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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백제의 갑옷, 실물이 나오다..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백제의 갑옷, 실물이 나오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1. 10. 14. 14:34

올 초에 공산성에 갔을 적에
공산성 내 공북루쪽의 성안마을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백제의 갑옷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갑옷은 가죽 찰갑이며 옻칠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최고급인 제품이지요.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발굴된 것을 보니
습기 덕분에 명문같은 것이 잘도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가죽부분은 사라졌고, 그 위를 두껍게 덮어쓴 옷칠 부분만 남았습니다. 
갑옷에서는 아래와 같은 명문이 있습니다.
 

공주 공산성 갑옷 상세(명문) 출처 - 문화재청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정관 19년이라는 연대입니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 19년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645년입니다.
이 갑옷이 언제쯤 만들어졌느냐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적어도 이 것이 누구 것이든 확실한 연대가 알려진 갑옷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주 공산성 갑옷 출토 모습 출처 - 문화재청


위 사진에 보이는 찰갑편은 금속제로 보이는데(사진만 보면 그렇습니다)
이 갑옷이 가죽 갑옷이라고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금속으로 보완을 해도 이상치는 않습니다.
완전 금속재질로 만든 판갑옷이 아닌 이상은 부분적으로 복합해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갑옷의 방어력과 착용자의 기동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의 탱크처럼 복합장갑(?)을 택하게 되지요. 

공주 공산성 갑옷 상세2(찰갑) 출처 - 문화재청



마침 삼국가기에 재미난 기록이 있습니다.

27년(626)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명광개(明光鎧)를 바치고, 인하여 고구려가 길을 막고 당나라[上國]에 조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호소하였다. 고조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와서 조서를 내려 우리와 고구려가 그 원한을 풀도록 달랬다.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왕재성(王在城)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東所)를 붙잡아 죽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삼국사기 27, 백제본기 5, 무왕 27년조

백제에서 명광개를 당에 바쳤다는 실제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이것을 사용한 것이 다른 기록에서도 발견됩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 삼국사기  21, 고구려본기 11, 보장왕 4년조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15만의 고구려군이
당군에 의해 격파되고 항복하는 과정을 다룬 기록인데
여기서 당군이 고구려군의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갑옷을 많이 입었다는 방증이 될 것입니다.
일반 병사들은 아니더라도 최소 장교급에 지급하는 물건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미 무기의 관통력이 급격히 늘어났기에
갑옷이 방어력만을 염두에 둔 물건이 아니라
이제는 각 부대의 제복의 성격도 가진다는 점에서
갑옷의 디자인도 중요해졌음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백제 갑옷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첫째, 백제 생산품이냐 
둘째, 백제인들이 사용한 것이냐 아니냐
셋째, 혹시 백제의 수출품을 웅진도독부 치하의 당군이 남긴 것인가?

첫째는 위의 기록으로 봐서 백제 생산품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칠 원산지가 어디냐가 밝혀진다면 좋겠지요.
두번째 문제는 첫째의 물음이 해결된다면 뭐, 자연스레 해소될 의문입니다.
마지막은 너무 백제만을 염두에 둘 경우에 해석의 폭이 좁아지는 걸 막기 위한 겁니다.

우선은 지하의 습한 곳에 오랜 기간 있었기에
건조한 공기를 접한 유물이 산화되는 것은 막아야겠지요.
(우리에게 산소는 생명 그 자체지만 대다수의 물질에게 산소는 위험한 물질입니다)

나름 전쟁사 전공, 그것도 6~7세기쪽인데
명광개, 명광개, 그 이름을 계속 읊조려도
단박에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으니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이미지와 보도자료는 여기를 참조해주세요.
http://www.cha.go.kr/korea/news/newsBbzView!view.action?id=155696936&curPage=1&sectionId=b_sec_1&mc=NS_01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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