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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듕궉여행 후기 1 : 8월 23일 첫째 날 본문
RGM-79는 지난 8월 23일부터 27일까지 4박 5일로 듕궉 동북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대련-단동-통화-집안-백두산-장춘을 거쳐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을 돌아보았는데
역시나 RGM-79에게는 고구려 유적이 더 중요하였죠.
새 글 쓰기는 귀찮고, (눼, 귀차니스트 맞습니다)
사진 정리도 늦어졌고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건 역사상 유래 없는 초광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직 책상 위에 6년 전 현상안한 필름통이 굴러다닙니다. -o-)
맨날 유물이나 유적사진만 찍는 통에 여행을 떠나 찍는 센스는 극악이지만
한 번 공개는 해볼까합니다.
오늘은 첫날 사진을 올립니다.
대련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렀던 대련시내의 한인 거리.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듕궉에 가서 처음 찍은 사진입니다.
맨날 멈춰있는 유적 사진만 찍다보니, 거리 사진이라던가 순발력이나
감각을 발휘해야할 시점에 찍는 것은 매우 서투릅니다.
찍어야할 순간이 지나고 후회하는 건 일상다반사죠.
이날 이후의 교훈으로 아무데서나 누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만
앞으로의 시진들도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담지 못했습니다.
대련시 인구가 280만, 주변부 인구만 합쳐도 500만을 넘습니다.
RGM-79가 사는 춘천이 도농지역 다 합쳐 30만을 넘지 못하고, 강원도 인구가 180만입니다.
역시 듕궉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날 이후 우리는 오지만을 떠돌게 됩니다.
사진 좌측에 꼬리만 보이는 버스가 5일동안 머문(?) 차량이고요.
지면 관계로 일부만 보이는 사진을 골랐는데
저 잘린 붉은 간판은 강남미용실..
정면에 KTV라는 간판이 보이실텐데 며칠 간 지방방송 이름이라 생각했습니다.
(길림방송? 그런데 요령성에 어인 길림???)
그런데 정체는 가라오케라는군요.
버스 타기 전, 맞은 편 거리.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은 사람 사는 모습에 관심을 갖자.
여행을 가면 아무리 졸라대도 사람 사진은 찍어주지 않는 RGM-79였습니다.
첫 끼니를 마치고 거리를 걷다가 수퍼에 들러 사온 것들입니다.
카멜백과 스프레이를 제외한 과자와 음료수.
과자는 일행들에게 돌리기 전, 음료수와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사람보다 과자의 등급이 높냐구~~~~~)
정면에 보이는 게 그 可口可樂, 코카콜라입니다.
사실 미각은 그닥 발달하지 않아서 코카와 펩시 구별도 못하는 RGM-79인데
듕궉 가구가락은 이해하기 쉬운 맛이었습니다.
끝맛이 살짝 달달까요?
그리고 녹색의 음료가 우리에겐 추억의 음료 7up.
매우 오래간만에 먹다보니 이게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도 못합니다.
과자의 경우 운전기사분의 반응으로 보아 꽤 고급에 속하는 것 같더군요.
이렇게 사서 뭐하냐구요?
눼, 듕궉은 넓었습니다.
이웃 동네를 고속도로로 달려도 5시간 걸립니다.
아녀자들로 가득찬 버스에서 이건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그댄 너무 맛이 있어 요요요~ 그댄 너무 부드러워요요요, 잘먹겠습니데이~
- 강산에, "명태" 중에서)
다들, 듕궉하면 생각나는 건 화장실일지 모릅니다.
공항과 식당과 달리 오리엔탈한 맛(?)과 멋을 자랑하는 비사성 입구 화장실이었습니다.
70년대 시골 화장실이랄까요?
RGM-79야 후각이 형편 없는데다 잦은 조사로 이런 화장실에 익숙하지만
(사실 RGM-79가 최고로 치는 강원도 정선의 무서운 화장실을 능가할 화장실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도시문명에 익숙한 일행들은 참고 참고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뭔 놈의 화장실 협회 생기기 전엔 듕궉보단 약간 덜할 뿐 만만치 않았습니다.
