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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사료를 꼼꼼히 읽는 것..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사료를 꼼꼼히 읽는 것..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5. 14. 23:17


작년 이맘때 전편을 쓰고는 후편을 안쓰고 있군요.


아주 오래간만에 학교에 갔습니다.

집 위가 학교인데 서울서 돈벌이를 하다보니 퇴근하면 10시라,

그리고 서울서 자는 날도 많아 시간이 별로 없죠.

하여간 간만에 바쁜 후배놈과 논문 얘기를 신나게 했습니다.

조교일을 너무 잘해 업무에 치여사는데다

(워낙 잘해 너도나도 시키는 통에 직속선배랍시고 일 시켜본 적 없습니다)

결혼을 했고 애가 태어나는 여러 일을 거쳐 

한참 전에 나왔어야 할 논문이 몇 년째 중단되었지요.

그런데 책상을 보니 간만에 사료들이 펼쳐져 있어서

(하도 바쁜 터라 말 걸기도 힘듭니다)

요즘 공부 하나 싶어 말 걸었더니 신나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해줍니다.

처음 줄기 잡을 때도 매우 기대하던 논문인데 오늘 들어보니 찌릿합니다.


그 중에서 중국 자료를 그동안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해석했다는 걸 밝혀낸 게 의의가 큽니다.

사실 한 세대 전에 나왔어야 할 이야기이긴 한데

한국사 전공자라고 한국사자료만 읽다보니 그 사료와 연관이 되는 것들의 

원래 의미를 잘 잡아내지는 못하더군요.

그런데 이 녀석은 원래 그런 쪽으로 보던 저도 깜짝 놀라는 이야기를 해서 

야, 이거 계속 멍하니 있다가는 뒷물결에 치이겠구나란 생각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핵심이 되는 사료 중 하나의 구절을 그동안 잘못 읽어오던 것을 하나 잡아냈더군요.

아직 논문을 쓰는 와중이니 여기서 미리 밝힐 수는 없고

그 구절이 맞는지를 여기저기 물어보고 용례를 찾아보고 해서

원래 써야할 의미대로 맞추어보니 논지가 더 탄탄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냥 옆에서 보면 별거 아닌 일에 그렇게 할 말도 많구나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미야자키 이찌사다가 쓴 『옹정제』 역자후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야자키 이찌사다를 비롯한 교토대 사람들이 옹정제가 남긴 글을 분석하는 일을 40년간 했습니다.

글자 하나 하나를 유심히 읽고 분석하기를 반복했는데

어떤 사람이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런 비슷한 일을 매우 널널하게 몇 년간 해도 죽을 맛이었는데

(이거 해봐서 아는데... 이거 썼다고 저작권내라고 안하시겠죠???)

일본사람들 특유의 꼼꼼함에서도 불만이 나올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랬더니 아베 다케오란 학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런 것을 해나가는 일, 그게 바로 학문이라는 겁니다."


역사학자들이 하는 일 중 하나가 사료를 세심하게 읽는 일입니다.

일부에선 실증주의에 매달렸다고 해석하는 역사가 중시되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만

역사가는 형사가 하는 일과 비슷한 것을 합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티끌 하나까지 우직할 정도로 살펴보고

그것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현장을 보지 않은 형사가 범인을 잡을 수는 없지요.

그렇게 예를 들고 픈 자유로운 상상을 했다는 역사가들이

책 하나를 내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고문서를 상대해야 했는지는 생각치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밝혀주는 이들 덕에 학문은 항문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후배의 논문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겨났습니다.


말꼬리 :

중국자료랑 동아시아사 개념으로 풀라고 바람을 불어넣은 건 저인데 하도 오래되니 잊어버렸군요.

이놈이,


선배를 위해 제발 감사의 말이라도 적어달라!!! 적어달라!!!

(뭐, 선배들이 제게 불어준 바람을 잘도 써먹으니 마찬가지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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