중심이란 관념보다, 천자는 남면하고, 신하는 북면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이다. 아무리 당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하다고 해도 북위 낙양성 이래 정형화된 중국의 도성 구경을 안했을리 없다. 하다못해 쇼토쿠의 그 싹퉁머리 없는 국서를 던지러 간 사람들이 최종목적지 위치도 몰랐을리가!
신라 왕경
보통 삼국통일기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보는 자칭애국자들이나 통일신라 제도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게, 신라는 당나라물이 잔뜩 들었다인데, 별별 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서라벌의 도시구조는 왜 중국식으로 바뀌지 않았을까?(직관지 얘긴 종종했으니 오늘은 통과!)
고대사에서 발견되지 않는 흔적은 그래도 자료가 풍성해지는 고려시대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신란 이전의 기술사를 보면 적극적으로 송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는 것이 보인다. 의학으로만 한정하면 송나라 의사를 초빙해 단기 강좌를 연다던가 하는 식이다. 후기의 이야기지만 농업기술도 강남농법의 이식이란 게 있고. 그러다 후기로 가면서 서서히 고려에 적합한 처방과 약재 지식이 축적되기 시작한다. 귀족가문에 한정한다면 가문별 처방전이 만들어진다. 조선 전기 세종조 언저리의 의학 발전의 기반이다. 이규보가 당뇨로 안질을 심하게 앓는데, 최충한 아들내미가 동남아산 약재를 선물하는데 의사가 그거 짝퉁이란 평가를 내린다.(여기서의 개그포인트는 무인정권의 대빵도 사기당한 거) 그런데 그 약재 이름이 조선시대 지리서에 국산약재가 된다. 문익점의 모/카/커/피~처럼 가져다 심었거나 어익후 이게 국산도 있었네 하는 식이지.
보통은 성리학의 도입을 안향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중국에서 주자 이전 북송5자가 성리학의 기틀을 다지던 시점에 이미 고려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최충이 문헌공도를 만들 때 개나리반, 진달래반~하듯 9재의 이름을 붙일 때 성리학의 영향이 드러난다.
이거 당나라, 송나라 최신 기술이래~하고 접하는 것은 빠른데 그걸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의외로 느린 것이다. 애석하게도 관련 고대사 연구자들은 고려시대도 공부해야한다는 말쌈.
말꼬리 -------------------------
1. 그런데 평성경을 만들 때는 또 중국식을 그대로 적용한다. 이 문제는 당시의 시문집인 "회풍조"를 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정말 고대의 녹명관이다.(요 얘긴 몇몇 분들에겐 확 와닿으실 것이고 대다수는 지나갈 문제)
2. 지리시간에 모카커피가 예맨에서 비롯된 가장 오래된 상표라 했다가 깨진 적이 있다. 문익점이 모카커피를 가져왔다고 했다가 그랬다면 억울하지도 않지.
3. 과거에는 문물전파속도가 매우 느렸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 통일신라~고려전기까지 중국문물이 소개되는 속도를 따라잡은 건 90년대 중후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였다. 80년대 신문기사들을 보면 서울대나 포항공대에 10년전 저널이 최신자료라고 개탄하는 기사들이 종종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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