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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려시대의 저술ㆍ문집..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려시대의 저술ㆍ문집..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09. 11. 25. 11:58

1. 들어가며

삼국사기는 한국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문헌기록입니다.

동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김부식은 자료수집의 과정을 거쳐

전시대에 기록된 문헌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또 내부의 기록 속에 인용한 자료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인용서적은 중국의 사서오경부터 일본의 기록까지,

시문집으로부터 불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이 글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어떤 방법으로 쓰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입장에서

국내자료, 특히 고려시대의 저술과 문집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찾아내보려고 합니다.

과연 김부식은 어떤 자료를 보았는가를 넘어서,

동시대인들이 편찬했을 다른 자료들을 어떻게 취급했는가에 관심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지요.

 

2. 삼국사기에 인용된 자료

삼국사기에서 발견된 참고 자료들이 총 65건 이상이 발견되나

그 중에서 국내기록으로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 저술된 것들에 한정해서 모아보았습니다.

아래의 표는 36건에 해당하는 자료를 간추려서 도표화하였습니다.

표의 나열 순서는 연대와 저자, 혹은 둘 중

하나라도 분명한 것들부터 시대순으로 정리하였고,

시대가 불분명한 것은 뒤로 묶었다는 것을 밝힙니다.


저 자

제 목

시 대

성 격

전 거

미상

留記

고구려 초기?

역사서

 

高興

書記

근초고왕

 

居柒夫

國史

진흥왕

 

李文眞

新集

영양왕

 

미상

高句麗秘記

고구려 멸망 전

역사서?

 

金大問

高僧傳

성덕왕?

역사서

 

花郞世記

 

鷄林雜傳

 

樂本

역사서(음악사?)

 

漢山記

역사서(지방지?)

 

薛因宣

金庾信碑

중대?

비문

 

朴居勿

三郞寺碑文

경문왕?

 

金用行

我道和尙碑

하대 이전?

 

金長淸

行錄 10권

하대?

역사서(전기)

 

崔致遠

帝王年代曆

나말여초

(고려?)

역사서(연표)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즉위년조

鸞郞碑 서문

비문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조

謝追贈表

신라본기11, 진성왕 즉위년조

納旌節表

鄕樂雜詠

잡지1, 악지

上太師侍中狀

장계?

잡지3 지리1 신라강계

四六集 한 권

문집

열전6, 최치원

桂苑筆耕 20권

문집 30권

崔承祐

餬本集

열전6, 최승우

太祖

㽵義寺 齋文

고려

재문

신라본기10, 헌덕왕 17년조

미상

古記

미상

역사서?

 

海東古記

 

三韓古記

 

新羅古事

 

新羅古記

 

羅古記

 

古典記

 

本國古記

 

新羅傳記

 

一本

 


표. 삼국사기에 인용된 국내 자료

 

위의 표에 따르면 명확한 저자와 제목, 저술연대가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도표 상으로는 저자명 등이 알려진 자료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인용빈도수를 보면 로는 저자, 연대 미상의 일명 ‘고기류’가 과반수를 차지합니다.

이는 삼국사기의 전거를 찾는 연구에서는 요긴한 자료이나

오늘 찾아보려는 확실한 연대관이라는 입장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연대가 알려진 것들 중에서도

확실히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태조가 지은 장의사 재문 하나 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나말여초에 활약한 최치원과 최승우의 저술ㆍ문집도 여기에 넣었는데,

두 사람은 나말 여초의 사람이면서 신라가 온전하던 시기에

이미 성년을 맞이한 사람이기에 고려라는 범주에 넣기는 적절하지 못한 면이 많지요.

특히 최치원의 경우 적어도 효공왕 2년(898)에 해인사로 은거하여

후삼국과 고려의 교체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머얼리, 머얼리서 왕건을 응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야말로 개뻥)

최승우도 후백제에서 활동한 이래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집이 저자 생전에 완성되는 경우란 거의 없는데다,

이들이 사망하였을 시기 전후로 고려왕조가 성립하고 있기에

그들의 저작이 책으로 묶여지는 것은 적어도

고려시대에 들어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죠.

특히 최치원이 고려 현종 때에 문창후로 추증받은 것을 보면

뭔가 출판물이 많이 돌았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성을 갖지요.

여기서 주목해야할 고려시대의 저술ㆍ문집류에 대한 구분은 분명해졌으나

그 중요도나 빈도면에서도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치원의 제왕연대력이 신라왕호의 표기문제와 같은

중요한 부분의 전거사료로 인용되는 반면

다른 기록들은 지나가는 듯이 이러저러한 책/글이 있다는 식으로 서술되었습니다.

중요도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저술인 삼국사기 편찬에서

고려시대의 기록이 그리 중요한 기록으로 대우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3.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려시대 서술ㆍ문집

삼국사기에서 고려시대 기록의 인용비중이 매우 낮았습니다.

삼국유사는 매우 다양한 사료를 이용한 것과는 대조적이죠.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다양한 현지기록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김부식은 고려시대 사료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인색했을까?

우선 여러 가정들을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첫째, 삼국사기의 성격.

삼국사기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국가사업으로 이용한 일종의 국정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개인이 자유롭게 서술한 역사서였습니다.

사료의 취사선택이라는 점에서 매우 다른 입장을 가지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의 사료인용을 가지고 문제삼을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나름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쓰여진 시기의 문제.

고려 전기에도 거란의 침입과 같은 외침이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사람인 김부식이 예전자료를

더 많이 섭렵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죠.

(게다가 국가 소유의 기록은 전부 이용가능한 것이니까요)

일연의 시대에 들어서면 국내외의 각종 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자료가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더 다양한 국내기록들이 보이고 있으며,

또 전기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실록이 다 불타버려 다시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요

차라리 사료는 워낙 다양하지만

삼국사기가 추구하는 성격과는 맞지 않아 인용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더 타당성을 가집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고려 전기의 저술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문인들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 출판행위라 할 수 있는 문집을 살펴보면

고려 전기의 문집 편찬은 극히 미약한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기록에 남은 것이 적을 수도 있으나

매우 다사다난했던 고려 후기의 활발함을 생각하면

아직 고려 전기는 조용한(?) 시대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사학도 아직은 역량을 축적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고요.

이 점에 대해선 고려시대사 쪽의 연구가 더 활발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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