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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영류왕 14년,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영류왕 14년,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6. 8. 18:12


원문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瘞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해석

(영류왕) 14년(631) 당에서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어 수나라 전사들의 유해를 추스려 묻고 제를 지내게 하고, 당시에 세운 경관을 허물게 하였다. 봄 2월 왕이 무리를 모아 장성을 쌓았는데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리가 되었고, 무릇 16년이 걸려 일을 마쳤다.

 -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10, 영류왕 14년조


원래 삼국사기 읽기의 복귀로 작년에 전반전을 마친 검군의 후반부얘기를 하려고 했는 데 때가 때인지라 장성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만 먼저 이 자리를 빌어 약간의 이야기를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저께 글에 천리장성은 만리장성은 단일한 구조물이 아니라 여러 성들의 배치를 유기적으로 조합한 방어체계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그 기본 골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학계에서도 다 그렇게 보고 있기도 하고요. 사실 북방의 농업한계선에 간당간당, 남쪽으로도 여러 작물들의 북방한계선에 걸쳐있는 고구려의 여건상 대대적인 토목건축을 할 여유는 없다고 봅니다. 가깝게는 612년에 엄청난 전쟁을 치뤘고, 550년대 이후 극심한 대외적 압박에 신경이 너덜너덜 해진 상탭니다.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그리 큰 여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다만 문제는 16년이 걸렸다는 겁니다. 


준전시상태였기 때문에 성보수하는데 그만큼이 걸렸다는 건 문제가 있죠. 그 전에라도 쳐들어오면 독소전 벌어지기 직전에 방벽쌓던 소련군꼴나지요. 어중간한 상태라면 안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어제 퇴근 길에 서점에 달려가 관련 책을 찾아보니, 아주 약간이나마 장성 형태로 쌓은 구조물도 있더군요.


고구려의 북서방어선은 간단합니다. 요동지역을 흐르는 강의 수계, 줄지어 늘어서 있는산맥 사이의 교통로에만 성을 쌓으면 됩니다. 안가보신 분들이 그저 드넓은 만주 평야..란 생각을 하고 계신데 요동성 이서지역은 산악지대가 많습니다. 특히 국내성 근처로 오면 강계랑 이어진 산악지댑니다(국내성 보기 1주 전에 홍천 내면에 유적조사차 갔는데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집니다. 강원도민으로서 전혀 향수병을 느끼지 않아도 될 정도)


그 성들은 제한된 교통로 상에 마치 페스츄리 층처럼 겹겹으로 샇여 적의 침임을 막고

설령 뚫리더라도 그 힘을 소모시켜 중심지까지 이르지 못하게 하거나 

중앙군이 올 동안 시간을 버는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완벽한 종심이라고 할 수 있죠.


아마 16년간의 장성 수축은 방어체계를 재정비하고, 중요 방어성들의 보수와 취약점을 

보완하는 형태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20km 정도 크기의 장성유지는 이른바 보완패치, 서비스 팩인 셈이지요.


자, 정정글이 본문보다 더 늘어나기 전에 끊습니다.


경관은 일종의 국가 전승기념물입니다. 

큰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 적의 시체를 모아 매장한 큰 무덤입니다. 

동양이 왕궁이나 방어시설 등을 제외하면 

큰 기념물을 남기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참 특이한 것이긴 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위의 원문을 그동안 당이 고구려의 국가 기념물을 훼손시키는 외교적 만행을 저지르자 

허겁지겁 방어수단을 강구한 것으로 보아왔습니다. 

물론 저 영류왕 14년조의 기사만 읽으면 그리 생각하는 건 아주 합당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전후 사정이 있습니다. 


먼저 영양왕에서 영류왕으로 넘어가는 동안에 수와 당이 교체를 합니다. 

이 교체는 평화적인 교체가 아니라 수 양제의 죽음 전후로 무수하게 벌어진 

각종 반란과 세력간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된 후 당의 건국과 재통일로 정리가 되는 과정입니다. 

