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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천왕 22년, 국민에게 사랑받은 자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동천왕 22년, 국민에게 사랑받은 자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10. 23. 11:20

원문

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

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역시 삼국사기는 모자이크를 해야 제맛입니다. ㅎㅇㅎㅇㅎㅇㅎㅇ~

서기 248년에 동천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신하들이 따라 죽으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중천왕은 뜯어말려야 했습니다만, 왕을 땅에 묻는 날 터진 감정에 복받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여 시신이 쌓일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서 섶을 베어 시신들을 덮으니 그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더라. 이게 오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참 쉽죠?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 올라가는 여느 포스팅처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고구려왕의 시호법이라던가, 국인의 의미, 그리고 동천왕이 각종 악재 속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 등 할 말은 많습니다. 우선 하나하나 순서대로 까보기로 하죠.


우선 모본왕 이후 태조,차대,신대 3종 세트를 제외하고 나면 고구려왕의 공식 명칭은 무덤이 있는 지명을 땁니다. 어차피 현직의 왕은 그냥 임금님으로 통일된 거고 과거 일을 이야기 하는 기준점을 밝히기 위해 이른바 코드네임을 붙이는 게 시호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내가 말이야 그러니까 고국천에 묻히신 그 임금님 살아계실 땐 처녀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이런 허세를 부릴 때 듣는 손자는 그 임금님의 시호를 통해 시공의 좌표점을 찍어 낼 수있는 거지요. 이른바 고려와 조선의 묘호랑 같은 용도입니다. 동천왕이라면 어느 강인지 모를 곳의 동쪽편에 위치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이런 이름은 땅따먹기 대왕 이전까지 통용됩니다.


그리고 국인國人, 그러니까 저기에 나라 사람이라고 풀었지만, 이것을 국민으로 치환시키면 곤란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왕성에 살고 있는(아니면 요즘식으로 본적이 왕경이어야 하죠) 국가 지배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저기서 죽은 사람은 일반 평민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신하, 즉 근신近臣라는 말과 대응합니다. 신라식으로 하자면 적어도 4두품 이상이 되겠지요. 특히 고구려에서는 국초부터 자리하는 좌식자라는 전사단이 중핵이겠지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장작처럼 쌓이고, 

또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애달피 여겨 장작을 쌓아주고 있습니다.

새 왕의 명령으로도 죽은 왕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적통의 자식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좀 치명적인 약점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위와 싸우다가 수도도 점령당하고 자기는 옥저지역으로 도망을 가야했을 정도입니다. 

왕성을 함락한 관구검의 기념비가 아직도 남아있을 정도니 

그 당시에는 꽤 치욕적인 일로 기억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이기다가 역전을 당했으니 왕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왕이 순장풍속을 예가 아니라고 보는 와중에도 

굳이 살아있는 권력의 명을 어겨가며 죽은 주인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다는 것은 꽤나 신기한 일입니다. 

적어도 그는 요즘말로 전범으로 간주되기는 커녕 사랑받을 일을 한 왕이라는 겁니다. 

칭송받는 자를 넘어선 사랑받는 자.

그에게 어떤 일이 이었는가를 이제 하나씩 풀어봐야 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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