(실은 화장실 협회 출범시 웃었습니다만.. 가장 훌륭한 협회임이 곧 밝혀졌죠)
비사성으로 돌라가는 길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포장도로로
다음에 갈 산보다는 편안한 산행이었습니다만
3계단 이상 승강기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RGM-79는 20원에 태워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앞으로 화폐는 별다른 말이 없는 한 듕궉 화폐 위안-원-입니다)
기사분과 오토바이도 찍어야 하는데 RGM-79의 무딘 감각은 여행 끝나고야 생각해내었습니다.
하여튼 난생 처음 외간 남자의 몸에 매달려 '옵하 달려~!'를 외쳤다능..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적에 당태종이 이끄는 육상군과 별개로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삼국사기 21, 고구려본기 9 보장왕 상, 보장왕 4년조
아래 지도에서 볼 수있는 것처럼 비사성은 해로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술 및 항해술의 미약함으로 인해 해양교통은 연안항해에 의존하게 되는데
산동반도에서 출발한 배가 요동반도를 거쳐 평양쪽으로 가려 할 때,
먼저 묘도열도(먀오다오)를 거쳐 요동반도의 끝 대련을 거쳐야 하고,
거기서 장산군도를 지나야 합니다.
장기간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불가능한 시절에 대련시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황해와 보하이만의 재해권의 향방이 갈립니다.
듕궉의 한반도 침략은 반드시 해로와 육로를 병행해야 성공한다는 건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에서 입증되었죠.
주력군인 육상군의 조공으로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보급물자를 수송하여, 강을 통해 전달하여 육상군 진출을 쉽게 해줍니다.
(말은 이리 쉽지만 육사에서 나온 보급전에 대한 책을 읽고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듕궉군은 나폴레옹 이전 군대보단 효율적이었습니다)
대련시에 위치한 비사성은 그 해로를 장악하여
우리가 잡으면 수상진입을 막고 보급을 불가능하게 하고
듕궉이 잡으면 평양성까진 고속도로가 뚫려 '오빠 달려'가 됩니다.
612년엔 수나라 수상군의 진공을 일부 차단하여
수나라 '특별히 공부는 못하는데 대가리만 큰' 30만을 외롭게 하였으나,
645년의 당나라 수상군의 기습에 공략당하여
이제 평양으로 가는 해로에는 '오빠 달려'의 듕궉말이 가득차게 됩니다.
이후 당의 공격이 평양성 직공으로 흘러간데는 물론
요동성과 백암성 등의 요하방어선, 박작성 국내성 등의 압록강방어선이 뚫린 것도 원인이겠으나
645년의 바사성 상실은 하천에서 육상군을 막는다란 전략적 전제를 그야말로 휴지로 만든 사건인데
학계에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더군요...라고미사카 자칭 해군빠인 RGM-79는 웁니다.
다시 사진으로 넘어가죠..
비사성에 올라 산등성이를 봅니다.
자세히 보면 희미하게 성벽이 보이죠.
듕궉의 성이 허허벌판에 방형으로 쌓는 형태라면
한반도, 특히 고구려의 성은 산세를 이용하게 됩니다.
듕궉의 성이 대량의 물자와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나무골재의 단단한 토성을 쌓는다면
(말이 토성이지 실제로는 공구리같은 형태지요)
한반도에선 물자도 없지, 인구 적지, 근데 산은 딥따 많지.. 이러니
가급적 물자가 덜 소요되는(하지만 쌓는 인간은 눈튀어나오지..) 산성을 쌓게 되지요.
되도록이면 절벽이나 험한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활용하면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에코가 아니라 말그대로 인문환경)입니다.
이게 비사성입니다.
아래 찍히신 분은 우연히 들어간 일행분.
사생활보호를 위해 정면은 공개 안합니다. (공개시 인기폭발 우려 있음!)
자, 성에 올랐다구요? 성벽을 보여주세요.
요 빨간 선 안쪽이 멀리서 보이는 성벽입니다.
RGM-79는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왔지만 등산을 해서 성벽을 쌓은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과 존경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 사진은 RGM-79가 산성고고학을 피한 이유를 여러 사람들이 이해하게 해줄듯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3계단 이상 승강기거든요!
비사성 사진, RGM-79가 오토바이를 타고 산에 오르자 일행들은 좌측에 보이는 버스를 타고 따라왔습니다.
RGM-79만 치사한 건 아니었다능!!!! 산성관광의 개척자라능..(머리 위에 콜로니를 떨구겠다!!!)