당연히 당은 고구려를 신경쓸 여유도 없고 오히려 돌궐의 힘을 빌리는 단계입니다. 

고조는 통일 이후에도 고구려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전왕조의 실책이 워낙 큰지라 고구려의 고자만 나와도 구토증세가 심했을 겁니다. 


영류왕도 대결보다는 평화구도에 힘을 씁니다. 

즉위 초부터 당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졸본시조묘를 친히 참배하는 등 전후처리에 힘을 씁니다. 

당이 전쟁포로를 송환하라고 하자 만여 명을 돌려보내고, 

중국에 거스르지 않는다는 의미로 책력을 요청합니다. 

이런 외교적 행사에 당은 왕 7년 624년에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며 화답합니다. 


조선시대 이후의 사람들이 보자면 이건 사댑니다. 

그러나 당시의 고구려인의 뇌구조를 분석하면 사대란 단어는 1mg도 존재치 않을 겁니다. 

그 위대하다는 장수왕도 1년에 3번 사신 보낸 적도 많은데 그도 사대주의자였나요? 

그저 생존을 위한 외교였습니다.

(어디 죽지 않으려고 허우적 거리는 사람을 쳐다보며 수영기술과 예술점수 매기는 짓 하지 맙시다)


중국이 상국도 아니고, 천조도 아닌 담에야 

중국사신만의 힘으로 고구려에서 국가기념물따위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시점의 당이 그렇게 주변 국가들 자극할만큼의 여유는 없습니다. 

물론 당태종이 즉위한지는 몇 해가 지났지만 가장 중요한 적인 북방의 돌궐도 급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고구려 조정과 어느 정도 외교적 교감을 가진 후 양자 합의에 따라 벌인 일이라고 말이지요.


물론 이것이 마냥 좋아서 합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영류왕이 우호관계에 힘썼다하나, 

고구려는 첫 시작부터 끝까지 중국말은 안들어쳐먹는, 

그야말로 싸가지 없는 불량국가였으니 말입니다.

(고구려와 부여에 대한 기록을 대조해보면 재미있습니다

항상 대결하는 고구려는 개자식, 우호적이었던 부여는 항상 참 착한 놈으로 기록됩니다) 

다만 고개 한 번 숙여준다고 목뼈 부러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융통성을 갖춘 나랍니다. 


대외적으로 소극적이었던 고조시절과 달리 

좀 더 강경한 태종대에 들면서 분위기가 달라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북방을 치면 우리 차례였고, 아니면 우리를 먼저 치고 북방을 칩니다. 

서서히 평화는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휴식인 소강상태가 끝나는 것이지요.


이 천리장성의 건설도 그러한 대비책의 하나로 봅니다.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이 말만큼 모순적이지만 현실적인 말도 드뭅니다. 

그놈의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소설과 영상물에서 

영류왕은 나약하고 중국에 무릎을 꿇는 형편없는 왕으로 그려집니다. 

이후 영류왕 본기를 읽다보면 

과연 그가 비참하게 죽어 시체가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 마땅했는지 회의가 듭니다. 

612년, 평양성으로 쳐들어온 내호아의 수군을 궤멸시킨 용사는 누구였을까요? 

치열한 전쟁을 겪은 국가가 또 전쟁에 휘말려야 하는 걸까요? 

어떻게든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을 회피하려는 국왕의 행동이 저열한 것이었을까요?


오늘의 RGM-79는 고구려의 박작성도 만리장성의 일부라는 중국보다 

연개소문이야 말로 민족의 영웅이라는 사람들에게 분노합니다.


덧붙임

1. 원문해석에서 '동북의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서남의 바다라고 수정해야겠지요.

2. 장손사의 관직인 광주사마는 퇴근 후에 당육전이라도 찾아보고 덧붙이겠습니다.

3. 긴급히 막차를 타고 지방으로 가야하는데다 내일은 도 경계선을 서너개는 가뿐히 넘는 일정이라

    보충하는 이야기는 늦어도 일요일쯤에 올리겠습니다. 답글도 그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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