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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강남에서 이구년을, 당성에서 악사를..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강남에서 이구년을, 당성에서 악사를..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1. 17. 23:00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기왕(岐王)의 집에서 항상 그대를 보았고
최구(崔九)의 정원에서 노랫소리 몇 번을 들었던가
지금 이 강남은 한창 좋은 풍경인데
꽃 떨어지는 시절에 다시 그대를 만났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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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 당예종의 넷째 아들로 현종의 동생이기도 한 이범
최구 : 최척. 구는 최씨집안의 항렬에서 아홉째라는 뜻.
(번역은 김원중 역, "당시감상대관", 까치, 1992, 37쪽에서 따옴)


두보가 젊었을 시절에 기왕과 최구의 집에서 만나던
이구년을 강남에서 만났다.
한 명은 필명을 날리던 문사였고, 한 명은 노래 하나로 알아주는 가수였다.
안록산의 난을 맞이하여 이리저리 헤메고 다니다
강남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아,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데
우리들의 신세는 화사했던 개원의 영화를 지나
떨어지는 꽃과 같은 신세구려..라는 탄식이 배어있는 시다.
어찌보면 그 흔한 회고담같은 이야기기도 하며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구슬픈 인생살이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가 두보에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최치원에게도 있었더라.
이 시의 자세한 속사정이야 밝혀지지 않겠지만
나름 읽어보면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 서글픈 인생인 것은 마찬가지다.


당성에서 나그네로 노닐면서 선왕의 악관에게 주다

성했다 쇠하는 사람의 일이여
실로 서글픈 허망한 인생이라
누가 알았으리 천상의 곡조를
바닷가에 와서 연주할 줄이야
물가 궁전에서 꽃구경도 하였고
바람부는 난간에서 달도 보았지
반염이라 이제는 모두 끝이 났으니
그대와 함께 두 줄기 눈물 흘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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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염 : 임금의 승하를 뜻함
(번역은 이상현 역, "고운집", 한국고전번역원, 2009, 174쪽에서 따옴)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역자에 따르면 진성여왕 7년(893)에 하정사로 갈 적에 지어진 시라고 하는데
당으로 가던 항구인 당성에서 헌강왕 때 악관을 만나 지은 시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는 도둑이 많아 출발을 하지 못하였다)
무엇이 두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하고 
또, 궁전에서 들어야 할 당신의 노래를 여기서 듣게 되는지 모르겠다고
인간 삶의 성쇠를 이야기 해야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에서 아무리 이름을 날렸다고 외쳐봐도
그는 6두품이었다.
헌강왕이 죽은 후 최치원은 지방 태수직을 전전하는데
이는 귀족들의 견제 탓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요인들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 먼 바닷가에서 선왕 때의 악관과 상봉하며
늘어놓는 회포가 예사롭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늘의 소리를 연주하는 자와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자가
만나야할 곳은 아니었기에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방랑과 은거의 길.

경로는 다르지만 두 사람이 걸어간 마지막 행로는 소름끼치도록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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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고전번역원에서 고운집을 번역, 출간하고 나서
출판기념 세미나에 가서 이 책을 받아왔는데
그동안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이제야 읽다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데
두보는 알았어도 최치원은 몰랐으니
중국은 알고 우리는 몰랐던 조상들이나 후손들이나 달라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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