듕궉인들이 지 입맛대로 지어놓은 장대로 올라가는 일행들,
두 분을 빼고 가정이 있으신 분들이라 뒷모습만 공개합니다.
사실 여기서 RGM-79는 사진을 많이 찍었어야 했습니다.
장대는 듕궉식이고 문처럼 생긴 안쪽으로 옥황상제를 모시는 공간과
갖가지 듕궉식 치장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지금같으면 듕궉의 문화를 살핀다는 이유로 많이 찍었겠지만
당시엔 고구려 것만 찍는다는 생각 밖에 없었거든요.
누구시던지 비행기값하고 차비만 주신다면 당일치기로라도 대련에 가서 찍어오겠습니다.
아까 오토바이를 타고 내린 것을 바라본 겁니다.
횡으로 성벽처럼 보이는 것은 요즘 것이고
종으로 올라간 것이 옛날 성벽입니다.
날이 맑았다면 대련시내가 다 보였을 것이고 바다도 보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장대에서 이 비사성이 가지는 역사적 위상을 설명하기가 더 편했을텐데
바다를 찍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만약 1박 2일의 체류비와 항공료만 지원해주신다면 다녀오겠습니다.
가을은 비수기니 30만원이면 될까나요?
비사성을 점령한 후 세웠다는 석고사.
가람배치 그냥 보면 우리식, 특히 백제삘이 납니다만...(아닌 거 아시죵?)
석고사도 그닥 관심이 없어서 대충대충 넘어갔는데
그나마 찍은 사진도 전송 중 죄다 날아갔습니다.
특히 사천왕처럼 지키고 서있는 관우와 관평 사진 날아감에 통곡..
비록 오나라빠, 특히 손책, 주유, 노숙빠지만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습니다.
뭐, 3세판, 듣기 둏은 꽃노래도 질릴 횟수로 말하자면
연구비 지원해주시면 찍어다 드린다니깐요.
(군대, 아니 대련 꼭 가고 싶습니다!!!)
석고사 앞을 지키는 사자상.
이건 암놈인데 발 아래 뭘 누질르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혹 게이머용 무선마우스????
여의주는 숫놈이라 들었는데 암놈은 기억도 나지 않네요.
숫놈 사진요? 당근 독사진은 날아갔으나..
커플 사진은 찍었습니다.
한 미모 하시는 일행분들의 편안한 사생활을 위해 뒷모습만 찍었습니다.
꼭 이분들의 미모를 독점하겠다는 의도로 해석하지 말아주시면 곤란합니다.(응?)
비사성을 내려오는 길에 찍은 사진.
4면이 절벽이라는 미소녀같은 비사성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절벽을 따라 내려가는 길도 징그러웠습니다.
공격하던 애들은 얼마나 욕을 하며 올라갔을까요?
역시 3계단 이상 승강기는 진리입니다.
다 내려와서 올려다본 비사성벽.
만약 당군이 텔레토비들이라면 '이제 그만~' 소리에도 "아이 싫어, 싫어"했을 겁니다.
한 5시간을 넘게 달려 찾아간 단둥시.
잠은 여기서 자기로 하고 아침엔 오녀산성이 있는 통화로 갈 것인데
저녁은 북한식당에서 먹었습니다.
매우 늦게 찾아가서 짜증나는 아가씨들 나와서 노래하는데
RGM-79는 그보다 머리 위에 놓인 북한방송을 보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정말 북한이구나 싶은 방송이었달까요?
무슨 영상에 석양에 보초서는 장면은 우리나라 방송에도 많이 나오는데
바로 다음에 착검한 소총이 화면을 채우는 장면의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것이 북한이다!!"
십수년 전에 이탈리아 감독이 찍은 북한 행사 다큐 볼 때 느꼈던 감정을 한 장면으로 다시 느꼈네요.
어떻게 듕궉을 5일 돌면서 이질감보다 동질감이 더 많았는데
국경도시에서 잠시 본 영상이 그렇게 이질적일 수 있을까요?
사진은 압록강철교, 그러니까 북한 경제의 대동맥이라 불리는 것의 사진입니다.
강건너 불꺼진 신의주부터 많이 찍었는데 죄다 엉망이었습니다.
찍히는 것도 거부당한 것일까요?
그나마 정말정말정말 잘 나온 사진이 이겁니다.
