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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살수대첩 수공설의 범인은 누구인가?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살수대첩 수공설의 범인은 누구인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22. 1. 1. 01:14

 

 

살수대첩에서 수공하지 않은 것은 알기 싫냐?(번외 - 01)

오늘 올라온 그것은 알기 싫다 7회를 듣다보니 또 직업병이 도졌는데 금강산댐(북한식 명칭 : 임남댐)을 다루는 부분에서 살수대첩 수공 얘기가 나왔다. 결론만 먼저 이야기하자면 살수대첩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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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살수대첩은 수공인가...

며칠 전에 아는 중딩과 이야기를 하다가 살수대첩을 수공으로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다는 겁니다. 엥? 마침 교과서를 가지고 있길래 한번 펴보자고 했더니 그런 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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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두 편에 걸쳐 살수대첩 수공설에 대해 끄적였습니다. 그 후로 글을 새로 판 건 아니지만 페북에선 종종 구시렁대곤 했죠. 대체 이게 누구 소행이냐.

짐순이는 해방 이후 국난극복사가 창조되는 과정에서 살이 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개벽이나 별건곤같은 잡지 간행을 진두지휘했던 청오 차상찬(1887~1946)이나 육당 최남선의 글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거든요.(차상찬을 위주로 뒤진 것이라 최남선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청오의 글을 뒤지다 얻어걸린 육당의 글에도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청오 차상찬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잡지 간행의 거두이기도 했고, 역사저술가로도 널리 팔리던 인물입니다. 백과사전류에 소개된 것과 달리 그의 저술에 사용된 자료는 매우 넓어, 진짜 당시에 이걸 다 읽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당시 잡지에는 을지문덕 후손의 집성촌이 소개되기도 하기에 살수대첩에서 수공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면 이 이야기꾼이 안 써먹었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청오는 그냥 책만 구해다 읽은 것이 아니라 개벽지의 특집기사를 위해 전국을 거의 다 돌다시피 하였기에 현장에서 듣는 것도 상당했습니다. 물론 분담을 할 때도 있어 안 간 곳도 있고 강원도를 기준으로도 안 들린 군현이 좀 있지만 평안도는 직접 돌았기에 그 이야기가 당시에 돌았다면 안 적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국난극복사가 판치던 시기 누구를 특정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제멋대로 창작한 역사 글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바로 단재 신채호였네요. 에이 설라 그럴 리가~라고 처음에 반신반의한 건, 조선상고사를 많이 읽었거든요? 환빠이던 시절에, 그런데 그걸 본 기억이 없다니요. 환단고기의 내용은 잊어도(사실 책의 제본 상태를 거덜 낸 최초의 책입니다. 임승국의 한단고기를 말이져) 조선상고사의 글에서 못 봤거나 기억을 못 할 리 없어! 이런 강한 부정을 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보던 것을 뒤져보니 수공설이 있네요. 하다못해 갓쉰동 이야기도 기억하는 마당에... 역시 솔로몬이나 아 바오아 쿠 어디선가 저장장치에 충격을 받았던가? 혹시 쟈브로에서 배빵을 맞았을 때???

을지문덕이 통역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너의 양식 실은 배가 바다에 가라앉아 먹을 양식은 끊어지고 평양성은 높고 튼튼하여 넘어올 수 없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외치게 하고 포로로 한 수의 수군(水軍) 장졸들의 도장과 깃발을 던져주었다. 수의 군사가 그제야 내호아가 패했음을 알고 군심이 갑자기 소란해져 싸울 수가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러나 돌아가는데, 을지문덕은 미리 사람을 보내서 모래 주머니로 살수의 상류를 막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서 천천히 한가롭게 수의 군사를 뒤쫓게 하였다. 살수에 이르니 배가 하나도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의 깊고 얕은 데를 알지 못하여 머뭇거리는데 돌연 일곱 사람의 고구려 중이 다리를 걷고 물에 들어서면서 “오금에도 차지 않는 물이오. ” 하고 건너가니 수의 군사가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물에 들어섰다. 채 중류에 미치지 못했을 때 상류의 모래주머니로 막은 물을 터놓아 물이 사납게 내리닥치는데 문덕의 군사가 뒤쫓아와서 맹렬히 공격하니, 수의 군사는 거의가 칼과 화살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숨을 건진 자는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450리나 도망가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 요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우문술 등 아홉 군단 30만 5천 명이 다 죽고 겨우 2천7백 명밖에 안 되었으니 백에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고 무기와 그 밖의 몇만 수레의 물건들이 죄다 고구려의 노획품이 되었다.
- 책의 내용을 치자니 귀찮아서 걍 긁어왔습니다. 출처는 위키문헌 

단재 신채호는 아직도 일부에게는 중요한 역사연구의 상징입니다. 그의 이름을 빗대어 현재 학계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지삐까리로 널려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며 고대사 연구자로서의 역사적 위상은 누구도 부인하진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도 그의 학설이 학설사, 연구사를 넘어 유효하냐고 질문한다면 글쎄요~라 말하지 않을까요?

아마 신채호의 창작이 아니라면 조선시대 전후로 만들어진 청천강 인근의 전승을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지방지가 만들어지면서 향토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면서 후대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이야기가 넘쳐나게 되었죠. 지금도 그리 주장하는지 모르겠는데, 충남 보령, 대천에서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와 그 부인을 자기네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도미는 그 동네 사람, 도미부인은 경남 양산 사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원전에는 보령 대천의 ㅂ, ㄷ자는 없지요. 걍 왕경인(지금의 서울)인데 어느 시기엔가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역사적 인물을 자기네 동네의 사람으로 바꾼 건데, 살수 수공설도 이러지 않았을까요? 

뭐, 고구려 초기 건국지인 졸본은 평남 성천군에 있었다고 조선시대에 떠들고 나니기도 하였으니 이상하진 않습니다. 머리 아픈 건 성천 이야기는 담았던 청오가 어째 이 떡밥은 안 물었다는 게 가장 미스테리합니다. 덕분에 해방 이후만 쫓아다닐뻔했군요

말꼬리 -----------------------------------------

1. 신채호의 고대사 구조를 가장 잘 계승한 것이 두계 이병도이고 그걸 최후까지 이어나간 것은 천관우라고 생각합니다. 

2. 한때 가평에서는 양길이 궁예와 마지막으로 싸우다 죽은 곳이 가평군 내에 있다는 주장을 하여 원주와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지요.(이건 하필 실시간으로 직관한 것입니다)

3. 청오 차상찬과 육당 최남선이 수나라 군대가 130만이란 표현을 동시에 남기는데, 하필 두 사람이 참고한 자료가 같은 것이었다 추정됩니다. 이건 어느 판본인가? 이건 안찾아다닐끄야.

4. 개인적으로 이런 게 돌아다니니 다들 수공설이 진짜인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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