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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신라 서라벌에 17만명, 혹은 17만 가구가 살았을까?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신라 서라벌에 17만명, 혹은 17만 가구가 살았을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9. 6. 18. 16:36


이따금 경주의 복원 CG라며 돌아다니는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룡사를 검색하면 빠짐 없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 출처를 얼마전에야 알았습니다. 2016년에 경주시에서 제작해 공개한 영상의 그림이었습니다. 어느 커뮤 게시판에 올라왔던 걸 추적하다 보니(거기도 출처는 없었거든요) 발견한 것인데 거기에 실린 댓글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대개는 이렇게 거대할 리 없다. 조선시대 한양도 이거보다 작고, 거긴 초가집도 많았는데 이 화면에선 전부 기와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과정이 너무 심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그 반응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 한양도 그리 대도시가 아닌데 천년 전의 도시가 더 크고 반짝반짝 할리 없다 생각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겼다는 "고려도경"만 봐도 1100년대 전반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움집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만약 댓글을 남긴 사람들이 고려도경을 읽었으면 댓글은 더욱 강력했겠지요.

그렇다면 짐순이, 너도 과장이라 생각하느냐.

그렇진 않습니다. 고대와 그 이후 시대와의 다른 점은 넘치고 넘치지만 그 중에 하나 더욱 두드러진 것은 아니 머리가 팔할인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머리는 수도首都를 의미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부의 불평등,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큰 문제라고 하지만 고대인들의 기준에는 대한민국의 지/배/층은 매우 검소한 사람들이고, 지방이 이리 번성하다니 이러다 김헌창의 난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어쩔라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아니 이 나라는 군사력을 전부 수도 밖에 두었데! 어머어머 미쳤나봐)

이 말인즉 고대와 현대의 생각이 전혀 다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대 이전에는 지방이 발전해야한다는 사고는 매우 특이한 것입니다. 물론 고려말 성리학자들이 중국의 강남농법을 받아들여 자기 지역의 생산성 강화에 주력하고, 조선 후기에 다양한 지방의식이 싹튼 사례도 있습니다만(현대 지자체의 각종 역사현창사업의 뿌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발전을 도모한다고 해도 '먹고 살만큼'의 정도지 서울과 어께를 겨룬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과거로 올라갈 수록 모든 힘은, 자원은 서울에 모여있어야 했습니다. 지방에 세력가를 두기 보다는 서울로 불러들여 중앙귀족으로 만들어 세력기반과 때어놓는 것이 고대국가 형성과정의 필수 과정이었고, 국가의 군사력의 대부분은 서울에, 자기 손이 닿는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의 면적은 작더라도 그 힘과 인구, 경제력의 비중은 극히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매우 과정하자면 '머리가 8, 몸이 2'라고 표현할만 합니다.

흔히 신분제를 이야기할 때 어떤 이들은 고대 귀족이나 고려의 문벌귀족과 조선의 양반이 뭐가 달라서 따로 부르느냐고 합니다.(그냥 신분질서만 보자면 그리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귀족과 양반은 사유 체재부터 다릅니다. 아무리 양반 중에도 썩은 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의 기반은 극단적 공리주의에 가깝습니다. 특히 고대의 귀족은 국가의 거의 모든 부를 왕실과 같이하면서 부의 과시를 억누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안악3호분의 행렬도를 가져와 왕의 행차라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고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건 임금님이 밤에 "몰래" 궁을 나와 애인만나러 "미행"할 때 행차냐고 할 것입니다.(나의 임금짱이 이렇게 초라할리 없어!)

고대인들에게 경제적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하늘이 준 신분을 드러내는 게 무슨 문제일까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거나 이 나라가 이렇게 잘나가는데 기여한 영웅의 후손인데요. 현실의 부카니스탄만 봐도 평양만 보면 어디 세계 최빈국 같던가요.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 전체 국민의 생활과는 극단적으로 먼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말꼬리 --------------------

1. 만약 이 글을 읽는데, 짐순이가 '대한민국의 부의 편중과 중앙과 지방 문제를 옹호한다'로 읽혀진다면 조용히 상담받기를 권장합니다. 정신과던 뇌의학과던 말입니다.

2. 삼국유사 기이편 금입택조에 신라 전성기(이병도이래 헌강왕 때로 봄)에 17만 8천여 호가 경주에 거주했다고 기록하는데 어떤 이들은 17만 가구가 아니라 17만 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명에 끌리는 쪽인데 사실 17만 가구라도 해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3. 잘 모르는 분야니 보통은 넘어가는데, 내황전이란 전각의 현판이 '전황내'라고 해야하는데 '내황전'으로 된 거하고 잘 씻지도 못하고 닦지도 못하는 시대에 너무 깨끗한 것 아니냐는 건 지적할라고 합니다. 현대도시보다 더 깔끔합니다. 갠적으론 NHK 대하드라마 "키요모리"에 묘사된 정도가 맞다고 생각.

4. 2000년대 초반 후타바사의 무크지 "CG일본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걸로 보이는데, 이 정도면 우리도 한 번 그런 시리즈로 내볼만 하지 않을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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