다음 사진은 이어서 올리도록 하지요.
인천에서 출발하여 대련-단동-통화-집안-백두산-장춘을 거쳐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을 돌아보았는데
역시나 RGM-79에게는 고구려 유적이 더 중요하였죠.
새 글 쓰기는 귀찮고, (눼, 귀차니스트 맞습니다)
사진 정리도 늦어졌고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건 역사상 유래 없는 초광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직 책상 위에 6년 전 현상안한 필름통이 굴러다닙니다. -o-)
맨날 유물이나 유적사진만 찍는 통에 여행을 떠나 찍는 센스는 극악이지만
한 번 공개는 해볼까합니다.
오늘은 첫날 사진을 올립니다.
대련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렀던 대련시내의 한인 거리.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듕궉에 가서 처음 찍은 사진입니다.
맨날 멈춰있는 유적 사진만 찍다보니, 거리 사진이라던가 순발력이나
감각을 발휘해야할 시점에 찍는 것은 매우 서투릅니다.
찍어야할 순간이 지나고 후회하는 건 일상다반사죠.
이날 이후의 교훈으로 아무데서나 누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만
앞으로의 시진들도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담지 못했습니다.
대련시 인구가 280만, 주변부 인구만 합쳐도 500만을 넘습니다.
RGM-79가 사는 춘천이 도농지역 다 합쳐 30만을 넘지 못하고, 강원도 인구가 180만입니다.
역시 듕궉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날 이후 우리는 오지만을 떠돌게 됩니다.
사진 좌측에 꼬리만 보이는 버스가 5일동안 머문(?) 차량이고요.
지면 관계로 일부만 보이는 사진을 골랐는데
저 잘린 붉은 간판은 강남미용실..
정면에 KTV라는 간판이 보이실텐데 며칠 간 지방방송 이름이라 생각했습니다.
(길림방송? 그런데 요령성에 어인 길림???)
그런데 정체는 가라오케라는군요.
버스 타기 전, 맞은 편 거리.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은 사람 사는 모습에 관심을 갖자.
여행을 가면 아무리 졸라대도 사람 사진은 찍어주지 않는 RGM-79였습니다.
첫 끼니를 마치고 거리를 걷다가 수퍼에 들러 사온 것들입니다.
카멜백과 스프레이를 제외한 과자와 음료수.
과자는 일행들에게 돌리기 전, 음료수와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사람보다 과자의 등급이 높냐구~~~~~)
정면에 보이는 게 그 可口可樂, 코카콜라입니다.
사실 미각은 그닥 발달하지 않아서 코카와 펩시 구별도 못하는 RGM-79인데
듕궉 가구가락은 이해하기 쉬운 맛이었습니다.
끝맛이 살짝 달달까요?
그리고 녹색의 음료가 우리에겐 추억의 음료 7up.
매우 오래간만에 먹다보니 이게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도 못합니다.
과자의 경우 운전기사분의 반응으로 보아 꽤 고급에 속하는 것 같더군요.
이렇게 사서 뭐하냐구요?
눼, 듕궉은 넓었습니다.
이웃 동네를 고속도로로 달려도 5시간 걸립니다.
아녀자들로 가득찬 버스에서 이건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그댄 너무 맛이 있어 요요요~ 그댄 너무 부드러워요요요, 잘먹겠습니데이~
- 강산에, "명태" 중에서)
다들, 듕궉하면 생각나는 건 화장실일지 모릅니다.
공항과 식당과 달리 오리엔탈한 맛(?)과 멋을 자랑하는 비사성 입구 화장실이었습니다.
70년대 시골 화장실이랄까요?
RGM-79야 후각이 형편 없는데다 잦은 조사로 이런 화장실에 익숙하지만
(사실 RGM-79가 최고로 치는 강원도 정선의 무서운 화장실을 능가할 화장실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도시문명에 익숙한 일행들은 참고 참고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뭔 놈의 화장실 협회 생기기 전엔 듕궉보단 약간 덜할 뿐 만만치 않았습니다.
(실은 화장실 협회 출범시 웃었습니다만.. 가장 훌륭한 협회임이 곧 밝혀졌죠)
비사성으로 돌라가는 길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포장도로로
다음에 갈 산보다는 편안한 산행이었습니다만
3계단 이상 승강기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RGM-79는 20원에 태워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앞으로 화폐는 별다른 말이 없는 한 듕궉 화폐 위안-원-입니다)
기사분과 오토바이도 찍어야 하는데 RGM-79의 무딘 감각은 여행 끝나고야 생각해내었습니다.
