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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장보고 04 - 왜, 결말은 아름다운 것일까..(하편)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장보고 04 - 왜, 결말은 아름다운 것일까..(하편)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0. 7. 15. 03:23

한달은 넘기지 말아야지라고 마음먹었는데 결국 한 달을 넘겼습니다.
뭐 주목받는 글은 아니지만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그것이 아니죠.
오늘은 드디어 장보고전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글도 정말 변비 같아서 나오는 것도 힘들지만 
속에서 삭히는 것도 병이 됩니다.

왜 장보고전은 행복한 결말일까요?
김부식은 무슨 생각으로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열전에 넣었을까요?
오늘 풀어야 할 의문은 두 가집니다.
자, 하나 하나 풀어보도록 하지요.

아시다시피 장보고의 결말은 비극적입니다.
839년에 신무왕 우징을 도와 민애왕정권을 무너뜨린
장고보는 식읍 2천호를 받는 등의 지극한 대접을 받습니다.
신무왕이 즉위 직후 죽자 아들 경응이 문성왕으로 즉위하는데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합니다.
게다가 그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고도 하지요.
그것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지요.
정말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알아서 죽인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장보고가 구축한 해상교역 시스템과 군사력은 공중분해가 되지요.
하지만 열전에서는 마치 공주가 나오는 동화처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먼저 생각해볼 것은 기전체가 가진 속성입니다.
편년체로도 쓸 수 있는 역사를 굳이 기전체로 쓰는 이유는
사건이나 인간을 복합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이를테면 전한 문제때의 유생 가의같은 사람은
사기의 가의열전에서는 재능을 펴지도 못한채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요절하고마는 여린 영혼을 그립니다.
그런데 일자열전에서는 지 주제파악도 못하고 비명횡사한 속물로 묘사됩니다.
사마천이 여기서는 칭찬, 저기서는 뒷담화하는 치졸한 인간이냐.. 그렇지도 않지요.
다만 가의라는 사람이 가진 다면적인 모습을 담기위한 장치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김부식도 그러한 면을 생각하고 이런 행복한 결말을 준비한 것일까요?

단서는 장보고,정년열전의 마지막 부분의 주와 
그 뒤에 따르는 당의 시인 두목이 지은 장보고전에 해답이 숨어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김부식은 신라의 전기가 열전의 내용과는 다르고 또 두목이 전을 지었으니
여기에 남긴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보통은 이 내용을 그냥 지나치지만 사실 김부식의 편찬태도와 맞물려 중요한 대목입니다.
바로 사료의 부족과 상반되는 기록의 존재에 대한 태도입니다.
김부식이 마치 신라위주의 사서를 썼다고 욕을 먹고 있고,
스치듯 보면 신라위주의 역사서를 썼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상태이긴 한데
과연 김부식이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축소시켰느냐를 다시 생각해주세요.
삼국사기가 쓰여진 1145년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지 500년은 지난 시간입니다.
신라가 멸만 것도 200년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에 비해 두 나라의 역사기록이 얼마나 남아있었느냐,
아예 김부식 이전에 신라사람들은 주무르지 않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김부식은 생각보다 원사료의 혜택을 덜 본 편입니다.
그럼에도 사료의 부족을 방치하지 않고 다른 역사서를 참조하면서 기록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상반되는 사료가 나오면 하나를 버리기 보다는 둘 다 취해서
독자들에게 판단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을 칭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록도 채용해놓고
신라 본전의 기록과 다른 게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제발 삼국사기 제대로 안읽고, 당시의 역사편찬의 기준을 모르고 떠느는 소리는 듣지도 맙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장보고와 정년의 전기가 위치한 지점의 문제입니다.
이 열전은 열전 4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뭐가 중요하냐면 김부식은 열전을 지으면면서 성격이 같은 인물들을 묶어놓습니다.
뭐 일자열전, 효행열전, 반역전..같은 것이죠.
이 열전들이 위치한 열전 4는 뒤에 따르는 5와 함께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한 무용으로 올라간 것이 아닌 국난극복에 힘쓴 이들이 올라가있죠.
을지문덕과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인문, 김양, 흑치상지, 사다함과 함께 올라가 있습니다.
이홍직 선생님은 열전 4에 들어가는 존재를 나라를 지키는 무훈을 세운 자라고 해석하셨는데
(이홍직, 「삼국사기 고구려인전의 검토」, 『한국고대사의 연구』)
열전 5나 7의 인물들보다는 더 격이 높은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무용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품격까지 지닌 인물이랄까요.
그럼 장보고전을 왜 여기에 넣었는가는 자명해집니다.
그는 단순히 해적들을 때려잡고, 왕위 계승전에 참가하여 바른 왕통을 세운 사람에 머무는 게 아니고
개인의 원한마저 나라의 위기 앞에서 잊어버릴 수 있는 존재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목의 글과 신당서를 지은 송기의 평을 같이 넣어 부각시키는 거지요.

더욱이 삼국사기의 편찬 목적을 개인적 실각의 아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에 의해 
아노미현상을 보이는 고려 귀족사회에 경종을 올리고자 한데 있음이 크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 사람의 우정은 극히 기려야 하는 것으로 부각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전설은 아름답게 끝맺을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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