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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짐순이가 여기에 글을 쓰는 동안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적게 했지요. 백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안들러주신 것인지 불만접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고대사 공부를 백제사로부터 시작한 것 치곤 그동안 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초기 국가 형성사에서 백제부분은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자료가 전해의 이야기를 고물로 만들어버리니, 국가형성사에 약한 짐순이는 더더욱 안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여기에 글을 남기지 않는 동안 백제 초기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원문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해석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한 이래 문자로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기록함이 있었다/처음으로 "서기"를..
지난 달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머리를 아프게 해서 이래저래 책을 볼 여유가 없더라구요. 연료가 안들어가니 글도 안나오고 또 그럴 맘도 안되고.. . 그 와중에도 딱 하나 읽고 있는 게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소개한 기상청의 고대 기상 자료집입니다. 자료안내 - 한국 기상기록집① -삼국사기ㆍ삼국유사로 본 기상ㆍ천문ㆍ지진 기록 김양의 글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하나 건진 게 있어 아예 자료집을 처음부터 읽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 건진 한 토막의 글로 다시 삼국사기 읽기의 발동을 걸어볼라 합니다. 다만 원문과 해석은 자료집의 것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1. 신라 파사 이사금 29夏五月 大水 民飢 여름 5월에 큰물이 나서 백성이 굶주렸다. 2. 고구려 태조왕 56春 大旱 至夏赤地 民饑..
지난 번에 창경궁의 소박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그러면서 중간에 백제본기의 한 대목을 인용했지요.그냥 넘어가면 뭐합니까?한 번 읽어나 보지요. 원문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해석십오년, 봄 정월에 새로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이 문장에서 삼국사기의 전후 맥락만을 읽자면 간단합니다. 건국 초기에 여기저기 도읍을 정하고 이동하는 와중에 정착한 하남 위례성에서 왕이 머물 곳을 조성할 때의 이야깁니다.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지요? 왕은, 온조왕은 그야말로 성군, 군자왕입니다.(이걸 서울시 모 동네의 왕으로 이해하면 대략 난감. 아! 가까운 곳이로군) 마치 유교경전에 통달한 것처럼 어찌 그렇게 이상적인 군주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까요? 어..
원문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해석13년 봄 2월 왕도의 노파가 남자로 변하였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안에 들어왔다. 왕모께서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였다. 고대사회의 인간이나 현대의 인간이나 달라진 건 그다지 없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라면 사용하는 도구의 차이랄까요? 그외에도 몸담고 있는 정체政體라던가 경제제도 같은 것을 들수 있겠지만 적어도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것적으로 보자면 크게 변한 것은 없다고 해야죠.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든 사회구조나 과학기술의 문제보다는 차라리 과다한 기계의존으로 뇌의 용적량이 줄었다던가 근력이나 신체 능력이 떨어진 게 더 큰 차이가 될 겁니다. 물론 대다수의 인문학자들이라면 나의 발견, 자아의 형성을 들 ..
원문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 해석28년(373) 봄 2월 사신을 보내어 진에 조공케 하였다. 가을 7월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사실, 오늘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지난 주에는 쉬었고, 동천왕시리즈도 잠시 숨을 돌릴까, 그리고 너무 백제를 방치플레이했구나란 생각이 겹쳐 성왕이야기를 하렸더니 이것도 2부작 분량이라 현재 진행중인 흐름을 끊을 수도 없어.. 이래저래 짱구를 굴리다..(원래 속도라면 점심시간에 올라갔어야죠) 그냥 타협한 것이 이 이야깁니다. 아무래도 현직으로도 역사소설가이신 니자드님 소환의식이 되어버릴 거 같아요오~~. 이걸 할까 저거 할까 생각해보다 이 부분에 이르니 떠오르는 소설이 있..
원문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해석위덕왕의 휘는 창이고 성왕의 원자다. 성왕이 재위 32년만에 돌아가시자 뒤를 이었다. 위덕왕은 그렇게 잘 알려진 왕은 아닙니다.(뭐 생각해보세요. 자료 찾아보는 걸 그토록 귀찮아하는 짐순이가 메이저한 왕을 다룰리가요. -_-;;) 그의 아버지는 백제를 부흥시켰던 성왕입니다. 한국의 기록에서는 고작 그 정도로 다뤄집니다. 바다를 건너가도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죠. 고대한일관계사를 아신다면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렸다는 아좌태자를 아실 겁니다. 그는 위덕왕의 아들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뭔가 할 이야기거리가 그리 없어 보이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자 보복전을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