하여튼 난생 처음 외간 남자의 몸에 매달려 '옵하 달려~!'를 외쳤다능..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적에 당태종이 이끄는 육상군과 별개로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삼국사기 21, 고구려본기 9 보장왕 상, 보장왕 4년조
아래 지도에서 볼 수있는 것처럼 비사성은 해로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술 및 항해술의 미약함으로 인해 해양교통은 연안항해에 의존하게 되는데
산동반도에서 출발한 배가 요동반도를 거쳐 평양쪽으로 가려 할 때,
먼저 묘도열도(먀오다오)를 거쳐 요동반도의 끝 대련을 거쳐야 하고,
거기서 장산군도를 지나야 합니다.
장기간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불가능한 시절에 대련시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황해와 보하이만의 재해권의 향방이 갈립니다.
듕궉의 한반도 침략은 반드시 해로와 육로를 병행해야 성공한다는 건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에서 입증되었죠.
주력군인 육상군의 조공으로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보급물자를 수송하여, 강을 통해 전달하여 육상군 진출을 쉽게 해줍니다.
(말은 이리 쉽지만 육사에서 나온 보급전에 대한 책을 읽고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듕궉군은 나폴레옹 이전 군대보단 효율적이었습니다)
대련시에 위치한 비사성은 그 해로를 장악하여
우리가 잡으면 수상진입을 막고 보급을 불가능하게 하고
듕궉이 잡으면 평양성까진 고속도로가 뚫려 '오빠 달려'가 됩니다.
612년엔 수나라 수상군의 진공을 일부 차단하여
수나라 '특별히 공부는 못하는데 대가리만 큰' 30만을 외롭게 하였으나,
645년의 당나라 수상군의 기습에 공략당하여
이제 평양으로 가는 해로에는 '오빠 달려'의 듕궉말이 가득차게 됩니다.
이후 당의 공격이 평양성 직공으로 흘러간데는 물론
요동성과 백암성 등의 요하방어선, 박작성 국내성 등의 압록강방어선이 뚫린 것도 원인이겠으나
645년의 바사성 상실은 하천에서 육상군을 막는다란 전략적 전제를 그야말로 휴지로 만든 사건인데
학계에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더군요...라고
국토지리원 제공 "대한민국주변도(국문)_A4.jpg"에서 발췌
다시 사진으로 넘어가죠..
비사성에 올라 산등성이를 봅니다.
자세히 보면 희미하게 성벽이 보이죠.
듕궉의 성이 허허벌판에 방형으로 쌓는 형태라면
한반도, 특히 고구려의 성은 산세를 이용하게 됩니다.
듕궉의 성이 대량의 물자와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나무골재의 단단한 토성을 쌓는다면
(말이 토성이지 실제로는 공구리같은 형태지요)
한반도에선 물자도 없지, 인구 적지, 근데 산은 딥따 많지.. 이러니
가급적 물자가 덜 소요되는(하지만 쌓는 인간은 눈튀어나오지..) 산성을 쌓게 되지요.
되도록이면 절벽이나 험한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활용하면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에코가 아니라 말그대로 인문환경)입니다.
이게 비사성입니다.
아래 찍히신 분은 우연히 들어간 일행분.
사생활보호를 위해 정면은 공개 안합니다. (공개시 인기폭발 우려 있음!)
자, 성에 올랐다구요? 성벽을 보여주세요.
요 빨간 선 안쪽이 멀리서 보이는 성벽입니다.
RGM-79는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왔지만 등산을 해서 성벽을 쌓은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과 존경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 사진은 RGM-79가 산성고고학을 피한 이유를 여러 사람들이 이해하게 해줄듯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3계단 이상 승강기거든요!
비사성 사진, RGM-79가 오토바이를 타고 산에 오르자 일행들은 좌측에 보이는 버스를 타고 따라왔습니다.
RGM-79만 치사한 건 아니었다능!!!! 산성관광의 개척자라능..(머리 위에 콜로니를 떨구겠다!!!)
