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웅진기 백제의 무덤에서 나온 중요한 단서 본문
475년의 파국에 대해서 대개는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는,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수도를 잃었다, 왕이 죽임을 당했다, 그 정도면 꽤 아팠겠다 싶은 인상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475년 한성 함락은 백제인들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건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사실 실상을 알고나면 어느 정도는 공감가는 일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고민 거리 중 하나가 지방소멸, 수도권의 비대화입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아예 머리가 8, 몸이 2인 상황입니다. 수도에 모든 것이 몰려 있는 정도가 극단적으로 심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을 보여주면 서울은 아예 식물인간 수준이 아니냐고 할껍니다.
475년의 한성함락은 1950년 서울을 점령당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서 머리와 심장을 분리한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고대국가에서 수도는 네트워크 망으로 연결된 거대한 서버, 국가 전체 발전량의 80%, 의사결정기구를 합한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단순한 백성 1, 2, 3이 아니라 국가의 핵심인력입니다. 거기를 점령당하고, 많은 이들이 죽고 8천 남짓의 사람이 끌려갔다면 국가의 핵심 시설이 멈추고, 거의 모든 관리자, 연구인력이 증발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웅진으로 천도해 국가를 재건한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입니다.
비슷한 예로 서진의 멸망과 동진의 건국이 있겠지만 백제에서 일어난 사건이 더 끔찍했을 것입니다. 475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웅진에서 눈이 벌개진 몰골로 살았을 모습은 현대 노동관련 부서에서 봤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것입니다. 정말 극한의 노동조건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올라온 신문기사를 보셔도 좋겠지만 문화재청의 보도자료를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여러 기사의 원전이기도 하고, 그만큼 현재까지 알 수 있는 사항들에 대해 오독할 여지가 적습니다. 이 벽돌기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동어반복이기도 하고, 또 기와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무지 상태이니(암키와 수키와도 혼동할 정도입니다) 이 발견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만 끄적거리겠습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새로운 명문 벽돌 출토
일단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백제는 정말 거대 여객선이 침몰할 때 한 서너명이 알몸상태로 겨우 살아나온 것에 가깝습니다. 남은 것은 원래 기반도 아니었던 완전히 충성을 바치지 않는 지역들이고,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키보르를 움직여 국가를 조율하던 이들은 이제 없습니다. 정말 몸만 빠져나온 것과 다름 없어요. 그런데 국가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행정, 국방,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 기반 역시 소멸한 상태지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적은 것이 있으니 여길 보아주세요.
19 무령왕의 중흥과 성왕의 짧은 승리에 숨은 이야기
마치 1950년의 날벼락을 맞은 대한민국처럼 백제 역시 완전히 백지가 된 상태에서 빈 공간을 무엇으로라도 채워놓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을 것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공주의 벽돌무덤은 바로 그 움직임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대의 기록이지만 중국의 양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오려고 한 모습이 보입니다.
19년(541)에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모시(毛詩) 박사와 열반경(涅槃經) 등의 경전과 해설서[經義]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였더니 〔양이〕 이를 허락하였다.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성왕 19년조
물론 538년 사비천도 이후의 기록입니다만, 과연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겠느냐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남은" 기록만 찾아봐도 무령왕 때도 512년, 521년에 양에 사신을 보냅니다. 백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지만 고구려의 경우만 봐도 국내 기록에 나오지 않는 중국과의 외교교류가 꽤 나오니만큼(북위의 역사를 담은 "위서"의 경우, 열전에 나는 고려(고구려)에 몇 번 다녀왔다는 인물들이 꽤 나옵니다) 삼국사기를 뒤져보면 북위의 사신이 온 기록은 두 건이 전부입니다. 황해를 두고 서로 마주보는 상황, 외교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10년에 한 번 보냈을 리 없습니다. 한국역사에서는 중국이 '제발 빌테니 늬덜 자주 오지 좀 마라'고 해도 무슨 말이냐고 꾸역꾸역 사신을 보내어 정보와 이권을 탐하는 것이 기본 탑재 앱이라고요.
사실 백제 고고학, 또는 문화사를 연구하던 이들이 중국 남조의 사정에 눈여겨본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니라면(물론 멍청이는 고대사 안하죠..) 눈밝은 연구자라면 당연하게 관심을 가집니다. 남조 고고학 현장을 찾아가는 이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석실분이나 목관묘가 주였을 묘제문화가 갑자기 벽돌무덤으로 훅하고 우회전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동안 이 부분을 강려크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 아무리 고인패드립이 기본소양이라고 하더라도 어디 근본도 없이 굴러온 잡놈들이 아닌 담에야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단언하지 않는 종자들입니다. 고대사는 늘 자료가 충분하게 널려있지 않으므로 다른 시대 전공자들보다 더 입을 다무는 건 당연합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을 때는 잠자코 있다가, 증거가 나왔을 때야 움직입니다. 이 자료는 웅진기의 백제가 사라진 부분을 어떻게 채우기 위해 노력했느냐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어떤 이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게 뭐가 중요하냐고 하실 껍니다.(그렇다면 일본에서 한국 문물이 나온다고 침튀기진 맙시다. 사람色姬가 일관성이 있어야지) 하지만 475년 이후의 백제인들에게 이게 마데인지나냐, 국산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잠시라도 충혈된 눈을 쉬게 했을 것입니다. 고구려도 몇 차례 왕도가 점령당했지만 이런 비극은 668년 이전에는 겪지 않았습니다. 견훤이 쳐들어가기 전의 신라인도 몰랐을 경험입니다. 완전히 무無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고군분투하였을 당시 백제인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갑자기 이 시대에 훅 튀어나온 22부사(관청)의 탄생도 생각해볼 여지가 더 생겼습니다.
'한국고대사이야기 > 자료로 보는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의 한국어를 고대사연구에 사용하면 안 되는걸까? (0) | 2019.05.26 |
---|---|
아프라시압 벽화 속 고구려인 (0) | 2019.04.16 |
교란된 토층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0) | 2018.03.21 |
중국정사 조선전 (0) | 2018.01.03 |
책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2) | 2017.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