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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춘천의 옛 중심은 어디였는가?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춘천의 옛 중심은 어디였는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20. 3. 24. 14:42

어제 밤에 페북에 주절거린 춘천의 옛 지형을 알 수있는 자료. 

춘천의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 637년 우수주의 설치, 이후 삭주의 설치를 중요하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세워졌던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헌기록으로 간략하게 언급이 될 뿐, 어느 정도의 규모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행정중심지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연구자들의 시점대로라면 춘천이 우수주, 삭주의 중심지였다는 것 조차가 의심되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대정 7년(1918)에 만든 지도로 한반도의 옛지형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지도는 토목기술의 발달로 지형을 변화시키는 수준이 되었으며 그 이전의 지도는 현대 지도가 요구하는 매우 정확한 지형을 보여주는 것과 거리가 멀다. 춘천의 과거를 설명하면서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만들어진 지도로 설명하는 것은 지양해야할 일이라고 본다.

 

예전에 춘천에선 서면과 춘천읍(현 도심)을 오갈 때, 비가 적은 계절이면 그냥 건너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 지도를 보면 매우 정확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구에 의암댐이 들어선 이후 아무리 가물어도 사람의 힘으로 강을 건너오긴 매우 어려워졌다.(뭐 혼백만이라도 건너겠다면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 현재 다리와 배를 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이 중도라지만 과거엔 지금보다 훨씬 넓었으며, 왜 중도에서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되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댐의 형성으로 춘천의 중심이었던 전평리(현 소양동과 근화동)가 외곽지역으로 변해버렸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의 경우 삼국과 고려시대 춘천의 중요 시설이 있던 곳으로 전평리를 들고 있는데 이 지도를 보면 꽤 합리적인 설명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현재로선 춘천 7층 석탑과 당간지주만이 남았다. 도시개발이 장기적으로 뿅뿅해버려, 시굴조사로도 이젠 나오는 게 없다. 당간지주-칠층 석탑-봉의산성-봉의산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라인만으로 고대 춘천의 도시구획을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현재 중앙로의 도청으로부터 명동으로 내려오는 라인도 전통적인 춘천의 행정중심지를 구성하는 것으로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요선동을 거쳐 근화동까지 이어지는 라인도 매우 중요한 시설이 자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말꼬리 ----------------

아래는 어제 밤에 썼던 페북 글..

 

여주 상리, 매룡리 고분군과 춘천의 봉의산 고분군에는 당장 보이는 공통점이라는 게 적다. 시기도 다르고(상리, 매룡리가 삼국시대 후반이라면, 봉의산은 통일기 이후?) 지역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신라인이 만든 무덤들이라는 것뿐.

새벽에 이것저것 정리하다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신라의 북진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자료란 걸 겨우 생각해냈다. 여주나 춘천이나 모두 북진로상의 주요 거점이다. 추풍령에서 나와 남한강을 끼고 한강 하류로 가는 길목의 여주, 죽령을 넘어 영서지방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평양과 원산으로 가는 길목이자 다시 한강 하류로 치고 내려갈 수 있는 춘천. 본디 주요 거점은 이천이겠으나 여주에선 문막을 거쳐 원주로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동안 두 고분을 따로 놓고 보았는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묶이는 것이 있다.

현재 춘천에서 여러 개의 댐이 건설된 이후 많은 육지와 지류들이 사라졌는데 과거 춘천의 도시구획에 대한 정리를 해볼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전평'이 열쇠가 되는데 이미 교란 및 파괴가 진행되어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결국 산성과 고분군이 힌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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