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약간 사료가 될 사진들 2. 박용만 생가터.. 본문
요 앞의 밭인지, 저기 비닐하우스인지 기억이 가물가물가물치군요. -_-;;
이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아시는 분은 매우 적을 겁니다.
강원도의 독립운동가면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3인 중 한 분인 박용만 선생의 생가터입니다.
(다른 두 분은 유인석, 이은찬 선생이지요)
그러나 유인석 선생에 비해서 오늘 이야기할 박용만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그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을 원주의병, 제천의병이라고 부르지만
그 시작은 춘천이었으므로 짐순이는 춘천의병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후일 극단적으로 갈라서긴 했지만 이승만과 매우 가까운 사이로
그의 첫번째 부인에게서 난 장남을 데리고 미국에 갈 정도의 친분이었고,
(그 아이가 죽자 왕손인 아들을 약하게 낳았다고 이승만은 부인과 이혼하지요. 띱떼!)
이승만과 함께 미주한인운동에서 3대 중심인물이기도 했습니다.(다른 1인은 도산 안창호)
앞의 2인과 달리 박용만은 무장독립투쟁과 경제기반 구축에 힘쓴
매우 특이한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네브라스카 주에서 학업에 종사하며 1909년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
조선인 유학생을 위한 군사학교인 한인병학교를 설립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하와이로 건너가 그 곳의 동포들을 규합하여 경제기지 구축에 힘씁니다.
(물론 나중에 이승만의 뻐꾸기 행위의 희생양이 되어 버리죠. 띱떼!!)
상해임정과의 충돌을 겪기도 한 그는 북경에서 경제기반구축에 힘쓰다
1928년에 의열단원으로 알려진 이구연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일설에는 일본과 내통한 것으로 오해를 받아 처단당했다고도 하고(일본의 이간질)
또는 의열단과의 관계 악화라고도 하고
이래저래 19세는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사정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를 살해한 이구연은 후일 6.25때 노령으로 자원입대하여
소령의 계급으로 대구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전사했다는 위키백과의 설명이 틀린 것 같은데
그 자료를 어디서 봤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승만과는 척을 진 사이가 되었고(그래도 그의 사후 제기된 변절설만은 부정했더군요)
안그래도 임정을 뒤흔든 사건의 중심이었으니 임정계열과는 앙숙관계였기에
그야말로 그가 주목을 받을 기회란 거의 없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강원도에 단 3명밖에 없는 훈격보유자고,
그의 가까운 일족들이 철원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수행하였음을 생각할 때
어느 독립운동가들의 말로나 역사적 기억이 순탄했겠냐만은 아쉬움이 큽니다.
언젠가 그의 훈격이 더 상위인 대한민국장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대로인 것보면 성공하지 못한듯 합니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224번지.
몇년전 그의 생가를 찾는 일에 동행을 했는데
당시 그의 생가 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내에 극히 적었습니다.
여름에 찾아간 그의 집터는 비닐하우스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든 친일파의 후손을 잘먹고 살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거지가 된다는 말도 늘어놓겠건만
여기엔 또 하나의 현대사 비극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현재 철원에 거주하는 전쟁 이전 토박이의 비율은 매우 낮습니다.
철원이 전쟁 후반의 격전지가 되고, 또 군 자체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어
원주민들의 대다수가 고향을 등지고 말았고,
현재는 전쟁 이후에 군부대의 배치를 따라 이주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독립운동의 댓가는 항상 처절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곳만은 그것조차 기억해줄 사람도 안남은 것이지요.
그런 아픔과 함께 짜증이 났던 것은 철원에서 밀고 있는 역사인물이
박용만이 아니라 궁예였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그의 정치가 사실은 미륵, 말세신앙에 기초한 신정정치라고 하더라도
(많은 분들이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에서 궁예를 재평가햇다고 기억하시지만
그보다 앞서 김성한의 태조 왕건이라는 소설이 원조이지요.
왕건의 첫사랑이다가 어른들의 사정으로 궁예의 왕비가 되는 여인을 가정하고
또 그녀의 이름이 연화라는 것도 똑같아 좀 의심을 하는 중입니다)
분명 그리 환영받지 못한 정치를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과연 이 땅에서 최초로 무장독립운동을 펴고,
수많은 재미 유학생과 이주민의 경제기반구축과 독립기지 건설을 추구한
독립운동가보다 더 내세울만한 것인지
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이해되지는 않더군요.
(뭐, 몇년전의 가평군이 왕건 드라마 이후 양길이 죽은 곳이라고
자기네 역사인물이라고 주장하다 원주시와 약간 애매모호한 상황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또 이것이 어른들의 사정인가.. 좀 싫다는 기분도 듭니다)
작년부터 사용되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중에
박용만의 사진이 실리고 자세한 소개가 있었던 것 같아서 내심 좋아했었고,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가지고 있는 교과서들을 들쳐봤는데
어느 출판사판에 실려 있었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뭐, 지난 화요일에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며 기차표를 끊어놓고
전철 개찰구를 통과해 양쪽으로 교통비를 지출한 뇬이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역에 갔더니 이미 늦었다고 하네요. 잉~~~)
말꼬리 -----------------------------
일전에 유일한 선생의 위인전을 들쳐보다 보니
네브라스카에서 한인병학교를 세웠을 당시 여기에 참여했었다고 나오는군요.
유일한 선생도 20세기 한국이 낳은 엄친아급 인물이시죠.
그 시절의 박용만 선생의 사진입니다.
기억 안나는 교과서에도 이 사진이 실렸지요.
근현대 한국인 최초의 ROTC이자 원조 밀덕"꿈과 희망의 군국주의자"(!)
위키백과에서 긁어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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