듕궉인들이 지 입맛대로 지어놓은 장대로 올라가는 일행들,
두 분을 빼고 가정이 있으신 분들이라 뒷모습만 공개합니다.
사실 여기서 RGM-79는 사진을 많이 찍었어야 했습니다.
장대는 듕궉식이고 문처럼 생긴 안쪽으로 옥황상제를 모시는 공간과
갖가지 듕궉식 치장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지금같으면 듕궉의 문화를 살핀다는 이유로 많이 찍었겠지만
당시엔 고구려 것만 찍는다는 생각 밖에 없었거든요.
누구시던지 비행기값하고 차비만 주신다면 당일치기로라도 대련에 가서 찍어오겠습니다.
아까 오토바이를 타고 내린 것을 바라본 겁니다.
횡으로 성벽처럼 보이는 것은 요즘 것이고
종으로 올라간 것이 옛날 성벽입니다.
날이 맑았다면 대련시내가 다 보였을 것이고 바다도 보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장대에서 이 비사성이 가지는 역사적 위상을 설명하기가 더 편했을텐데
바다를 찍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만약 1박 2일의 체류비와 항공료만 지원해주신다면 다녀오겠습니다.
가을은 비수기니 30만원이면 될까나요?
비사성을 점령한 후 세웠다는 석고사.
가람배치 그냥 보면 우리식, 특히 백제삘이 납니다만...(아닌 거 아시죵?)
석고사도 그닥 관심이 없어서 대충대충 넘어갔는데
그나마 찍은 사진도 전송 중 죄다 날아갔습니다.
특히 사천왕처럼 지키고 서있는 관우와 관평 사진 날아감에 통곡..
비록 오나라빠, 특히 손책, 주유, 노숙빠지만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습니다.
뭐, 3세판, 듣기 둏은 꽃노래도 질릴 횟수로 말하자면
연구비 지원해주시면 찍어다 드린다니깐요.
(군대, 아니 대련 꼭 가고 싶습니다!!!)
석고사 앞을 지키는 사자상.
이건 암놈인데 발 아래 뭘 누질르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혹 게이머용 무선마우스????
여의주는 숫놈이라 들었는데 암놈은 기억도 나지 않네요.
숫놈 사진요? 당근 독사진은 날아갔으나..
커플 사진은 찍었습니다.
한 미모 하시는 일행분들의 편안한 사생활을 위해 뒷모습만 찍었습니다.
꼭 이분들의 미모를 독점하겠다는 의도로 해석하지 말아주시면 곤란합니다.(응?)
비사성을 내려오는 길에 찍은 사진.
4면이 절벽이라는 미소녀같은 비사성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절벽을 따라 내려가는 길도 징그러웠습니다.
공격하던 애들은 얼마나 욕을 하며 올라갔을까요?
역시 3계단 이상 승강기는 진리입니다.
다 내려와서 올려다본 비사성벽.
만약 당군이 텔레토비들이라면 '이제 그만~' 소리에도 "아이 싫어, 싫어"했을 겁니다.
한 5시간을 넘게 달려 찾아간 단둥시.
잠은 여기서 자기로 하고 아침엔 오녀산성이 있는 통화로 갈 것인데
저녁은 북한식당에서 먹었습니다.
매우 늦게 찾아가서 짜증나는 아가씨들 나와서 노래하는데
RGM-79는 그보다 머리 위에 놓인 북한방송을 보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정말 북한이구나 싶은 방송이었달까요?
무슨 영상에 석양에 보초서는 장면은 우리나라 방송에도 많이 나오는데
바로 다음에 착검한 소총이 화면을 채우는 장면의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것이 북한이다!!"
십수년 전에 이탈리아 감독이 찍은 북한 행사 다큐 볼 때 느꼈던 감정을 한 장면으로 다시 느꼈네요.
어떻게 듕궉을 5일 돌면서 이질감보다 동질감이 더 많았는데
국경도시에서 잠시 본 영상이 그렇게 이질적일 수 있을까요?
사진은 압록강철교, 그러니까 북한 경제의 대동맥이라 불리는 것의 사진입니다.
강건너 불꺼진 신의주부터 많이 찍었는데 죄다 엉망이었습니다.
찍히는 것도 거부당한 것일까요?
그나마 정말정말정말 잘 나온 사진이 이겁니다.
다음 사진은 이어서 올리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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