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세상의 모든 왕들. 금관총의 주인은 누구인가.. 본문
위의 신문기사에서 따왔습니다. 저작권은 해당기사를 작성한 신문사에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 이후 단일화된 권력만을 보고 자란 분들에게
고대사에 권력구조를 이해시키기가 힘듭니다.
언젠가 조선시대 후기 연구자이신 분과 대화하다 싸울 뻔 했던 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니 그 분과 저의 개념 자체가 달라요.
선조가 아무리 발광을 해대도 이순신이 택할 길은
죽어라 충성을 바치거나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는 길 밖에 없지요.
충무공에게 던져진 카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중앙집권화가 상대적으로 늦은 유럽도
프랑스왕에 대해 독자적 왕국 수립을 모색한 샤를 용담공같은 이도 있지만
그의 시대 자체가 왕에게 납작 엎드릴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한국의 고대는 다릅니다.
고대사에서의 국가는 일부 연구자들이 착각할 정도로 정연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기록에 담겨진 것처럼 정밀 기계같은 면도 있어보이지만
가끔 가고픈 이상과 실제 현실이 섞여버립니다.
실례로 헌법의 조항이 다 지켜진다면
대한민국은 정수라가 '아 대한민국'을 부르기 전에 이미 지상천국이었어요.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논의가 나올 필요도 없습니다.
헌법 9장(119~127조)만 봐도 됩니다.
1948년의 처음 제정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서울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였습니다.
1975년에 개정하며 평양이 수도라고 하기 전까지
서울은 북한 땅이었다고 주장할건가요??????.
자꾸 문맥에 혼을 빼앗기는 분들이 게신데
그거 읊조리는 게 역사학이라 생각하면 당장 집어치워 주세요.
그 문장 뒤에 숨은 것을 읽어야 역사연구가 시작되는 겁니다.
일전에 박대제 선생님이 분권국가라는 재미난 개념을 들고나오셨는데
개인적으로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분권국가로 봐야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머리가 나빠서 그 이야기 전체를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요.;;;;;;)
삼국통일을 전후로 한 대동란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고대국가는 매우 다양한 집단이 약간은 느슨하게 결합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전쟁이 국지전에서 국제전의 성격으로 바뀌어가고
국가의 총력전으로 변해가는 상황이라
서서히 느슨한 결합을 왕을 중심으로 결속하는 형태가 됩니다.
왕의 힘이 강해지기도 하지만 각 세력들이 이 상황에서
자기 이권을 고수하려고만 하면 판이 전부 깨진다는 인식을 했지요.
왕도 적당히 귀족세력으로 편입시키고 어느 정도의 권위와 권한을 인정해주지요.
고구려는 그 과정이 요즘 다루는 산상왕-동천왕대부터 시작됩니다.
소수림왕부터 장수왕에 이르는 동안 성공하나 싶더만
장수왕 사후 왕권이 점점 왜소해지지요.
그러다 평원왕(평강공주의 아빠) 때 중국이 갈구지, 신라가 쳐들어오지
이러다 판 자체가 사라진다고 케잌 나눠먹기라는 타협을 이루지요.
제로섬 게임에서 아주 제로가 될 수도 있거든요.
다만 고구려는 망하는 그 날까지 분권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백제는 뭐, 그 풍성한 경제적 기반과 많은 인구를 가지고도
끝내 무너진 게 그놈의 각 세력간의 조화에 실패했지요.
개로왕이나 동성왕이나 의자왕은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한 왕인데
하나는 고구려(로 도망간 부하)에게 죽고,
다른 하나는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마지막은 외국으로 끌려가 죽었지요.
자꾸 중앙집권화된 질서정연한 국가체제를 생각한다면
이런 사건은 그저 재수 없어 일어난 것이지요.
(황산벌 영화 초반부 백제의 회의 장면은 기가막히게 잘 표현햇더군요)
신라는 내물왕대로부터 지증왕에 이르기까지
6부에 의한 분권적인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세력권의 장은 왕을 칭했고
신라의 왕은 그 중 하나인 탁부의 장인 동시에
신라의 대표자, 여러 왕들 중 수석이라는 모습을 가졌습니다.
마립간이나 대왕의 호칭은 가장 뛰어난 지도자, 왕중의 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죠.
울진 봉평비나 영일 냉수리비, 포항 중성리비에 그려진
그 당시 모습은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활발하게 벌인 정복활동 중에도
피정복자를 완전히 신라인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주를 제외한 타지역의 피정복민은 '노인奴人'으로 불렸습니다.
노예가 아니라 피정복민,
아직 신라는 자국의 모든 자원을 체계적으로 내제화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한강유역확보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데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할 여력도 없는 상태에서
두 강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 빠져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진흥왕이 정복지를 순회하며 모두를 내 백성으로 다 아우르겠다고 하지만
노인을 엄연한 신라인으로 포용하는 건
경주인만으로는 벅찬 상황이 된 통일 전쟁기에야 가능합니다.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인권이 성장한 건
남자들이 모두 징집되면서 여성들이 군수물자에 동원된 후부터죠.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 할무이도 운전병으로 참전하셨죠.
현존 유일 2차대전 참전 국가원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기록에 나타나는 하나의 선언적 발언이 실제 뿌리박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제헌 헌법부터 여성인권을 보장했지만
그게 뿌리 내리게 된 건 90년대입니다.
그 전에는 성범죄에 직면한 여성이 가해자의 혀를 끊었는데
오히려 그 여성이 처벌 당할 뻔 했지요.
이상이 위의 신문기사에서 다루는
금관총과 칼의 주인이 살던 시대가 갖는 사회적 배경입니다.
아마 저 무덤의 주인인 이사지왕도 신라왕보다야 약간 떨어지지만
신라사회를 좌우하는 인물이었을 겁거니다.
칼과 고분에 대해서는 기사가 정리가 잘 되어있고
기사에 언급된 분들은 이 시대의 전문가들입니다.
(전덕재 선생님의 박사논문이 얇다고 만만하게 들었다가 피를 토한 기억이.. T_T)
고분과 칼에 대한 정보는 짐순이가 할 수 있는 말이 그리 없습니다.
다만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걸로 족합니다.
작년 2월에 찍은 금관총..
말꼬리 ---------------------------------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도자료도 첨부합니다.
위 기사에 소개되지 않은 자료 소개와 함께 좀 더 전문적인 설명입니다.
현재 시점에는 문화재청 보도자료는 올라오지 않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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