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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삼국사기에 인용된 국내 자료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삼국사기에 인용된 국내 자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0. 9. 12. 00:46

삼국사기에 인용된 자료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은 확실한 인용이 있는 것만 추려보니 총 65건 이상이 발견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내기록을 추려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저자

제목

시대

성격

최치원

제왕연대력

신라하대

연표

난랑비 서문

비문

謝追贈表

鄕樂雜詠

上太師侍中狀

표문

四六集 1

문집

桂苑筆耕 20

김대문

高僧傳

신라중대

전기

花郞世記

역사서

樂本

음악관련서적

鷄林雜傳

역사서

漢山記

역사서(지역사?)

김장청

金庾信行錄 10

신라하대

거칠부

國史

신라 진흥왕

역사서

이문진

新集

고구려 영양왕

고흥

書記

백제 근초고왕

설인선

金庾信碑

미상

비문

박거물

三郞寺碑文

최승우

餬本集

고려초?

문집

고려 태조

장의사 재문

고려초

제문

작자 미상

留記

고구려 초기

역사서

高句麗秘記

고구려 후기

海東古記

연대미상

三韓古記

新羅 古事

新羅古記

古典記

本國古記

 

위의 표에 따르면 명확한 저자와 제목저술연대가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도표 상으로는 저자명 등이 알려진 자료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저자연대 미상의 일명 ‘고기류’로 통칭할 수 있는 것이 과반수를 차지하지요. 이점은 나중에 김부식이 어떤 관점, 어떠한 자료를 가지고 썼는가를 규명하는데 긴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굵은 글씨는 설마 보았을까 싶은 책)

 

1. 金大問이 말하였다. 次次雄은 방언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를 일컬어 慈充이라 하였다.(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즉위년조)

2. 金大問이 말하였다. “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그것은)위계에 따라 설치되었다왕의 말뚝은 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왕의명칭으로 삼았다.(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즉위년조.)

3.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崔致遠이 지은 帝王年代曆에서는 모두를 아무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쓰지 않았으니혹시 그 말이 촌스러워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左傳과 漢書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나라 말인 곡오도흉노 말인 탱리고도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지금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즉위년조)

4. 이는 金大問의 鷄林雜傳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韓奈麻 金用行이 지은 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신라본기4, 법흥왕 15년조)

5. 가을 7월에 이찬 異斯夫가 아뢰었다“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褒貶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니이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 왕이 진실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國史를 편찬케 하였다.(신라본기4, 진흥왕 6년조)

6. 金大問은 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고 최치원의 鸞郞碑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신라본기4, 진흥왕 37년조)

7. 古記에 이르기를 ‘貞觀 6년 임진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신라본기4, 진평왕 54년조)

8. 여러 古記에는 ‘임인 7 27일에 죽었다’고 하였는데….(신라본기8, 효소왕 11년조)

9. 古記에 이르기를 ‘永泰 원년 을사에 죽었다’고 하였으나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모두 ‘大曆 2년에 신라 왕 憲英이 죽었다’고 하였다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신라본기9, 경덕왕 24년조)

10. 평양은 지금(고려)의 楊州이다태조가 지은 장의사 재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평양의 명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신라본기10, 헌덕왕 17년조)

11. 古記에 이르기를 ‘왕위에 있은 지 18년인 寶曆 2년 병오 4월에 죽었다’고 하였고신당서에는 ‘長慶과 보력 연간에 신라 왕 언승이 죽었다’라고 하였다그런데 자치통감과 구당서에는 모두 ‘太和5831에 죽었다’고 하였으니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신라본기10, 헌덕왕 18년조)

12. 古記에 이르기를 ‘왕의 즉위 원년의 일이다’라고 하였다.(신라본기11, 헌강왕 5년조)

13. 崔致遠文集 제2권 謝追贈表에 말하였다… 또 納旌節表에서 말하였다.(신라본기11, 진성왕 즉위년조)

14.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고구려본기1, 동명왕 즉위년조)

15. 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그러므로 ()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되지 않는다.(고구려본기3, 태조왕94년조)

16. 大學博士 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新集 5권을 만들었다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留記라고 하였는데이 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고구려본기8, 영양왕 11년조)

17. 또 高句麗秘記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는데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 보장왕 27년조)

18.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뒤에 이어지는 것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저술의 기록백제본기1,온조왕 즉위년조)

19. 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을 기록함이 없었다.이 때에 이르러 博士 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백제본기2, 근초고왕 34년조)

20. 그러나 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었다또 살펴보니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요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昆支의 아들로서 그 할아버지를 모도라고 하지 않았으니 齊書에 실린 것은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백제본기4, 동성왕 23년조)

21. 신라 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했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었다… 신라의 國子博士 薛因宣이 지은 金庾信碑 및 朴居勿이 지었고 姚克一이 쓴 三郞寺碑文에 보인다.(백제본기의자왕 21년조 사론)

22. 3차례의 고기인용(잡지1, 제사지고구려와 백제의 제사의례)

23. 거문고의 제작에 대하여 新羅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羅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崔致遠의 詩에 鄕樂雜詠 다섯 수가 있으므로 지금 여기에 기록한다.(잡지1, 악지)

24. 신라의 崔致遠은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말하였다.(崔致遠文集 上太師侍中狀잡지지리신라강계)

25. 古記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卒本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 옛 사람의 기록(古人記錄)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 지낸 햇수가친절하고 자세하기 이와 같다.(잡지6, 지리4, 고구려강계)

26. 古典記를 살펴보니東明王의 셋째 아들 溫祚가 前漢 鴻嘉 3년 계묘에 卒本扶餘로부터 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년을 지냈다.(잡지6, 지리4, 백제강계)

27. 고구려와 백제의 관직은 연대가 오래되고 기록이 애매하기 때문에 상세히 다 알 수 없었다지금 다만 古記 및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으로서 志를 만들었다… 左輔右輔左將上佐平北門頭이상은 本國古記에 보인다.(잡지9, 직관하 고구려ㆍ백제직관)

28.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金逍衍이다’하였으니서현은 혹은 고친 이름인지혹은 소연은 字인지모르겠다의심이 되므로 둘 다 적어 둔다.(열전1, 김유신 상)

29. 유신의 현손으로 신라의 執事郞인 長淸이 (유신의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는데꾸며 만들어 넣은 말이 자못 많으므로 이를 줄이고 그 중에서 기록할 만한 것을 취하여 傳을 지었다.(열전3, 김유신 하)

30. 이것은 신라의 전기와는 대단히 다르나 杜牧이 傳을 지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열전4, 장보고ㆍ정년조)

31. 新羅古記에 ‘문장으로는 强首帝文守眞良圖風訓骨沓이 유명하다’고 하였으나제문 이하는 행적이 전하지 않아 전기를 세울 수 없다.(열전6, 강주)

32. 신당서 藝文志에 쓰기를 ‘최치원의 四六集 한 권桂苑筆耕 20권이 있다’ 하고 그 주에 ‘최치원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 이름이 중국에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현종이 왕위에 계실 때 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명을 내려 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太平 2년 임술5월에 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열전6, 최치원)

33. 그가 지은 四六文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을 지어 餬本集이라 하였다.(열전6, 최승우전)

34. 金大問은 본래 신라의 귀족가문 자제로서 성덕왕 3년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그가 쓴 高僧傳花郞世記樂本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열전6, 김대문전)

35. 薛罽頭 (어느 책에는 薛을 薩자로 썼다) (열전7, 설계두전)

36. 김대문이 말하기를 ‘임금을 보좌하는 어진 인물과 충신이 이로부터 나왔고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三代의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열전7, 김흠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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