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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검군 01 - 어느 흉년이 든 해의 기억..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신라이야기

검군 01 - 어느 흉년이 든 해의 기억..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1. 7. 30. 12:09

ㅎㅇㅎㅇ~ 이 오래간만에 보는 모자이크

아주 오래간만에 이 블로그의 본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고구려 전쟁기록 두 편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충분한 자료가 모이지 않은 관계로 우선은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그런 땜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미안한 맘이 들기도 할 정도입니다.

원문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大日伊湌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검군은 대사[각주:1]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다. 건복[각주:2] 44년 정해년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들이 다 죽었다. 그 다음해 봄과 여름에 기근이 드니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밥을 먹었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 혼자 받지 않았다. 


사인들이 말하기를 "모두 (곡식을) 받았는데 그대는 받지 않는가.
만약 양이 적어 그런 것이라면 말하게 더 주지"라고 하였다.
검군이 웃으며 답하기를 "소인은 근랑의 무리에 이름을 걸어두고 있소.  
풍월의 뜰[각주:3]에서 수행을 함에 있어서 그것이 의롭지 않으면 천금의 이익이 있더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법이오"라고 하였다.
이때 이찬[각주:4] 대일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하였다. 
그런고로 이와 같이 말을 한 것이다.


중요한 내용은 후반부에나 나올 것이니 미리 할 수는 없구요.
다만 이것이 7세기 신라사회 전반부의 사회상,
아직 잔존하는 초기국가 단계의 수평적인 사회질서가
수직적인 것을 강조하는 국가권력과 어떤 충돌을 빚는가에 대한
중요한 자료라고만 미리 이야기를 하지요.

우선 여기에 나온 이야기들을 간추리면 
진평왕 49년인 627년 여름에 서리가 내려 곡식들이 해를 입었습니다.
그 다음해에 그 여파로 기근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는데
그래도 효과가 없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
民賣子而食"다는 말이 붙어있지요.
우선 여기서는 자식을 팔아 밥을 먹었다로 풀었는데
문맥만을 놓고보자면 자식을 부자나 세력가에게 팔아서
그 댓가로 연명하였다는 뜻이 될껍니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매우 야박한 이야기인데
당시에는 기근이 든다거나 동란기에는 예속민이 되기를 자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세금 걱정은 없고, 전장에 끌려나가지 않아도 되고,
주인이 생존은 시켜주니까요. 
서양의 노예제를 생각한다면 어이가 없는 일이겠으나
동아시아에 그런 노예제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또 요즘 나오는 최저임금제니 노동3권이니 복지라는 개념은 전혀 없는 시대라 그럽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새수와 병력조달에 좋은 건 아니라
가급적 자유민을 유치하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됩니다. 
간혹 동란기에 국가 인구수를 정리하다보면 확 줄어버리는데
많이 죽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구통계에 안잡히는 예속민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중국 삼국시대에 들어서며 호구수가 확 주는데
상당수가 예속민의 길을  택한 겁니다.
또, 1910년대 이후 갑자기 인구수가 늘어나는데
이는 기존에 인구통계에 넣지 않던 낮은 신분의 사람들까지 계산하니 그렇습니다.
이를 두고 조조가 악인이어서 중국이 도탄에 빠졌다던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근대화시키니
생활수준 향상으로 인구가 늘었어요..라는 말을 지껄이면 누군가는 비웃습니다.

 
그리고 더 잔혹한 이야기지만 팔지도 못할 때는 서로 바꾸어 잡아먹는 경우도 있어요.
기근이 장기화되면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차마 자기 자식은 잡아먹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거지요.
빈약한 농업생산력과 백성들의 최저 생존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의 한 단면이지요.
물론 저 기록에서 식인을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예속민을 사들일 사람들의 경제력까지 잠식되는 극한상황에나 나온다고 못박지요.


사량궁에 일하던 사람들이 궁 내의 창고를 털어 곡식을 나누어 가졌죠.
검군만이 받지 않으니까 동료들이
검군아, 모자라서 삐친거냐? 아~ 짜식, 그럼 말하지. 더 줄께 받아가라..
이런 말을 하는데 검군은 나도 나름 화랑의 낭도인데 
이런짓은 옳지 않다라는 말을 합니다.
천금의 이익이 있어도 맘이 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맹자의 '생각함에 두려움이 없으면 천만인이 막아도 나아간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 검군과 그 동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To be continued..(과연 이 작자가 빨리 쓸 수 있을까나? 까나?)


※ 2011년이 반토막 써놓고 아직도 완성을 못하고 있습니다. 빠른 시일내에 마무리 합죠. 20120712..


  1. 신라 17관등제에서 12위에 해당되는 관등으로, 골품제상으로는 4두품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위칩니다.(물론 검군 아버지가 4두품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중앙관청에서는 5등급의 구성원중 중간인 대사(관직명이 관등과 이름이 같군요)까지 올라갈 수 있고, 지방에서는 태수까지 가능합니다. [본문으로]
  2. 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진덕왕에 이르는 기간에 독자적인 연호를 썼습니다. 법흥왕 23년(536)에 건원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하지요. [본문으로]
  3. 직역하면 화랑의 뜰인데 요즘 하는 식으로 바꾸자면 이 바닥..과 같은 어감이랄까요? [본문으로]
  4. 이찬은 신라 17관등제에서 2등급에 해당합니다. 1위인 이벌찬이 있지만 많지 않아 거의 총리급이라고 생각하면 될껍니다. 실제로 각 부의 장관인 영이 될 수 있고 지방에서는 주의 장관인 도독, 군에서는 장군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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