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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구려 후기의 관등 기록은 정확한가? 상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자료로 보는 고대사

고구려 후기의 관등 기록은 정확한가? 상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6. 3. 21. 16:50

관등이라는 건 쉽게 말해 9급 공무원이냐 장차관급이냐, 총리급이냐 하는 식으로 해당 공무원의 지위를 나타냅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등급은 그 권한의 차이를 보여주죠.(물론 봉급도 차이납니다) 지금도 공무원의 위계는 중요하지만 고대에는 더욱 중요합니다. 바로 그 시대가 신분제 사회기 때문입니다. 


돌쇠라는 사람을 가정해보죠. 거기에 그가 6급 공무원이라고 해둡시다. 그가 평민이나 천민같으면 절대 오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단순히 공무원 위계로 치면 1~5급보단 낮고 7~9급보단 높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하나가 더 붙죠. 만약 그가 신라 식으로 진골이라면 그냥 처음 임용된 직후에 받는 급수라고 해두죠. 아마 그는 꽤 젊은 나이일 겁니다. 만약 그가 6두품 정도의 신분이라면 평생 경력의 중간입니다. 앞으로 그는 한 두 등급은 더 올라갈 겁니다. 어쩌면 애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쯤 올라가는 한창 일할 나입니다. 만약 그가 4~5두품 정도라면 그는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장성해 가정을 이룬 자식들이 있으며 슬슬 물러날 날을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보통은 정년 전에 죽을 확률이 높죠)


고구려에는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그것을 골품제적 신분제라 부르죠)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아주 세밀하게 나가자면 4~5두품부터 어긋나겠지만 대략 이런 느낌이라 생각합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를 들어 6,7 등급은 어떤 이에겐 초임, 경력의 중간, 경력의 종착역으로 다릅니다. 좀 더 세밀한 관직체계를 갖춘 동시대의 중국이 관직의 중요성도 크다면 한국고대의 경우 삼국시대 후반을 제외하면 관등이 그의 경력에 매우 중요합니다. 신라나 헤이안시대 일본을 보면 겸직이 많기 때문에 관등이 더 중요하겠지요. 


아마 짐순이가 그 시대 귀족이었다면 중앙정부 내각의 장관 겸 왕경의 행정부서 주무관, 도서관리나 역사편찬 관청의 차관, 무슨무슨 위원회 부위원장, 무슨 성의 성주(아마 현지엔 대리성주가 파견되었을 수도), 무슨 학교의 교장, 전방 #$사단의 사단장이라는 다양한 직책을 보유할 것입니다. 다양한 직을 가지고 있기에 짐순이의 좌표는 관등에 집중될 수 밖에 없지요. 신분제사회의 특성과 관료조직이 체계적으로 뿌리박지 못한 사회의 결과입니다.(물론 고구려도 기록만 안남았지 중앙관청의 세분화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고구려의 관등입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도 언급이 있지만 그 내용도 중국 사서에 의존합니다. 중국 정사의 외국 관련 기록은 단순한 역사적 관계, 민족지적 견문도 담고 있지만 항상 적성국 내지는 요주의 국가에 올라와 있었기에 내정 조사 기록의 성격도 가집니다. 이를테면 외무부나 국정원에서 펴내는 "@#국 개황"의 성격도 가지는 것이죠.


기록이 정리된 것은 각기 다르지만 적어도 역사책에서 다루던 그 시대 자료가 기본이므로 어느 정도 시대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위서는 북위 멸망 후 수서와 북사는 당초, 신당서는 송 초에 쓰여졌지요. 위서의 시대는 5~6세기, 수서와 북사는 5~7세기, 신당서는 7세기 중반의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위서

수서

북사

신당서

한원

명칭

중국품계

별칭

1

대대로

태대형

대대로

대대로

토졸

1

대대로

2

태대형

대형

태대형

울절

태대형

2

막하하라지

3

대형

소형

대형

태대사자

울절

2

주부

4

소형

대로

소형

조의두대형

대부사자

3

알사

5

의후사

의후사

의후사

대사자

조의두대형

3

중리조의두대형

6

오졸

오졸

오졸

대형

대사자

4

대사

7

태대사자

태대사자

태대사자

상위사자

대형

5

힐지

8

대사자

대사자

대사자

제형

발위사자

5

유사

9

소사자

소사자

소사자

소사자

상위사자

6

계달사사자, 을사

10

욕사

욕사

욕사

과절

소형

7

실지

11

예속

예속

예속

선인

제형

7

예속, 이소, 하소환

12

선인

선인

선인

고추대가

과절

8

 

13

욕살

 

 

 

부절

8

 

14

 

 

 

 

선인

9

실원, 서인


짐순이가 주목한 것은 대형이라는 관등입니다. 6세기 인물인 온달이 사냥대회에 나가 실력을 과시하고, 북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요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받은 관등이지요. 6세기를 다루는 위서~북사 기록에 의하면 대형은 3등급입니다.(수서에서 대대로가 누락되었죠) 7세기 기록인 신당서에는 7등급입니다. 위서~북사(보통 북조계 기록이라 부르죠)는 고위 관등이 ~형, 뭔가 실무진 냄새가 나는 ~사자는 아래쪽에 위치합니다. 본디 관등이 체계적인 관료조직으로 생겨난 게 아니라 여러 세력들을 흡수하며 재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생각할 때 백제나 신라의 관등조직처럼 신분제에 따른 모습이죠. 그러나 신당서에는 이것이 섞여버립니다. 


여러 페이지를 붙인 겁니다.출처는 竹內理三의 교감본.


표의 반을 차지하는 게 한원이라는 책인데 연개소문 집권 직후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직방낭중 진대덕이 귀국 후 저술한 "봉사고려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직방이라는 것은 병부 산하의 관청으로 지도제작과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관청입니다.(엄밀히 말하자면 요즘 중앙부처의 국에 해당하까요?) 진대덕은 그 조직의 수장, 엄밀히 말하면 정보파트 차관이니 기록의 정확성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전쟁을 준비하던 당의 정보보고서니까요. 고대사학계의 고구려 관등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않습니다. 워낙 자료가 제한적이므로 다양한 견해가 나오기엔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북조계 사서보다 고려기에 바탕을 둔 한원과 신당서의 관등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짐순이가 의문을 가진 것이 과연 북조계 사서는 틀린 것일까? 그러나 중국에서 보기에 고구려가 골칫덩어리, 한 방 치고 싶은 개자식이었던 시절은 수당때만이 아닙니다. 북위와는 나름 평화를 누렸지만(덕분에 백제와 신라가 괴로웠죠. 정작 전적은 백제와 신라가 의외로 안밀렸다는 게 개그) 긴장을 풀지는 않았습니다. 북위만해도 '저 色姬, 나랑 친한 척하는데 말은 졸라 안들어'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북위가 멸망하고 북제와 북주로 갈라져 북제와 국경을 접한 이후로는 악화 일로입니다. 보통 50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의 전쟁상태로 갔지만 실제론 540년대 이후 적대관계였습니다.(그러니까 고구려의 비상시국은 무려 120년인 겁니다) 그런 적성국가의 정보가 허술할리도 없지요.


특히나 위진남북조의 사서라하더라도 후반기 왕조의 한반도 관련 기사는 꽤 정밀합니다. 다른 기록들은 신뢰하면서 관등기사만 때로 놓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해서 혹시 진대덕 방문 전에 관등체계가 확 뒤바뀐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 직전의 큰 일이야 연개소문의 쿠데타죠. 그렇게 혼자만의 고구려 제도사를 펼치는 아름다운 와중에 그동안 신경 안썼던 자료 하나에 옆구리가 찔립니다. 마치 다 이겼는데 적의 일격에 기함이 날아간 부르스 아슈비 제독처럼 말이죠.


말꼬리 ---------------------------

1.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다음 글은 내일..

2

요즘 하던 일은 앞에서 언급한 한원에 모자이크를 입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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